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70화 (70/227)
  • < 제 22장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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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한창 전투가 치러지던 방 안의 모두가 얼어붙은 것 마냥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 쉬는 것을 잊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침묵을 깨트린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침묵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융케라스의 거체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비스듬히 기우는가 싶더니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처럼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크게 뜬 두 눈에는 조금의 빛도 담겨 있지 않았다.

    “허억, 허억… 허…….”

    융케라스에게 짓눌려 있던 용호가 거친 숨을 토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용호의 품에 안겨있던 카타리나는 얼른 팔 다리를 놀려 그런 용호를 도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융케라스가 용호를 덮쳤고, 둘은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융케라스가 쓰러졌다.

    “정신 제압.”

    용호가 거친 숨을 토하며 낮게 말했다. 탐욕이 융케라스를 집어삼키는 광경은 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자신과 일단은 동급이라 할 수 있을 존재가 거대하고 거대한 파도에 저항 한 번 못하고 휩쓸리는 광경은 실로 전율적이었다.

    “놈이 내게 정신 제압을 시도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크들은 아직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카타리나와 오필리아는 아니었다. 특히 오필리아는 환희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환희는 탐욕에 관한 것이었다.

    공포 역시 탐욕에 관한 것이었다.

    융케라스는 수십 년간 가주의 자리를 지킨 자였다. 하지만 그래봐야 공백지의 작은 던전을 소유한 가주에 불과했다. 결코 일곱 개의 대죄 가운데 하나인 탐욕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저것이 탐욕의 힘.

    참으로 거대하고 거대한 의지.

    절로 환희가 일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신의 주군이란 사실이 너무도 행복했다.

    하지만 동시에 본능적인 공포가 일었다.

    선술집에서 용호를 처음 대면했던 날.

    그 날 용호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오필리아 자신도 저렇게 되었을 터였다. 융케라스처럼 정신이 죽어버려서 텅 빈 눈으로 바닥에 나자빠졌으리라.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정신세계 속에서 아몬과 탐욕을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불타는 세상을 마주할 것만 같았다.

    오필리아는 연신 마른 침을 삼켰다. 전신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이런 오필리아와 달리 카타리나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이분이야 말로 자신의 주인님, 마몬 가의 가주라는 사실을 자랑하듯 활짝 웃었다. 흥분한 감정 상태를 여실히 반영하듯 꼬리와 귀가 맹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리쿰은 선술집 바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고, 오필리아와는 다른 의미로 전율했다.

    탐욕은커녕 아몬에 대해서도 모르는 리쿰이었다. 때문에 리쿰에게는 용호가 압도적인 정신 방어 능력을 갖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술집의 여주인인 오필리아를 역으로 제압한 것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는데 불과 몇 초만에 가주의 정신을 파괴해버렸다.

    참으로 막강한 가주의 정신력이었다. 무인으로서 존경심이 일 지경이었다.

    리쿰의 눈동자가 용호와 융케라스에게서 오필리아 쪽으로 굴렀다. 땀에 흠뻑 젖어 헐떡이던 오필리아는 리쿰의 시선을 눈치 챘고, 선술집의 여주인답게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으로 속내를 모두 짐작했다. 탐욕과 아몬에 대한 공포 때문에 손발이 떨렸지만 억지로나마 미소를 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이 자리에는 ‘해설’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융케라스가 가주님께 정신지배를 시도했어요. 하지만 그건 참으로 광오하고 무지한 짓이었죠. 정신지배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아요. 두 존재 간의 정신력 싸움이라고 해야 할 거예요. 융케라스는 스스로를 파도라 생각했겠죠. 가주님은 휩쓸어버릴 모래성이라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가주님은 방파제였어요. 오히려 파도를 깨부숴버릴 그런 방파제. 그 결과는 지금 눈앞의 것과 같고요.”

    오필리아의 설명에 오크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야 겨우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카타리나와 마찬가지로 놀라움과 호감을 동시에 보였다.

    오크들의 반응에 만족한 오필리아는 용호에게 살짝 윙크로 신호를 보냈다.

    평소라면 누군 발로 차고 누군 끌어안느냐고 장난스럽게 투덜거렸겠지만 아직 그럴 여유까지는 없었다. 여전히 등이 축축했다. 애써 감추고 있지만 다리도 살짝 후들거렸다.

    오필리아의 신호는 그 뜻이 명확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용호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역마들에게 화답해 주었다. 짧고 굵게 그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이겼다.”

    승리 선언.

    가장 먼저 환호한 것은 카타리나와 스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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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적으로 지친 것과 달리 몸은 쌩쌩했다. 전투 시간은 짧았고, 그나마도 거의 일방적이었다.

