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47화 (47/227)
  • < 제 14장 #4 (수정) >

    &

    감옥을 지키고 있는 것은 트리엔트와 살라멘더였다. 둘 모두 아무 것도 안하고 멍하니 있기로는 스컬과 대적이 가능할 정도였으니 간수 역할이 천직이긴 했다.

    용호가 감옥 방에 들어서자 입구 쪽에 뿌리를 박고 있던 트리엔트는 몸을 구부려 길을 열어주었다. 아예 감옥 문 앞에 웅크리고 있던 살라멘더도 용호를 알아보고 인사하듯 머리를 조아렸다.

    감옥 안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오크들 역시 용호의 방문에 반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워있던 놈들은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기라도 했고, 몇몇은 제법 날카로운 눈으로 용호를 관찰했다.

    용호는 그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한 번씩 둔 뒤 가장 안쪽에 앉아 있는 오크를 보았다.

    엘리고스가 말한 눈에 상처가 난 오크 리쿰이었다.

    리쿰은 다른 놈들과 달리 용호를 노려보거나 노골적으로 관찰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으로 마주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안다는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더니 용호에게 작게나마 목례를 표했다.

    카타리나는 용호의 곁에 섰다. 용호로부터 눈짓을 받은 엘리고스가 스컬과 함께 감옥 문을 열었다.

    “리쿰, 나오시오. 가주님께서 대화를 원하시오.”

    진중한 어조였다. 다른 오크들이 작게 술렁이는 가운데 리쿰은 담담히 걸어 감옥을 나섰다. 엘리고스가 다시 감옥 문을 닫고 난 뒤에야 용호 쪽으로 돌아섰다.

    “자리를 옮기지.”

    오크들 사이에서 다시 술렁거림이 번졌지만 리쿰이 괜찮다는 듯 손을 살짝 들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엘리고스의 말마따나 감옥에 있는 오크들에게 상당한 통솔력을 발휘하는 듯 했다.

    ‘말인즉, 리쿰만 회유할 수 있다면 포로들 문제는 끝난다는 건가.’

    지금 당장만 보자면 나쁘지 않았다. 리더 없이 모두가 평등한 관계였다면 의견이 갈려 회유 작업에 난항이 생겼을 터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용호는 리쿰을 데리고 감옥 바로 옆방으로 이동했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 통로 방이었지만 엘리고스가 미리 가져다 둔 의자와 탁자 덕분에 아주 황량하지는 않았다.

    용호와 리쿰은 각기 탁자 맞은편에 자리했고,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는 용호의 등 뒤에, 스컬은 리쿰의 등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용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마몬 가의 사역마가 될 의사가 있다고 들었다.”

    “맞소. 나와 부하 여섯 놈 모두 같은 생각이요.”

    리쿰 역시 거리낌이 없었다.

    이쪽은 사역마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고, 저쪽은 사역마가 될 생각이 있었다.

    너무 간단하게 일이 해결되다보니 잔뜩 무게 잡으며 데리고 나온 게 어색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쪽도 조금이지만 근로 조건을 제시하고 싶소. 항복해서 사역마가 되는 처지이기도 하고, 솔직히 던전 상회에 노예로 팔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긴 하지만... 엄연히 마몬 가의 던전에 고용되는 것이니 만큼 시가에 맞는 기본급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기본급?’

    [던전의 사역마들은 크게 노예 사역마와 자유 사역마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 사역마들은 던전의 가주에게 ‘고용’된 상황이기 때문에 일정한 봉급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예속 사역마라 하나,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는 각각 호위기사와 집사장인만큼 본래대로라면 봉급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던전의 영혼이 마치 귀에 속삭이듯 조곤조곤 설명했다.

    듣고 보니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던전 사역마들은 게임 속의 캐릭터들이 아니었다. 던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이니 그저 의식주 제공만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가주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엘리고스가 비상시를 대비해 모아둔 거라며 꺼냈던 돈이 있었다.

    아마 그 돈 역시 봉급을 모아 마련했을 터였다.

    ‘전전대랑 전대 가주조차 준 봉급을 나는 안 주고 있었던 건가.’

    물론 그만큼 던전 상황이 안 좋기는 했지만 말이다.

    묘하게 양심이 찔린 용호는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카타리나를 보았다.

    가주와 예속 사역마답게 눈빛만으로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용호는 ‘너도 봉급 받고 싶니?’에 해당하는 눈짓을 보냈고, 어떻게 바로 알아먹었는지 카타리나가 몸을 비비 꼬며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약간 울상이었는데, 대충 ‘아, 아닙니다. 괘, 괜찮습니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묘하게 축 처진 귀와 약간의 기대가 섞인 눈망울을 보니 받고 싶긴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카타리나도 사고 싶은 것들이 있을 터였다. 만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것도 안쓰러웠다.

