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69화 (69/227)
  • < 제 22장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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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라스 가의 던전 입구는 마몬 가의 던전 입구와는 그 형태가 다소 달랐다.

    마몬 가의 던전 입구가 언덕 아래 커다란 문이 달린 형태인 것과 달리 포라스 가의 던전 입구는 문자 그대로 ‘성문’이었다.

    돌을 쌓아 만든 성곽이었는데, 던전 자체는 지하에 위치했는지 겉에서 보면 성문만 불쑥 솟아있는 형태였다.

    던전 입구는 굳게 봉해진 상태였다. 융케라스의 것으로 보이는 전투 마차도 문 옆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아직 던전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길안내를 맡은 고칸이 말했다.

    “저희가 빠져나온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성문 근처에 전투 마차들을 세운 용호는 고칸의 인도를 따라 이동했다. 성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작은 숲이었는데, 수풀 사이에 뚜껑 달린 우물이 숨겨져 있었다.

    고칸과 오크들이 우물 뚜껑을 여는 동안 리쿰이 용호를 돌아보았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비밀통로를 통해 던전 곳곳으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융케라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인데… 혹여 생각해두신 이동 경로가 있으신지요.”

    리쿰 뿐만 아니라 오필리아도 꽤 궁금하다는 눈치였다. 기대뿐만 아니라 약간은 시험하는 것 같은 눈빛도 섞여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용호가 말했다.

    “던전의 심장 방으로 직행한다.”

    융케라스의 목적지는 던전의 심장 방이었다. 현재 어디서 헤매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국에는 던전의 심장 방으로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꽤나 타당한 선택이었지만 오필리아는 바로 납득하지 않았다. 리쿰 또한 약간은 난처하다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 말씀드렸던 위치는 가능성이 높은 위치입니다. 저도 던전의 심장 방이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스컬컬!”

    스컬이 걱정마라는 듯 돌연 소리쳤고, 카타리나 역시 입 꼬리를 약간이지만 위로 올렸다.

    오필리아와 리쿰은 모르지만 카타리나와 스컬은 아는 것이 있었다.

    우월감 때문인지, 아니면 용호의 능력에 신이 난 것인지 카타리나가 초롱초롱한 시선을 용호에게 보냈고, 용호는 그런 카타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오필리아와 리쿰에게 말했다.

    “길은 내가 찾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는… 통로가 너무 좁아서 살라미는 못 들어갈 것 같군.”

    아무래도 비밀통로다보니 여간한 말보다도 더 큰 살라미가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끙끙 거리는 살라미에게 비밀통로와 던전 입구를 주시하라 명한 용호는 다시 리쿰을 돌아보았다.

    “그럼 돌입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리쿰이 아는 용호는 헛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쓸 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일단은 믿기로 했다.

    리쿰에 이어 고칸과 항복한 오크들이 내려갔고, 그 뒤를 용호와 카타리나가 따랐다. 스컬과 오필리아는 나머지 오크들이 모두 내려간 뒤 마지막으로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물 바닥에서부터 이어진 통로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리쿰과 오크들은 미리 준비해온 막대형 조명장치를 꺼내 길을 밝혔다.

    거의 수백 미터 거리를 나아가고나자 리쿰이 멈춰 섰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갈림길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던전의 심장 방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을 향해 막연히 걸어왔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그런 막연함이 통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길을 찾아야만 했다.

    카타리나에게 조명을 넘겨받은 용호는 리쿰을 지나 제일 선두로 나섰다. 바로 발걸음을 내딛는 대신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포라스 가의 던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용호에게 있어 가장 값진 것인가.

    용호 안에서 탐욕이 눈을 떴다. 순수하기까지 한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용호로부터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새어나왔다. 연기와도 같은 그것은 여러 갈래로 뜯어졌고, 개중 몇 개가 카타리나를 휘감았다. 그보다 작은 연기들이 오필리아와 스컬에게도 미쳤다.

    용호는 욕망을 가다듬었다. 보다 원하는 것을, 지금 이 순간 탐하는 것을 강하게 연상했다.

    여러 갈래였던 연기들이 점차 하나가 되었다. 굵고 거대한 흐름이 되어 먼 곳을 향해 뻗어나갔다.

    용호는 눈을 떴다. 탐욕의 인도를 따라 발걸음을 내딛었다.

    리쿰과 오필리아는 용호의 탐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무어라 표현 못할 위화감을 느꼈다. 리쿰보다 마력에 밝은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조금의 위해도 가해지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탐욕.’

