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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27화 (27/227)
  • < 제 8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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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바닥으로 정수를 취득한 순간의 쾌감은 실로 거대했다. 하지만 용호는 이전처럼 쾌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깊이 있는 여운 또한 느끼지 못했다.

    오크 리더의 육체적 능력은 이전에 던전을 침공했던 녹색 망토의 거한보다 강력했지만 마력은 오히려 미치지 못했다. 훨씬 더 적었고, 이미 한 차례 마력을 진화시킨 용호에게는 그리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코볼트들이 죽었다. 네 마리 가운데 셋이 죽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한 마리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함께 무기고를 공략했던 녀석이었다.

    아군으로 받아들인 지 이제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이었다.

    카타리나나 엘리고스 같은 예속 사역마가 아니었다.

    스컬이나 존처럼 특별히 애착이 가는 녀석들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용호는 어렴풋이 인지했다. 분노의 근원에 자리한 것은 탐욕이었다.

    자신의 것을 해하였다.

    자신의 것을 강탈하였다.

    자신의 소유물을 놈들이 앗아갔다!

    정수 흡수의 쾌감 속에서도 불쾌함이 피어올랐다. 용호는 아몬을 길게 늘어트리고 호흡을 골랐다. 탐욕으로부터 일어난 분노를 제어하고자 노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용호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이번 적들은 지난 번 녹색 망토의 거한처럼 ‘떠돌이’가 아니었다. 특정 가주에게 소속된 사역마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대비해야만 했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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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나가 생포한 임프를 데리고 돌아온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엘리고스와 살라멘더가 귀환했다.

    중앙로에 설치해둔 함정들이 발동된 것을 보고 상황을 짐작한 엘리고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침착하게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했다.

    엘리고스의 명을 받은 고블린들이 시신들을 처리했다. 준과 욘이 오크들이 입고 있던 장비들을 회수했고, 존과 론은 빈 방에 오크들과 임프들의 시체를 옮겼다.

    스컬은 죽은 코볼트들의 시신을 다른 빈 방에 옮겼다. 던전 시설 가운데 하나인 ‘무덤’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둔 빈 방이었다.

    엘리고스는 트리엔트를 쉬게 했다. 살라멘더에게는 혹시 모를 재습에 대비해 입구를 지키게 한 뒤 카타리나와 더불어 감옥에서 대기 중이던 용호를 찾아갔다.

    전투가 끝나고 한 시간 남짓.

    흥분과 분노를 모두 가라앉힌 용호는 차분한 얼굴로 엘리고스를 마주했다. 마력을 모두 소진한 터라 쉬고 싶었지만 지금은 임프의 심문이 먼저였다.

    임프는 진한 녹색 피부를 가진 작은 마물이었다. 고블린보다도 덩치가 작고 연약했지만 대신이라도 되듯 속도가 더 빠르고 머리도 좋았다.

    머리가 크고 팔 다리가 가느다란 임프는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용호와 엘리고스의 눈치를 살폈다.

    “시작해.”

    용호가 말했고 엘리고스가 행동했다. 감옥 문을 열고 밧줄에 묶여 있는 임프를 거칠게 붙잡았다.

    “말할게! 말할게! 전부 다 말할게!”

    엘리고스가 손을 대자마자 임프가 발악하듯 외쳤다. 용호는 그저 가만히 쳐다보았고, 엘리고스는 발버둥 치는 임프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임프는 이제 더 이상 눈치도 살피지 않았다. 눈을 꽉 감고 말을 쏟아냈다.

    “가주님이 보냈어! 포라스 가주님! 던전 점령하라고! 가주 없으니 쉽다고 테라크 님이 그랬어! 정찰 겸이라고도 했어!”

    ‘포라스’라는 이름에 엘리고스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엘리고스는 심경의 변화를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임프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테라크가 누구지?”

    “주, 죽은 오크. 정찰대장! 오크들 이끄는……. 그, 그리고 이런 말도 했어! 혹시라도 가주가 새로 들어섰다면 확인하고 바로 돌아갈 거라고! 가주 님께 알려서 제대로 된 군단을 편성할 거라고!”

    허겁지겁 말을 쏟아낸 임프는 눈을 떴다.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다시 소리쳤다.

    “다 말했어! 전부 다 말했어! 거짓말 아냐!”

    용호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임프의 말에는 이미 필요한 것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오크들을 보낸 자의 이름.

    그 자가 이번 일을 일으킨 이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정보.

    엘리고스가 다시 물었다.

    “사역마들의 규모는? 테라크 같은 녀석이 몇이나 있지?”

    “마, 많아! 오크들 수십 마리야! 마흔 마리도 넘어! 테라크 님 같은 사람도 세 명이나 있어!”

    엘리고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그리고?”

    “그, 그리고! 몰라! 아는 거 다 말했어! 다 말했다고!”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엘리고스는 잠시 용호를 돌아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에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고스가 던전에 귀환하자마자 했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엘리고스는 임프의 목을 비틀었다. 목뼈를 부러트려 단번에 목숨을 끊었다.

    “사역마 인증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추적 기능이 붙어 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만… 불안요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임프의 이마에 그려져 있는 작은 마법진을 가리키며 엘리고스가 말했다. 살라멘더의 이마에 생겨난 마법진과 얼추 비슷한 것으로 보였다.

