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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5화 (5/227)
  • < 제 2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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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는 옥좌 위에 앉아 투박하고 새카만 팔찌를 팔에 꼈다. 던전 상인 시트리가 남기고 간 물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엘리고스가 설명했다.

    “던전의 영혼을 통해 던전 상회에 접속하시면 던전 상회에서 나온 인물이 안내를 해드릴 겁니다.”

    던전 상인들의 집단인 던전 상회는 마계의 한 축을 차지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던전 상회는 던전을 유지, 확장, 보수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판매했다. 그리고 그 판매품목에는 ‘노동력’ 또한 존재했다.

    던전 상회는 마계 곳곳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마법을 통해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던전의 주인인 ‘마왕’들은 던전 상회의 아티팩트를 통해 그 가상공간에 접속할 수 있었다. 가상공간에는 던전 상회가 유통하는 모든 상품들이 저장되어 있었고, 마왕들은 몸소 지부에 행차하지 않고도 던전 상회의 상품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온라인 쇼핑몰 같은 건가?’

    세상 모든 것에 대가가 존재하듯이 가상공간을 통한 거래 역시 무상으로 ‘편리함’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가상공간을 이용하는 구매자들은 더 많은 금전과 마력, 때로는 다른 무언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사실상 망했다고 해도 좋을 마몬 가에게 있어서는 가상공간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사치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엘리고스는 직접 지부를 방문하는 대신 가상공간을 이용할 것을 권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마몬 가가 하도 마계 변두리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지부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던전 밖 마계는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용호 역시 아직은 던전 밖으로 섣불리 나설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엘리고스의 말을 옳게 여겼다.

    [주인님, 던전 상회와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짝 따끔할 수도 있지만 잠깐 뿐이니까 마음을 편히 가져주세요.]

    던전의 영혼이 귀여운 목소리로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던전의 영혼은 마왕의 분신이라 할 수 있었다. 용호는 자신 안 어딘가에 저런 귀여운 소녀가 들어 있었는지 의아했지만 -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갔다. - 일단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용호는 눈을 감고 있었고, 그렇기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뒤덮은 어둠이 유지된 시간은 짧았다. 하늘도 땅도 온통 하얀 공간 속에서 용호는 낯익은 이를 마주하였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고객님.”

    던전 상인 시트리가 고풍스런 예를 표하며 허리를 숙였다. 색만 파란색으로 달라졌을 뿐, 이전과 거의 같은 의상이었기에 용호는 시선을 애써 허공에 고정시켰다. 시트리가 다시 일어나서 그 아찔한 가슴골이 그나마 덜 보이게 된 뒤에야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트리 씨.”

    그래도 하루 넘게 카타리나와 얼굴을 마주한 보람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살 떨리는 미녀인 시트리 앞에서도 제법 담담하게 인사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시트리는 용호를 마주하였고,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용호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지금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 것 같네요.”

    가주 즉위를 위한 의식 때 시트리가 왔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도 시트리가 용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트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마몬 가 전담 던전 상인인 것은 아닙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마몬 가가 7대 죄악 가운데 하나에 속했던 것은 벌써 천 년도 더 지난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반사적으로 되묻자 시트리는 약간은 짓궂게 웃었다. 용호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전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거물이거든요.”

    이럴 땐 대체 뭐라고 응대를 해줘야 하는 것일까?

    용호가 짧게나가 갈등하는 사이 시트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쿡쿡 웃었다. 몇 걸음을 더 내딛어 용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자연스럽게 용호의 팔을 끌어안았다.

    “인간의 피가 섞인 자가 마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계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일은 고작해야 몇 번 밖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7대 죄악의 피를 이어받은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죠.”

    팔을 통해 느껴지는 가슴의 감촉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하지만 용호는 멍청한 얼굴로 그 감촉을 즐길 수 없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휩쓸리긴 했지만 용호는 바보가 아니었다. 가주가 되기로 한 것 역시 상당한 강제성이 더해졌다고는 하나 용호 자신의 선택이었다.