    용호도 막상 전투에서 한 일은 오필리아를 발로 찬 뒤 카타리나와 바닥을 뒹군 것이 전부일 지경이었다.

    ‘엉큼함 때문이 아냐, 엉큼함 때문이.’

    자신의 어휘 선택을 변호한 용호는 사역마들을 이끌고 포라스 가의 던전의 심장 방을 향해 이동했다.

    정신이 죽어버린 융케라스의 육신으로부터 정수를 취하는 일은 일단 뒤로 미뤘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비게일 가에 융케라스의 죽음을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가주가 죽으면 던전의 영혼도 죽었다.

    실제로 포라스가 죽었을 때 포라스 가의 던전의 영혼은 죽었고, 포라스의 후계자와 집사장은 포라스의 죽음을 명확히 인지했다.

    아비게일 가에게 괜한 정보를 줄 필요는 없었다.

    융케라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뭐가 되었든 움직임을 보일 터였다. 어쩌면 후계자나 집사장이 사역마들을 잔뜩 이끌고 포라스 가로 몰려올지도 몰랐다.

    그런 일들은 ‘나중에’ 일어나야만 했다. 앞으로 하루에서 이틀 뒤. 용호 자신과 마몬 가의 사역마들이 필요한 것들을 모두 다 챙긴 뒤에.

    오우거에 필적하는 덩치를 가진 융케라스의 육신을 나르느라 오크들이 진땀을 흘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용호는 등 뒤에서 들리는 각종 신음소리들을 애써 무시하고 앞만 보고 나아갔다.

    카타리나와 스컬, 오필리아를 대동하고 던전의 심장 방에 들어간 용호는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바로 던전의 심장 앞에 선 뒤 양손을 들어올렸다.

    던전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인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심장 너머로 두껍고 단단한 방어막이 느껴질 뿐이었다.

    마력을 주입해 강제로 방어막을 파괴한다. 맨몸뚱이가 된 던전의 심장으로부터 정수를 확보한다.

    용호가 마력을 주입하자 던전의 심장으로부터 붉은 빛이 일었다.

    심장의 저항이었다. 일족의 거대한 사역마라 할 수 있을 던전은 비록 그 의지를 잃었지만 ‘생존 본능’만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용호는 이를 악물었다. 마력을 문자 그대로 때려 박으며 이해했다. 뜨내기들이 괜히 몇 달씩이나 마몬 가의 심장 방어막이 약해지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용호 자신도 거듭된 진화와 정수 흡수로 마력이 성장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나가떨어졌을 터였다.

    물론 잠시 마력 주입을 멈추고 한숨 돌린 뒤 다시 시작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던전의 심장에 마력이 보충되지 않는 상황이니 사실 그게 정석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용호는 한 번에 끝을 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단순했다.

    ‘폼이 안 나잖아!’

    보고 있는 눈이 한 둘이 아니었다. 융케라스와의 싸움 이후 오크들은 용호를 문자 그대로 찬양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장 옆에 있는 카타리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주님이시라면, 우리 가주님이시라면!- 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주의 위엄과 기껏 치솟은 충성도를 위해서라도 한 번에 끝을 내야 했다.

    용호는 무리를 했다. 그리고 그 무리는 끝내 보답받았다. 던전의 심장의 방어막이 용호의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용호는 유리창이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쳐놓은 크기였던 던전의 심장이 부서졌다. 그리고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 작은 구슬이 드러났다. 스스로 붉은 빛을 발하는 이것이야말로 던전의 정수였다.

    손에 쥐자마자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다. 연달아 가주의 죽음을 경험하고 던전 폐쇄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라스 가의 던전의 심장은 여전히 막대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탐욕이 꿈틀 거렸다. 무어라 소리치진 않았지만 눈앞의 마력에 반응하는 것이 분명했다.

    용호는 인내했다. 정수를 한 번 꽉 쥐어본 뒤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열었다. 눈 딱 감고 정수를 갈무리했다.

    던전의 심장의 정수를 가장 효율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것은 똑같은 던전의 심장이었다.

    이 정수는 루시아의 몫이었다. 공간의 문뿐만 아니라 각종 던전 시설을 건설해 던전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루시아를 좀 더 키워야 했다.

    ‘내 몫은 아직 남았고.’

    하지만 그 몫 또한 바로 취할 수 없었다. 던전의 심장 방어막과 싸우느라 기진맥진했지만 용호는 쓰러져 쉬는 대신 다음 명령을 내렸다.

