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0화 (10/227)
  • < 제 3장 #4 >

    &

    “어머나, 예상치 못한 방문이시군요.”

    하늘과 땅 모두가 하얀 공간에 진입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시트리였다. 지난번과 달리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노출도가 파격적이란 면에서는 동일했다.

    누가 봐도 꾸민 것 같은 놀란 표정이었기에 용호 역시 짐짓 여유를 부려보았다.

    “전담은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시트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내 너무나 매력적인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 미소 앞에서는 그 어떤 흉계도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용호는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역시나 텄다. 여자내성이 약한 용호에게 있어 시트리는 그 존재부터가 반칙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입을 헤벌쭉 벌리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귓불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을 한 정도랄까.

    시트리는 다시 웃었다. 어느새 그녀의 등 뒤에 나타난 하얀 책상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며 말했다.

    “거물이라고 늘 바쁜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고요.”

    “방금 하셨던 말씀과 완전히 상반됩니다만?”

    시트리는 미녀였고,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아는 미녀였다. 그랬기에 용호의 찌르기에 미녀의 미소로 응답했다. 어느새 의자로 변모한 책상에 몸을 묻으며 멋들어지게 다리를 꼬았다. 용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진화의 권능을 사용하셨군요.”

    용호는 아직 노련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순간 움찔했고, 저도 모르게 긴장된 심경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시트리는 그 정도로 만족했다. 용호는 이제 막 가주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수선을 떨거나 눈에 띄게 당황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말고는 그 누구도 우리 사랑하는 고객님이 마몬 가의 가주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도, 진화의 마왕이 되셨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니까요.”

    용호는 혹여 진화의 권능을 사용하면 그게 표가 나냐는 물음을 하고 싶었지만 스스로를 억눌렀다. 대신에 다른 것을 물었다.

    “저 외에 다른 진화의 마왕을 알고 계신가요?”

    시트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고, 잠시 손등에 턱을 괴고 시선을 낮췄다. 상념에서 빠져나와 말했다.

    “옛날이야기죠. 하지만 제가 아는 ‘그 사람’과 천용호 님의 권능이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겁니다. 권능은 마왕의 영혼 그 자체라 해도 좋으니까요.”

    용호는 더 묻지 않았다. 시트리는 친절했고, 미녀였고, 아무튼 지금까지는 이래저래 호의를 보이고 있었지만 완전한 ‘내 편’이 아니었다. 용호가 믿는 것은 예속 사역마인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뿐이었다.

    용호가 추가적인 질문을 하지 않자 시트리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용호에게 다가섰고,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시트리와 용호 사이로 하얗고 작은 테이블이 솟아올랐다.

    “무례에 대한 용서를 빌 겸 작은 서비스를 해드리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말씀해 보시죠.”

    자연스럽게 답하고자 했지만 목소리가 약간은 딱딱했다.

    시트리는 가슴골 사이에서 - 가슴골 사이에 사차원 주머니라도 달려 있는지 저번에도 그렇고 무언가가 쑥쑥 잘도 튀어나왔다 - 작은 가죽 주머니 세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7대 죄악 가운데 ‘탐욕’은 재물과 깊은 연관이 있죠. 천용호 님의 세상 기준으로 표현하자면… 금전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다름 아닌 탐욕의 마왕이니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시트리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가죽주머니들 위로 부드럽게 유영했다. 자연스럽게 용호의 시선을 유도했다.

    “이 중에 하나, 2성급 사역마 구매권이 들어 있습니다. 한 번에 찾아내신다면 천용호 님께 선물로 드리도록 하죠. 그리고 요령을 설명 드리자면…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마음 가시는 주머니를 고르시면 될 겁니다.”

    시트리는 미소로 말을 맺었다. 용호는 주머니들을 보았고, 불쑥 손을 뻗어 가운데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용호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빠르고 주저 없는 선택이었다. 손을 움직였다기 보다는, 손이 절로 움직였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시트리는 용호가 보는 앞에서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녹색 보석이 들어 있었다.

    “제대로 고르셨군요.”

    그리고 확인이라도 하듯 다른 두 주머니도 열었다. 모두 빈 주머니였다.

    금전 운.

    확실히 유용했다. 좋은 능력이었다. 하지만 용호는 조금이지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7대 죄악 가운데 하나인 ‘탐욕’의 힘이 고작 금전 운으로 끝이란 말인가?

    시트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용호의 눈앞에서 가늘고 신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탐욕’의 힘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닙니다. 이건 아주 작은 ‘부가 효과’에 불과하죠. 그러니 실망하지 마세요.”

    분명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지만 속내를 모두 읽히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용호는 시트리가 책상 위에 올려둔 녹색 보석을 가볍게 쥐며 이야기를 끝냈다.

    “두 가지 서비스. 모두 잘 받았습니다.”

    탐욕의 힘에 관한 정보와 2성 사역마 구매권.

    시트리는 용호가 두 가지라 말했다는 사실에 흡족함을 느꼈다. 이번에는 허공에서 불쑥 커다란 책을 뽑아들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무척이나 크고 두꺼운, 영영 사전을 연상시키는 책이었다.

    “지난번에 구매하신 최하급 무성 사역마들과 달리 1성 사역마 부터는 이렇게 따로 카탈로그를 제공한답니다. 그리고 카탈로그에는 두 종류가 있죠. 자유 노동시장과 노예시장.”

    마계에 들어온 이래 들은 단어들 가운데서 가장 음습하면서도, 당연히 있을 것 같았던 단어였다.