    용호의 탐욕과 정면에서 마주한 적이 있는 오필리아였다. 그때와 성격이 다르다 하나 지금 용호에게서부터 일어난 기운은 탐욕이 분명했다.

    거침없는 행보였다. 카타리나와 스컬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용호의 뒤를 따랐다. 이미 지도를 숙지해 함정의 위치를 모두 알고 있는 용호였기에 주저하거나 멈추는 일 한 번 없었다.

    그렇게 다시 얼마나 나아갔을까.

    용호가 멈춰 섰다. 아무것도 없는 벽에 손을 짚었고, 강제로 마력을 주입했다.

    서로 다른 마력이 충돌하며 소음이 일었다. 덜컹하는 기계음이 울리더니 벽에 숨겨져 있던 비밀 문이 드러났다.

    리쿰과 오크들은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용호와 문을 번갈아 보았다. 카타리나만이 신나서 얼굴 한 가득 감추지 못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보 상인이기도 한 오필리아는 새삼 긴장과 함께 침을 삼켰다.

    각각의 죄악마다 서로 다른 능력이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저것이 탐욕의 힘인 걸까?

    ‘소유주의 욕망을… 인도하는 힘?’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분명 대단한 힘이었다. 하지만 ‘겨우’ 저것에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오필리아의 얼굴에도 작게나마 미소가 어렸다. 용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거침없이 던전의 심장 방에 들어갔다. 던전의 심장 방은 던전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인 동시에 가장 무해한 장소이기도 했다.

    본래 포라스 가 소속이었던 오크들도 던전의 심장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던전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인지 던전의 심장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밝게 빛나는 구슬로만 보였다.

    용호는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던전의 심장을 보았다. 마몬 가의 것보다는 던전의 역사 자체가 짧아서 그런지 몇 단계 더 발전했음에도 그 크기가 생각처럼 크지 않았다.

    탐욕이 소용돌이 쳤다. 용호에게 갈증을 호소했다.

    거대한 마력이었다. 지금까지 마주한 그 어떤 정수보다도 강한 힘이 느껴졌다. 용호도 마음이 동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던전의 심장을 수호하는 방어막을 파괴하고 정수를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지금은 심장을 취하는 데 마력을 쓸 때가 아니었다.

    던전의 심장은 무사했다.

    융케라스는 아직 던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융케라스가 멀리 있다면 던전의 심장을 취해 던전을 장악한다.

    융케라스가 가까이 있다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기습을 가한다.

    던전 내부는 어두웠다. 그렇기에 밝은 곳에 있을 때보다 청각이 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융케라스가 던전 안을 헤매고 있다면.’

    그것도 던전의 심장을 찾기 위해 꼼꼼하게 던전을 뒤지고 있다면.

    쾅!

    어둠 너머에서부터 굉음이 울렸다. 약간이지만 비명 같은 것도 뒤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함정이 발동하면서 난 소리 같았다.

    이런 것을 분석하는 데 능숙하지 못한 용호도 가깝고 먼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용호의 수하들은 보다 많은 것들을 알아냈다.

    “어디인지 알 것 같습니다.”

    리쿰이 말했고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침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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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게일 가의 가주인 융케라스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포라스 가의 후계자- 그 머저리 같은 어린놈의 목을 졸라 죽인 것까지는 좋았다. 아직 어리고 나약했지만 그래도 꼴에 가주라고 제법 먹음직스런 정수를 토해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아버지가 수십 년 세월동안 목숨 걸고 지킨 던전을 통째로 갖다 바치는 상황임에도 웃는 낯짝을 보여주던 신임 가주와 달리 집사장은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탐탁찮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놈이 결국엔 일을 내고 말았다.

    근 하루.

    가짜 던전의 심장 방에 갇혀 있었던 시간이었다.

    겨우겨우 마력 봉인을 깨부수고 나오니 그 다음에는 겹겹이 쌓인 함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그것들을 돌파하며 던전을 뒤지는데 하루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사이에 잃은 사역마들의 숫자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집사장 놈의 목을 분지른 것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던전의 심장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를 아득아득 갈던 융케라스는 끝내 분을 못 참고 벽을 후려쳤다. 거의 오우거에 준하는 덩치와 힘을 가진 융케라스인 터라 주먹질 한 방에 천장과 벽이 요동쳤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

    함정 방을 돌파하기 위해 나아가던 리빙 아머 두 마리가 천장에서 떨어진 거대한 추에 맞아 완전히 찌그러졌다.