    엘리고스가 가상공간을 통한 거래를 제의한 가장 큰 이유.

    마몬 가에 새로운 가주가 즉위했다는 사실도, 그 가주가 ‘인간’이라는 사실도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시트리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벌써부터 용호의 즉위 사실이 다른 마왕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곤란했다.

    엘리고스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속내를 감추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용호가 겁을 먹을까 두려워서였다.

    용호는 그런 엘리고스의 심정도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 있었다. 예속 사역마인 그가 용호에게 비밀을 만든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용호는 시트리의 얼굴을 보았다. 시트리는 보랏빛 눈동자로 용호를 마주하였다. 붉은 입술로 속삭였다.

    “순혈주의자들을 조심하세요.”

    팔을 통해 전해지던 환상적인 감촉이 사라졌다. 마치 바람처럼 움직인 시트리는 용호의 몇 걸음 앞에서 등을 보이고 섰고, 손을 크게 휘둘러 허공에 커다란 빛의 창을 만들어냈다.

    “던전의 일꾼인 최하급 사역마들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현재 마몬 가가 고용할 수 있는 수준의 사역마들이라면 더욱 그러하죠. 거기서 거기랄까요?”

    싼 게 비지떡.

    도토리 키 재기.

    사실이었기에 용호는 그다지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다. 더욱이 시트리는 용호를 자극하기 위해 저런 말들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시트리가 다시 돌아섰다. 빛의 창을 등진 채 너무나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진화의 마왕, 사랑하는 고객님. 당신에게는 모두가 똑같지는 않겠죠?”

    용호는 이번에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했다. 시트리는 지금 힌트를 주었고, 용호가 처음 가상공간에 접속했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럼 전 이만 사라지도록 하죠. 사랑하는 고객님, 즐거운 쇼핑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부드럽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시트리는 스스로의 말처럼 사라졌다. 온통 하얀 공간에는 이제 시트리가 열어둔 거대한 빛의 창과 용호만이 남았다.

    용호는 일단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엄청난 미녀였지만 어째 상대하기가 피곤한 여자였다. 하는 짓이나 말하는 걸 보면 용호 자신에게 꽤 호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 3때부터 망상을 해오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마왕이 된 지 이제 겨우 이틀. 더욱이 망상 속의 마왕과 현재의 모습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다.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고, 무서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용호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긍정적인 부분들을 찾아냈다. 일단 눈앞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현실을 보았다.

    시트리가 만든 거대한 빛의 창은 커다란 컴퓨터 스크린과 같았다. 창에 나타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던전 상회 사역마 카탈로그]

    [최하위 무성無星 일꾼 사역마 리스트]

    [스켈레톤]

    [고블린]

    용호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엘리고스에게 미리 들은 대로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게임에서나 보던 단어들을 마주하니 기분이 참 묘했다.

    ‘뭐, 결국엔 고블린인가?’

    언데드 몬스터인 스켈레톤의 장점은 ‘식비’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노동 시간 역시 타 종족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스켈레톤은 그만큼 많은 유지 마력을 요구했다. 이것저것 부족한 것들 투성이인 마몬 가의 던전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부족하며, 동시에 쓸 일도 많은 것이 마력이었다.

    용호가 허공에 손을 놀려 고블린을 선택하자 빛의 창이 일변했다. 수십 개의 칸에 고블린이 한 마리씩 들어있는데, 마치 게임 캐릭터 선택화면 같았다.

    고블린 한 마리의 가격은 20골드.

    엘리고스가 던전 상회에 미리 지불해둔 돈은 40골드였으니 저 중에서 딱 두 마리만 고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중에서 과연 어떤 녀석을 골라야 할 것인가.

    용호는 숨을 크게 골랐다. 진화의 권능을 발현시켰다.

    &

    < 제 2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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