    “엘리고스, 포라스라는 가주에 대해서 아나?”

    “남부 공백지의 여러 가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몬 가의 던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말을 타고 달린다면 하루에서 이틀 정도면 오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오크들은 이곳 까지 두 발로 걸어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말을 타고 달릴 때와 걸을 때의 속도 차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 못하는 용호였지만 그래도 어림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세력의 강함은?”

    “남부 공백지 전체로 따지면 강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딱 중간 정도입니다. 전대 가주님 시절에는 가끔이지만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였기에 용호가 순간 되물었다.

    “친했나?”

    “아니오. 직접적으로 군대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몬 가에 자꾸 욕심을 드러내며 툭툭 건들던 그런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움직였다는 말이군.”

    용호가 말했고 엘리고스는 무어라 답하지 못했다.

    적이 공격해왔다.

    그리고 그 적은 한 번의 싸움으로 끝을 낼 수 있었던 떠돌이 잔챙이가 아니라 다른 던전을 소유한 가주였다.

    용호는 생각했다. 절망하고 포기하기에 앞서 긍정적인 부분들을 찾아냈다.

    “최악은 아니야. 놈에게 정보가 돌아가는 것은 막았어. 오크들이 정찰을 마치고 던전에 돌아가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며칠은 여유가 있다는 소리가 돼.”

    어차피 놈은 움직인다.

    하지만 명확한 정보를 듣고 움직이는 것과 막연한 짐작으로 움직이는 것은 달랐다.

    카타리나가 임프를 생포했기에 놈들은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마몬 가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정찰대가 과연 마몬 가의 존재들에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정찰대가 돌아오는데 필요한 시간. 혹시나 늦을지 몰라 기다리는 시간. 제한된 정보 속에서 판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시간.

    오크 정찰대가 무사히 일을 끝마쳤을 경우에 비해 적어도 이틀 이상의 시간을 번 셈이었다. 대략 육에서 칠일. 그 시간 동안 용호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적이 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단순했다. 적을 격퇴하기 위해 최선의 방비를 해두는 것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며칠이란 시간 동안 용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용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것을 일단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용호의 시선이 카타리나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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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가 없었다면 보다 평온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을 이야기였다.

    용호는 엘리고스에게 임프의 처리를 맡긴 뒤 카타리나를 데리고 마왕의 방으로 돌아갔다. 딱히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탁자 같은 것이 없었기에 옥좌 부근 카펫 위에 자리를 잡았다.

    이야기는 짧고 간결했다.

    카타리나의 현재 상태.

    진화 가능한 루트들.

    승급을 통해 다크 엘프와 서큐버스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제 3의 가능성인 하이브리드.

    용호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서 하나하나 꼼꼼히 설명을 하였다. 카타리나 역시 집중했다.

    이미 진화의 권능을 한 번 경험해본 그녀였기에 용호의 말을 더더욱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미안하지만 시간을 오래 줄 수는 없을 것 같아. 내일 아침까지 생각해서 네 선택을 말해줘.”

    지금 당장 병력의 수를 크게 늘리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현재 가지고 있는 전력의 질적 강화에 주력하는 것이 맞았다.

    용호는 카타리나에 대해 그리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어떤 연유로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가 되었는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카타리나를 신뢰했다.

    카타리나는 용호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알겠다고, 생각해보겠다고 답하는 대신 눈을 한 번 꾹 감더니 이내 자세를 바로하며 입술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카타리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아주 잠깐 뿐이었다. 카타리나는 이내 말을 끝맺었다.

    “하이브리드 진화라는 것을 하고 싶습니다.”

    서큐버스와 다크 엘프의 피 어느 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양쪽 모두의 장점을 취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용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모든 의문을 종식시켰다.

    애당초 카타리나에게 선택을 맡겼으니 그대로 따르면 될 일이었다.

    더욱이 하이브리드 진화는 그 진화 포텐셜이 다른 어떤 진화에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2레벨인 민첩성과 동등한 진화 포텐셜을 보유했으니, 어쩌면 가장 큰 가능성을 품은 진화 루트일지도 몰랐다.

    카타리나가 결정을 내렸으니 구태여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용호는 카타리나를 앉은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눈을 감아, 카타리나. 이전에 진화했을 때처럼 몸에서 힘을 빼고.”

    카타리나와 마주서며 용호가 말했다. 카타리나는 어깨를 살짝 늘어트린 채 눈을 감았다.

    용호는 던전의 영혼에게 명령했다.

    “던전의 남은 마력 전부를 내게 전송해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용호의 육신에 던전의 마력이 차올랐다. 용호는 자연스럽게 마력을 회전시켰다. 하나로 응집하였고, 다시 그것을 둘로 나누었다.

    용호가 마력이 깃든 두 손을 카타리나의 허리와 골반 사이에 얹었다. 그대로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하이브리드 진화.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는 탐욕스런 선택.

    용호의 마력이 카타리나의 육신에 파고들었다.

    카타리나의 가능성을 이끌어냈다.

    제 8장 - 소수정예 끝, 제 9장 - 카이완으로 이어집니다.

    < 제 8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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