    시트리가 설명했다.

    “자유 노동시장에 등록된 사역마들은 자신들이 모실 주인을 찾는, 문자 그대로 자유로운 사역마들입니다. 때문에 가주님들께서 해당 사역마에 대한 고용 의사가 있으시다 하여 무조건 거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역마들에게도 고용주를 선택할 자유가 있으니까요.”

    “노예시장은 그런 것이 없고요?”

    “그렇죠. 그들은 문자 그대로 ‘노예’니까요. 보통 지능이 낮거나, 자의식이 약하다거나, 만들어진 사역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팔려온 사역마들이 이쪽에 속한답니다. 물론 그런 만큼 자유 시장 쪽 사역마들에 비해 다양성도 부족하고 능력 역시 부실한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노예시장에서 대박이 나는 경우도 있죠. 사역마와 협상할 필요도 없고, 가격 역시 자유 노동시장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 이쪽을 선호하시는 가주님들도 생각보다 많으세요.”

    용호는 잠시 손에 쥔 녹색 보석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구매권은 노예시장 구매권이고요?”

    “역시 현명하시네요. 사랑하는 고객님.”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현재 마몬 가의 상태를 보고도 계약을 맺고자 하는 사역마는 흔치 않을 터였다. 더욱이 그런 식으로 사역마를 모집하면 마몬 가에 새로운 가주가 들어섰다는 사실이 외부에 누설될 수 있었다.

    시트리는 책상 위의 책을 빙글 돌려 용호 쪽으로 글자가 보이게 하였다. 난생 처음 보는 이계의 글자였지만 보는 순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2성 사역마 카탈로그 - 노예시장 편 - ]

    “즐거운 쇼핑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사랑하는 고객님.”

    눈웃음으로 마무리를 지은 시트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몇 초.

    ‘역시 상대하기 피곤해. 단순한 카타리나가 그립다. 그리워.’

    용호는 피곤함이 담긴 한숨을 한 번 토한 뒤 어느새 생겨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좋아.’

    어찌되었든 공짜였고, 잘하면 대박도 건질 수 있었다. 아니, 못해도 중박 이상은 반드시 거둘 생각이었다.

    용호는 카탈로그를 펼쳤다.

    &

    2성 사역마를 공짜로 얻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애당초 용호는 충동구매를 위해 가상공간에 접속한 것이 아니었다.

    본래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던 1성 사역마.

    당연히 구매 계획은 세워져 있었다.

    첫째. 전투를 위한 사역마를 구매한다.

    둘째. 현재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 최적의 사역마를 구매한다.

    현재 던전에서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은 카타리나 하나뿐이었다. 물론 전투 상황이 발생하면 진화시킨 고블린 두 마리 뿐만 아니라 용호 자신도 전투에 나설 생각이었지만, 게임으로 치자면 ‘생산유닛’인 일꾼으로 방어를 하는 건 극단적인 상황으로 한정지어야만 했다.

    때문에 용호는 일단 카타리나를 분석했다.

    하프 서큐버스이자 하프 다크엘프인 카타리나는 단검과 활, 투척용 단검을 주무기로 사용했다. 좋게 말하면 근접전과 원거리 공격이 모두 가능한 데미지 딜러였고, 굳이 게임과 비교를 하자면 대충 판타지 MMORPG의 ‘도적’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새로 구매하는 사역마는 ‘던전 방어전’에서 카타리나와 한 팀을 이룰 터였다. 그러니 카타리나의 약점을 보완하고 시너지 효과를 발생 시킬 수 있는 녀석이어야만 했다.

    방어전에서 딜러에게 필요한 팀원은 무엇일까? 또 한 명의 원거리 딜러?

    ‘정답은 탱커지.’

    어차피 던전 내부에서 수문장 역할을 할 녀석이었기에 기동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적절한 덩치와 맷집, 충분한 진화의 가능성이었다.

    ‘그래도 일단 볼 건 다 보자.’

    아이쇼핑에 돈이 드는 건 아니니까. 나중에 뽑을 녀석을 미리 관찰해두면 구매 계획을 세우기에도 용이하리라.

    솔직히 두근거렸다. 왜 게임에서도 뽑을 수 있는 유닛 도감 같은 걸 보며 두근두근할 때가 있지 않은가.

    “와우.”

    확실히 2성급부터는 리스트에 오르는 사역마들의 이름과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입에서 불의 숨결을 토하는 지옥의 개 헬 하운드.

    커다란 덩치에 괴력의 소유자인 버그베어.

    강력한 산성액을 발생시키는 거대한 슬라임.

    마력을 아껴야 해서 진화의 권능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카탈로그로 모습을 살펴보는 것 자체가 꽤 재미있었다.

    더욱이 카탈로그 속 사역마들은 그냥 종이에 인쇄된 그림이 아니었다. 용호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허공에 구현된 거대한 스크린에 사역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용호는 마치 홀로그램을 다루듯 자유롭게 사역마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런데 확실히 종류가 적구나.’

    꽤 꼼꼼히 살펴봤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성 사역마의 종류는 총 15종. 거의 대부분이 시트리의 설명처럼 자아가 약하거나 머리가 둔해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흠흠. 엘프 같은 건 없구나.’

    보는 사람도 없건만 괜히 혼자 헛기침을 터트린 용호는 손가락을 놀려 따로 추린 사역마 세 마리를 빛의 창에 펼쳐놓았다.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 제 3장 #4 > 끝

    ⓒ 취룡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