    “리쿰, 포라스 가의 재물들 가운데 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두 모아 던전의 입구 방으로 옮겨라. 던전의 심장이 파괴되었으니 함정들은 발동하지 않을 거다.”

    명령조의 어투도 이제는 제법 입에 붙은 느낌이었다.

    리쿰은 용호에게 예를 표한 뒤 수하 오크들을 이끌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용호는 연이어 오필리아를 돌아보았다.

    “오필리아는 선술집으로 돌아가 줘.”

    “알겠습니다, 포라스 가의 가주와 융케라스가 서로를 맞찌른 끝에 동귀어진 한 걸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저 연막을 하나치는 것 정도에 불과할 거예요. 선술집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있는 정보도 아니고요.”

    선술집으로 돌아가라는 말 한 마디로부터 용호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헤아린 오필리아의 유능함이 흐뭇했다.

    그리고 흐뭇한 것은 오필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능하며 상냥한 주군을 모시는 것은 수하된 자의 행복이었다.

    용호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어주면 그걸로 족하니까. 어느 정도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 할 거고.”

    포라스 가의 가주와 융케라스가 서로 동귀어진 했다는 이야기 자체는 그럭저럭 꾸며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던전의 심장을 파괴해 정수를 취한 것은 누구인가?

    융케라스의 정수를 취한 것은 누구며, 던전의 재물들을 쓸어간 것은 또 누구란 말인가.

    머리가 있는 자라면 당연히 의심할 내용들이었고, 그 ‘누군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자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런 어수룩한 정보를 선술집을 통해 퍼트릴 수는 없었다. 선술집과 마몬 가의 관계는 당분간 계속 ‘비밀’로 유지되어야만 했다.

    그냥 도는 소문.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어쩐지 그럴싸한 이야기들. 포라스 가에서 도망친 사역마들이 봤다더라-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이런 뜬소문 만으로도 주변의 가주들을 교란하기에는 충분했다. 가주를 잃은 아비게일 가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을 것이고, 다른 가주들도 이 모든 일을 이룬 것이 마몬 가의 가주라는 사실을 쉽사리 확신하진 못할 터였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따로 마차를 보내드리지 못하는 점은 이해해 주세요.”

    “그래, 오늘 활약 고마웠어. 발로 찬 건 미안하고.”

    마지막 말에 오필리아가 까르르 웃었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허리를 깊이 숙이며 연극에나 나올 법한 고풍스런 예를 표한 뒤 한 발 먼저 포라스 가의 던전을 떠났다.

    포라스가 죽은 이후 던전의 방어력을 높이는 데 상당한 돈을 썼는지 포라스 가의 재물은 생각처럼 많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현재 마몬 가의 전재산보다는 훨씬 더 많았다.

    타고 온 전투 마차 두 대가 황금을 비롯한 각종 현물자산들로 가득 찼다. 용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융케라스와 호위기사 쿤이 가지고 있던 아티펙트들까지 회수했다. 리빙 아머들 또한 들고 가서 녹이기라도 할까 고민했지만 아예 싸운 흔적이 없는 것도 이상했기에 절반 정도만 전투마차 위에 실었다.

    사람 탈 자리에 물건들이 가득 찼으니 걸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지만 사역마들의 표정은 다들 밝았다. 승리도 승리였지만 용호가 특별 보너스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전투 이후 그럭저럭 떠날 채비를 갖추는 데 걸린 시간은 세 시간 여.

    마지막으로 용호는 포라스 가의 던전 깊은 곳에서 껍데기만 남은 융케라스를 마주했다.

    마왕의 권능은 그야말로 게임 판의 조커였다.

    융케라스의 권능이 정신제압이었기에 오히려 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전투 과정만 보면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순간들이었다.

    전투 불능에 빠졌다고 판단한 쿤이 움직여 상황 자체를 뒤집었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의 원동력은 융케라스의 권능이었다.

    아몬의 불꽃을 냉기로 돌파했던 포라스.

    움직일 수 없는 수하를 움직이게 만든 융케라스.

    앞으로 마주할 마왕들은 어떤 권능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칠대죄악을 보유한 다른 왕들은 어떤 존재들일 것인가.

    용호는 머리를 비웠다. 고민하는 대신 손을 뻗어 융케라스의 이마 위에 올렸다.

    강해진다.

    용호 자신이 가진 진화의 권능을, 탐욕의 힘을 더욱 더 키운다.

    빛이 일었다.

    탐욕이 융케라스의 정수를 집어삼켰다.

    제 22장 - 던전 오펜스 끝, 제 23장 - 던전 업그레이드 로 이어집니다.

    < 제 22장 #5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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