    용호는 ‘그래, 조만간에 어떻게든 챙겨줄게. 나 믿지?’하는 시선을 보냈고, 카타리나는 입술을 움츠리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 일곱에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으으 갑자기 예기치 않은 비용이 생기는구나.’

    물론 용호는 사역마들에게 단순히 의식주만을 제공하지 않았다.

    진화의 권능으로 혜택을 보는 것은 용호만이 아니었다. 사역마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혁신시킬 수 있었고, 이는 봉급 이상의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오크들은 비록 눈앞에서 용호가 진화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지만 아직 진화의 권능이 무엇인지, 그리고 과연 자신들에게도 그런 혜택이 돌아올지를 알지 못했다.

    아마 추후에 진화의 권능으로 재협상을 하면 비용이 생각처럼 많이 들지는 않을 터였다.

    어찌되었든 이 모든 것은 나중 문제.

    용호는 다시 리쿰에게 집중했다.

    “조건은 그것뿐인가?”

    “조건을 많이 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만큼 그 정도면 만족하오.”

    리쿰이 이번에도 진중하게 답했다. 아마 감옥에 갇혀 있는 시간동안 미리 생각을 정리해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바로 사역마 등록을 시작하지. 괜찮겠나?”

    “언제든지 좋소.”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용호도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리쿰에게 다가섰고, 리쿰은 얌전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가주가 죽음으로써 이전에 맺은 사역마 계약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계약 해지와 새로운 계약 성립에 다소간의 마력이 소모될 예정입니다.]

    [시작할게요.]

    용호는 리쿰의 이마 위 허공에 손을 올렸다. 살라멘더를 사역마로 맞이했을 때처럼 오른손 끝에서 마력이 일었고, 리쿰의 이마에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던 마법의 문장이 나타났다. 포라스의 문장이었다.

    가주가 죽고 나면 해당 가주와 계약한 사역마들의 계약은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던전의 영혼이 포라스의 마법 문장을 파괴했다. 새로이 용호의 문장을 새겨 넣었다.

    등록은 끝났다. 눈을 뜬 용호는 바로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이름 : 리쿰 (남)]

    [종족 : 오크]

    [분류 : 오크 워리어]

    [속성 : 대지 1레벨]

    [개체 천성]

    [신중함 / 우직함]

    [개체 적성]

    [힘 / 체력]

    [진화 숙련치 0/100]

    [힘 특화 1레벨 | ★★☆ (2.5)]

    [체력 특화 2레벨 | ★★★ (3)]

    [기량 특화 2레벨 | ★★☆ (2.5)]

    여느 사역마들과 마찬가지로 세세한 정보였다.

    리쿰의 던전 사역마 등록이 제대로 되었다는 뜻이었다.

    진화의 권능은 대상을 분석해서 진화 정보를 추출해내는 형식이었다. 때문에 용호의 통제 하에 완전히 들어오는 던전 사역마가 되어야지만 제대로 된 진화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약간의 피로감을 느낀 용호는 다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이번에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제 포라스의 던전 이야기를 좀 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가주님.”

    정식으로 던전 사역마 등록을 했기 때문인지 리쿰의 말투 자체가 공손하게 변했다. 리쿰은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가주님… 그러니까 포라스에게는 아직 어린 후계자가 하나 있습니다. 포라스의 죽음이 알려졌을 터이니 아마 지금쯤이면 후계자가 새로운 가주 자리에 올랐을 겁니다.”

    “어떤 녀석이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포라스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기라도 하면 꽤나 성가신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용호의 의중을 짐작했는지 리쿰이 약간은 누그러진 어조로 답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아직 어립니다. 포라스의 자식인 터라 무재가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가주 역할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아마 던전에 남아 있는 집사장이 사실상의 가주 역할을 대행할 겁니다. 상황도 상황이고, 집사장의 성격상 당분간은 수비에만 집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장에 복수를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용호가 추가적으로 물었다.

    “던전에 남아 있는 시설이나 사역마들은 어떻지?”

    “어린 후계자만 남겨두고 던전을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던 터라 포라스는 던전 방비를 확실히 해두고 나왔습니다. 비전투원인 일꾼들이 많긴 하지만 던전 사역마만 해도 오십이 넘게 남아있고, 던전 역시 적의 공격에 대한 대비가 확실합니다.”

    “빈집은 아니라 이건가.”

