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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44화 (44/227)
  • < 제 14장 - 합체 진화 >

    제 14장 - 합체 진화

    자발적이건 그렇지 않건 여왕개미로부터 독립한 공주개미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기 마련이었다.

    새로운 군락의 건설.

    여왕개미가 사망한 순간 얼어붙은 씨앗과도 같았던 공주개미의 자아는 조금씩 그 싹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싹이 트기 시작한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멍한 얼굴로 팬케이크를 조금씩 뜯어먹는 공주개미의 얼굴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자아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공주개미는 여왕개미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과 닮았다. 머리칼은 여왕개미가 즐겨먹은 황금과 색이 같았고, 흰자 없는 눈동자는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초록색이었다.

    열 두어 살 남짓. 딱 그 정도 소녀로 보이는 공주개미의 더듬이가 순간 움찔했다.

    공주개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주변에서 맴돌던 코볼트 뿐만 아니라 다른 무리들이 저만치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공주개미는 눈을 깜박이며 기다렸다.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피와 흙과 이것저것이 뒤섞인 냄새였다.

    자아가 약하다 해서 생물로서의 기본적인 본능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공주개미는 겁먹은 짐승마냥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익숙한 냄새의 소유자가 나타났다. 코볼트였다.

    “왈왈!”

    뭔가 신이라도 났는지 코볼트의 꼬리가 역동적으로 흔들렸다. 코볼트는 빠른 걸음으로 감옥에 다가오더니 그래도 잠긴 문을 벌컥 열었다. 공주개미에게 쪼르르 다가오더니 공주개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왈왈!”

    나오라는 뜻이었지만 엘리고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공주개미에게도 개소리였다. 더욱이 공주개미에게는 코볼트의 몸짓과 표정을 보고 그 뜻을 유추할 눈치도 없었다.

    공주개미는 혼란스런 눈으로 코볼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고약한 냄새들이 도착했다.

    초록색 거한들과 붉은 피부를 가진 남자- 엘리고스가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커다란 나무와 매한가지로 초록색 피부지만 덩치가 좀 더 작은이들이 나타났다.

    “컹컹!”

    코볼트가 엘리고스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공주개미의 팔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결국 그 손길을 따라 일어선 공주개미는 서툰 걸음으로 감옥을 나섰다.

    공주개미가 감옥을 나오자마자 엘리고스는 오크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손이 결박된 오크들은 대부분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선두에 선 눈에 상처 난 오크가 별말 없이 감옥에 들어가자 딱히 눈에 띄는 반항을 하지 않았다. 그저 따라 들어간 뒤 바닥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주개미에게는 참으로 드넓은 감옥이었지만 덩치 꽤나 있는 오크들이 일곱이나 들어가니 금방 비좁은 공간이 되었다.

    공주개미는 언제나처럼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리고스가 그런 공주개미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단 생활관으로 데려가거라.”

    “컹컹!”

    코볼트가 기분 좋게 짖더니 다시 공주개미의 팔을 잡아끌었다.

    공주개미는 이번에도 결국 코볼트를 따라 낯선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엘리고스는 새삼 한숨을 다시 쉬었다. 감옥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눈에 상처가 난 오크- 리쿰에게 말했다.

    “쉬고 계시오. 잠시만 머물면 될 테니.”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 말인지는 의문이었지만 리쿰은 고개를 끄덕였다. 탈출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이상 불필요한 대립각을 세워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물이나 좀 가져다 주시오.”

    “알겠소. 곧 가져오리다.”

    엘리고스는 존과 론을 데리고 감옥을 나섰다. 트리엔트는 감옥 입구에 뿌리를 내린 뒤 엄격하고 진지한 얼굴로 감옥을 주시했다.

    전투는 이제 막 끝났다. 엘리고스와 고블린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역마들이 지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마음 놓고 쉴 때가 아니었다.

    &

    용호는 짚단 침대 위에 쓰러졌다.