    처음에는 열다섯 마리였던 리빙아머가 이제 일곱 밖에 남지 않았다. 놀 전사들도 열 마리 가운데 여섯이 죽어 넷 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 호위기사인 오우거 전사 쿤과 융케라스 자신이 건재한 것이 다행인 판국이었다.

    융케라스의 노여움에 놀 전사들이 움찔했다. 죽은 놀 여섯 가운데 하나는 함정이 아닌 융케라스에게 죽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조명장치로도 모두 몰아내지 못한 던전의 어둠이 융케라스의 분노를 더욱 더 가중시켰다.

    융케라스는 거친 숨을 토하며 머릿속으로 리빙 아머 한 마리와 놀 전사 한 마리의 가치를 비교했다. 이제부터 앞장 설 것은 리빙 아머가 아니라 놀이라는 계산을 끝마쳤다.

    융케라스는 막대형 조명 장치를 든 손을 거칠게 휘두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배후를 맡은 놀 전사들에게 앞장서라 윽박지르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놀 전사의 숫자가 줄어 있었다.

    넷이 아닌 둘 밖에 보이지 않았다.

    융케라스의 당혹스런 얼굴을 마주한 놀들은 서로를 돌아보았고, 이내 깜짝 놀라 털을 세웠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넷이 있었는데 둘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함께 있던 놀 전사 둘이 사라졌다.

    “이놈들이 감히 도망을 쳐?!”

    융케라스가 노성을 터트리며 놀 전사들에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놀란 놀들 가운데 하나가 새파랗게 질려 뒷걸음질 쳤고, 어둠에 가려져 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조명장치를 움직여 발밑을 비췄다.

    목에서 피를 잔뜩 흘린 채 입을 뻐끔거리는 놀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엄청난 빛이 일었다. 섬광탄이 순간이지만 방 안에 있던 모두의 눈을 가렸다.

    어둠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이번엔 빛 속에서 일어났다.

    카타리나가 다시 한 번 놀의 목을 단검으로 그었다. 너무나 강렬한 빛 때문인지 그림자 마력이 아까처럼 큰 힘을 발하진 못했지만 이미 놀의 목숨을 끊기에는 충분한 공격이었다.

    천장의 비밀통로에서 쏟아지듯 강하한 오필리아 또한 꼬리로 놀의 목을 휘감았다. 단순히 조르는 데 그치지 않고 목을 부러트렸다.

    섬광탄의 빛이 사라졌다. 가까스로 시야를 회복한 융케라스가 본 것은 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놀 전사들의 시체가 전부였다.

    누군가가 있었다. 지금까지처럼 함정만을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니었다.

    “전투태세로! 가주 님을 수호하라!”

    융케라스의 호위기사인 쿤이 소리치자 살아남은 리빙 아머들이 융케라스를 향해 일제히 돌아섰다.

    그리고 그런 리빙 아머들의 등짝을 향해 망치 세례가 쏟아졌다. 시작을 알린 것은 특히나 크고 투박한 전투 망치였다.

    “스컬컬!”

    통쾌한 한 방이 리빙 아머의 등을 강타했다. 리쿰을 비롯한 오크들 역시 저마다의 둔기로 리빙 아머들을 두드렸다. 이내 난전이 시작되었지만 선수를 빼앗인 리빙 아머들은 쉽사리 전세를 뒤집지 못했다.

    어둠은 공격자가 아닌 방어자의 편이었다.

    때문에 공격자 측은 충분한 조명 수단을 준비하는 것이 던전 전투의 상식이었다.

    융케라스도 물론 조명 수단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이틀이란 시간과 포라스 가의 함정들은 충분하다 생각했던 융케라스의 조명들을 거의 대부분 빼앗았다.

    갑작스런 오크들의 난입에 융케라스는 포라스 가의 잔존 세력들을 떠올렸다. 던전을 지배하는 가주답게 도망치는 대신 노성을 토하며 애병인 대검을 뽑아들었다.

    “어리석은 놈들! 쿤! 쓸어버려라!”

    가주의 명령에 호위기사인 쿤이 호응했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메이스를 움켜쥐고 오크들을 향해 노성을 토했다.

    그리고 그런 쿤의 등 뒤로 오필리아가 소리 없이 접근했다. 기척을 눈치 챈 쿤이 급히 돌아섰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순식간에 쿤의 등을 타고 오른 오필리아가 커다란 갑옷 사이로 드러난 쿤의 목에 날카롭게 세운 수도를 꽂아 넣었다.

    일격이탈.