    약간이긴 했지만 역시 아쉬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방비 없이 전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무리를 넘어 무모한 일이었다. 용호가 상대했던 포라스는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리쿰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던전의 방어력 자체는 포라스가 건재하던 시절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던전 최대의 전력이었던 포라스가 죽은 상황이고, 전투 사역마들 역시 대부분 잃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이번에 호되게 당해놓고 할 말은 아닙니다만… 단순한 함정만으로 적을 막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리쿰은 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용호가 잘 볼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조금씩 옮겨 가며 가리켰다. 아마도 근방 가주들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근방에 자리한 가주들 역시 포라스의 죽음을 알게 되면 던전에 욕심을 낼 겁니다. 어쩌면 조만간에 포라스의 던전에서 던전 전투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타당한 이야기였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했다.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엘리고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대로 방치해두는 것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포라스의 던전을 방파제로 삼는 거죠.”

    “주변에 위치한 다른 가주들의?”

    “역시 현명하십니다.”

    엘리고스가 푸근하게 웃었다.

    지리적인 위치로 본다면 포라스의 던전은 마몬 가의 던전 바로 앞에 자리한 성문과도 같았다. 엘리고스의 말마따나 방파제로 삼기 딱 좋은 위치였다.

    리쿰의 말처럼 방비가 제법 잘 되어 있다면 포라스의 던전은 호락호락 다른 가주에게 함락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대로 지켜본다. 다른 가주들끼리 싸워서 양패구상 한다면 그보다 좋을 것이 없었고, 설사 하나가 이긴다 할지라도 전투의 피로도로 약해져 있을 때를 노린다면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용호가 다시 리쿰에게 물었다.

    “다른 가주들이나 근래 공백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뭔가 아는 것이 없나?”

    “북부에서 강력한 마왕이 나타나서 다른 가주들을 굴복시키고 있다는 정도만 압니다. 혹여 풍문을 모으고 싶으신 것이라면 근방에 위치한 선술집에 한 번 가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선술집?”

    선술집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놀랐을 뿐이었다.

    “던전과 던전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나 도시에 자리한 회합의 장 같은 것입니다.”

    엘리고스에 이어 던전의 영혼 역시 용호에게 설명했다.

    [강력한 마왕들은 던전뿐만 아니라 던전 주위의 땅을 자신의 ‘영지’로 삼습니다.]

    [다만 공백지의 마왕들은 대부분 영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의 소유도 아닌 마을이 꽤 많은 편입니다.]

    [자유롭게 오가는 이들이 많은 만큼 각종 소문도 모을 수 있고, 방랑하는 사역마를 고용할 수도 있는 장소입니다.]

    양쪽 모두 제법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였다.

    “알겠다. 고려는 해보지.”

    리쿰과의 이야기를 마친 용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오크들도 던전 사역마로 등록하기 위해 다시 감옥으로 향했다.

    &

    남은 오크 여섯 마리를 던전 사역마로 등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오히려 그 다음이었다.

    갑자기 사역마가, 그것도 골렘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생활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역마가 일곱이나 늘어난 탓에 이런저런 시설의 확충이 필요했다.

    전투 병력 겸 일꾼으로 쓰기 위해 데려온 클레이 골렘과 락 골렘도 없어진 상황이라 광산 채굴과 던전 구조 개편을 위한 일손 역시 부족했다.

    물론 오크들을 일꾼으로 부릴 수도 있었지만 ‘전사’로서 고용된 그들이었기에 역시 제대로 된 전문 일꾼이 필요했다.

    일단 리쿰과 오크들을 엘리고스에게 맡긴 용호는 전투 마차들의 사양과 형식 번호가 적힌 보고서를 들고 옥좌가 있는 마왕의 방으로 향했다. 전투 마차의 판매 대금과 포라스가 가지고 있던 돈으로 물자와 일꾼들을 구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용호가 막 옥좌에 앉으려는 참이었다.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던전의 영혼이 약간은 소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주인님, 바쁘신 가운데 죄송하지만… 뭔가 잊으신 거 있지 않으세요?]

    평소랑 다르게 섭섭한 기색도 조금이지만 어려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용호는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떠올렸다.

    던전의 영혼의 성장.

    잊지 말고 꼭 던전의 심장을 방문해 달라고 했던 던전의 영혼.

    [던전 상회에서 사역마를 새로 구하시기 전에 던전의 새 기능들과 시설들을 파악 하시는 편이 좋으니까요.]

    [그냥 그것뿐이에요. 절대 섭섭해 하는 게 아니랍니다.]

    [주인님은 제 마음 아시죠?]

    참으로 소녀다운 반응이었기에 용호는 키득 웃었다. 옥좌에 앉으려던 몸을 그대로 돌려 던전의 심장으로 향했다.

    던전의 성장과 새로운 시설들에 대한 정보.

    일어날 때 이미 각오했던 것이지만,

    역시 오늘은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

    < 제 14장 #4 (수정)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