    다 같이 지쳤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엘리고스에게 뒷일을 맡기고 나 몰라라 졸도하는 것이 책임감 없는 행동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이 역시 불가항력이었다.

    아니, 사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힘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우린 다시 일어설 거야. 누나 믿지?”

    소녀의 목소리였다. 머리칼은 잿빛이었고, 어깨는 작았다.

    용호는 눈을 떴다는 자각도 없이 그것을 보았다. 멍한 가운데서도 묘하게 선명한 모습들이었다.

    잿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소녀는 이미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3대 전 가주 카이완.

    왜곡의 마왕.

    아직 소녀라 불러야 할 그녀의 앞에는 유약한 얼굴의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동경이 가득한 눈으로 카이완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소년이 누구인지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용호는 알 수 있었다. 소년에게도 미약하게나마 저 탐욕의 왕 마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전전대 가주.’

    왜곡의 마왕 카이완의 동생. 카이완이 돌연 실종된 이후 마몬 가를 물려받았고, 결국 카이완이 이룬 것들을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유약한 자.

    기록에 따르면 전전대 가주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고 했다.

    과연 그 말 그대로인지 탁한 금발 아래 드러난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동경이 가득 어린 눈도 이제 보니 힘이 하나도 없었다. 비쩍마른 가느다란 팔 다리로는 뜀박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카이완은 어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로 사랑스럽다는 듯 꼭 끌어안았다. 카이완의 환영을 본 것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긴 했지만, 처음으로 보는 부드럽고 따스한 표정이었다.

    카이완과 전전대 가주가 사라졌다.

    낡고 오래된 방 대신 작은 서재가 눈앞에 펼쳐졌다.

    카이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표독스런 눈매를 가진 여인.

    굳이 비유하자면 뱀이었다. 표범과 같은 맹수와도 닮았다. 입고 있는 붉은 가죽 옷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이었다. 책상과 책장이 있었고, 양쪽 모두 서적보다는 주로 서류 같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카이완의 집무실인 것처럼 보였다.

    집무용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채 깃털 팬으로 무언가를 적고, 주판을 튕기기를 거듭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책상 아래로 손을 내렸다. 의자 등받이에 말린 빨래마냥 몸을 늘어트렸다.

    그녀의 왼손.

    눈에 익은 반지가 약지에 끼어져 있었다. 왜곡의 권능을 담은 반지였다. 아마도 전투 중에 바로바로 사용하기 위해 권능의 일부를 담아둔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녀는 눈을 한 번 꽉 감더니 서랍 안쪽에서 두툼한 가죽 책 한 권을 꺼냈다. 이번에도 속이 빈 공책인지 책상 위에 올리자마자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지 같은 건가?’

    가끔씩 그림 비슷한 것을 그려 넣기도 했다. 시선이 카이완의 왼쪽 대각선 뒤쪽에 고정된 용호인 터라 구체적으로 뭘 쓰고 있는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카이완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가끔씩 작게나마 미소를 짓기도 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완은 쓰고 있던 일지를 다급히 서랍 안에 밀어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노크한 사람을 마주했다.

    전전대 가주였다. 카이완은 소녀에서 여인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소년인 채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집무실을 나섰고, 용호는 조금씩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을 보았다. 어렴풋이 환청처럼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투기장에 가는 거야?”

    “금방 다녀올게. 이번엔 더 멋진 물건들을 찾아올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두 사람이 점점 더 멀어졌다. 어쩐지 낯이 익은 통로들을 지나쳤다.

    그리고 어둠.

    다시 눈앞의 전경이 바뀌었다.

    무기고였다.

    용호가 알고 있는 무기고와는 물건의 배치가 다소 달랐지만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카이완이 반지에 입술을 맞췄다. 작은 함안에 반지를 집어넣었고, 나직한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들리지 않았다. 함이 닫혔고, 어둠만이 시야를 뒤덮었다.

    아마도 이것이 반지에 남은 마지막 기억.