    쿤의 목 안에서 손을 한 번 헤집은 오필리아는 쿤의 어깨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고통스런 가운데 두 팔을 휘두르던 쿤은 허우적거리던 자세 그대로 주저앉았고, 머리 높이가 낮아진 쿤의 등 뒤로 이번에는 카타리나가 나타났다. 쿤의 목 뒤에 거침없이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기껏해야 몇 초 남짓할 사이에 이어진 연격은 치명적이었다.

    목에서 피를 분수처럼 쏟아낸 쿤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고, 부들부들 몸을 떨 뿐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스컬컬!”

    등 뒤에서 울린 고함 소리가 다시 한 번 융케라스를 자극했다.

    눈앞에서 쿤이 나자빠지는 꼴을 본 융케라스는 숨을 헐떡였다. 손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꼬리를 흔드는 오필리아를 보며 경악을 토했다.

    “선술집의 여주인?! 네가 어째서?!”

    오필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피 묻은 입술로 화사하게 웃었다. 그 옆에는 단검을 역수로 쥔 카타리나가 자리했다.

    그리고 어둠이 사라졌다. 어디선가 던져진 조명기구에서 뿜어진 빛이 방안을 밝혔다.

    융케라스는 눈부심 속에서나마 방 안의 광경을 전부 볼 수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찌그러진 리빙 아머들을 두드리는 스켈레톤과 오크들이 보였고, 죽어 나자빠진 놀들과 여전히 부들거리기만 할 뿐 일어서지 못하는 쿤이 보였다.

    포라스 가의 잔존 세력들이 아닌 것인가?

    설마하니 선술집의 여주인이 던전에 욕심을 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불꽃의 마왕!”

    비밀 통로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를 노려보며 융케라스가 소리쳤다.

    마몬 가의 새로운 가주.

    포라스와 랜드 웜을 격파한 불꽃의 마왕!

    용호는 답하는 대신 아몬을 움켜쥐었다. 오필리아와 카타리나가 그런 용호의 곁에 섰고, 스컬 역시 전투 망치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술집의 여주인이 마몬 가에 붙은 것인가?

    포라스 가의 오크들이 놈에게 길을 알려준 것인가?

    융케라스는 의문들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포기하거나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대신 지면을 박차며 소리쳤다.

    [“쿤! 적을 쳐라!”]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다. 마력이 어린 외침이었다.

    “크아아아아!”

    나자빠져 있던 쿤이 거짓말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용호를 향해 막무가내로 달렸다. 마치 덤프트럭과 같은 기세였다.

    융케라스의 마력은 쿤에게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정신을 제압하는 힘이 어린 그것은 카타리나와 오필리아를 지체하게 만들었다.

    “스컬컬!”

    스컬이 소리쳤다. 그 순간 용호는 오필리아를 발로 차 밀어냈다. 몸을 던져 카타리나를 덮쳤고, 미친듯이 질주하는 쿤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지배에 의해 움직인 쿤은 벽에 충돌해 나자빠졌다. 이제는 정말 한계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융케라스가 용호의 앞에 당도했다. 마치 벼락처럼 쏟아지는 대검을 용호는 가까스로 몸을 뒤틀어 피했다.

    융케라스는 다시 검을 뽑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버리고 커다란 두 손으로 용호와 카타리나를 짓눌렀다. 용호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권능을 발현했다.

    지배의 마왕.

    그것이 융케라스의 이명. 가까이 마주한 시야를 통해 상대방의 정신을 제압하고 그 움직임을 조종하는 능력!

    권능을 발해 불꽃의 마왕을 제압한다. 그것으로 지금의 상황을 역전한다!

    융케라스는 크게 웃었다.

    용호의 저항 따위 짓밟아 주겠다는 듯 가지고 있는 마력을 모두 권능에 쏟아 부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불꽃의 마왕이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융케라스 자신을 받아들였다.

    &

    융케라스는 눈을 깜박였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과 땅이 불탔다. 세상 전부가 붉고 붉은 홍염에 뒤덮여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지금까지 권능을 발휘하며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융케라스는 몸을 떨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너무나 높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내려다보는- 너무도 거대한 존재에게서 느끼는 공포였다.

    “아… 으…?”

    제대로 된 말조차 맺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찮은 것.

    높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융케라스는 그 말을 부정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 모두를 불태우던 불꽃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거대한 존재가 세상을 뒤덮었다.

    융케라스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최악의 수를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까스로 쥐어짜낸 목소리를 토해냈다.

    “타, 탐욕의 왕.”

    융케라스는 저항할 수 없었다. 탐욕이 융케라스의 정신을 집어삼켰다. 그 존재를 멸하였다.

    &

    < 제 22장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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