    용호는 눈을 떴다. 침대에서 굴러 바닥에 나자빠졌다.

    “컥.”

    그리 높지 않는 짚단 침대였지만 일단 높이가 있다 보니 아픈 건 아픈 거였다. 더욱이 자다 추락한 거라 그야말로 불시의 일격이었으니 평소보다 더 아플 수밖에 없었다.

    “집무실.”

    용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의식중에 왼손을 들어 카이완의 반지를 보았다.

    달을 먹는 늑대의 문양.

    낡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은반지.

    새삼스럽지만 카이완의 권능이 느껴졌다. 그리고 용호는 어째서 자신이 카이완의 꿈을 꿨는지 직감했다.

    마족의 본질은 마력.

    그 마력에 남은 여러 기억과 상념들.

    카이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전히 표독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전전대 가주 앞에서 보여주었던 따스한 미소 때문인지 조금은 더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3대전 가주 카이완의 집무실.

    집무실을 찾는다면. 그리고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카이완의 일지를 찾아낼 수 있다면.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머릿속에 걱정 가득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아프신 곳은 없으시고요? 제 목소리 잘 들리시죠?]

    던전의 영혼이었다.

    용호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온몸이 무거운 가운데 들어 올렸던 팔을 내렸다.

    마치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있었지만, 조금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일어나야만 했다.

    “얼마나 지났지?”

    [31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던전의 영혼의 대답에 용호는 눈을 감고 신음을 토했다. 하루하고도 반이 조금 안 되는 시간. 그나마 지난 번 금광 싸움 때보다는 덜 뻗어 있었다는 것이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용호는 다시 신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잔뜩 잠긴 목으로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에 일단 물부터 찾았다. 주전자 채로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에야 다음 질문을 이었다.

    “오크들은? 다른 사역마들은? 카타리나랑 엘리고스도 무사하지?”

    물 덕분에 정신이 들어서인지 질문이 끝없이 꼬리를 이었다. 던전의 영혼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예속 사역마 카타리나를 비롯한 던전의 사역마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예속 사역마 스컬과 던전 사역마 락 골렘이 부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지만 사역마로서의 생명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둘 모두 현재 옥좌가 있는 주인님의 방에서 대기 중입니다.]

    [오크들 역시 감옥에 얌전히 있고요.]

    [다만 뒷수습을 서둘러야만 할 것 같습니다.]

    “뒷수습?”

    [통로에 남아 있는 오크들의 시신을 처리해야만 합니다.]

    [또한 던전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변경하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던전을 공격한 자들이 타고 온 전투마차들은 예속 사역마 엘리고스가 일단 던전 출입구 방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사역마들이 모두 회복 중이기 때문에 이 이상 일의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승리하긴 했지만 이쪽 역시 피해가 결코 적지 않았다. 아마 지금 활동이 가능한 것은 엘리고스와 코볼트, 고블린 레인저들 정도일 터였다.

    [그리고-]

    “그리고?”

    [이번에 주인님의 마력이 크게 강해지신 덕분에 저 역시도 한 단계 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던전의 단계- 계급 자체가 상승하면 던전 내에서 보다 많은 일들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운용할 수 있는 던전 시설도 많아지고요.]

    [잊지 말고 제 본체인 던전의 심장이 있는 방에 방문해 주세요.]

    엘리고스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용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그걸 어찌 알았는지 던전의 영혼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다들 많이 지쳤으니 너무 서두르지는 마세요.]

    [주인님도 조금 더 쉬시고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간곡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저 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던전의 영혼의 말대로 뒷수습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단.”

    용호는 다시 손을 들어 이마 쪽으로 가져갔다. 이마 한 가운데 돋아난 작은 뿔이 묘한 위화감을 주었다.

    격전 끝에 손에 넣은 힘이었다. 제대로 된 점검이 필요했다.

    용호는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골랐다.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

    < 제 14장 - 합체 진화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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