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화 (1/227)
  • < 제 1장 - 즉위하다 >

    던전 메이커

    프롤로그

    열다섯 살, 중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우리 집안엔 마왕의 피가 흐른다.”

    그나마 중3때 이 이야기를 들어서 다행이라고 지금도 생각했다. 만약 중2때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지경이었으니까.

    어찌되었든 아버지께서는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보내야 하느냐 마느냐로 고뇌하는 중3 짜리 아들의 앞에서 바로 증거를 보이시는 지혜로움을 발휘하셨다.

    지금도 그 날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아버지의 두 눈에서 푸른 귀화가 피어오르던 그 날을.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능력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인간의 피가 너무 많이 섞여서 피가 옅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격세유전이라는 것이 있단다. 나는 이 정도로 그쳤지만 너나 네 자식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게 우리 가문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선조의 특성이 몇 대 아래 후손에게서 돌연 발현하는 것.

    당연히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어떤 능력이 발현할까 하는 기대 때문에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그리고 며칠 뒤 조숙하기 짝이 없던 나는 결국 깨닫고 말았다.

    설사 진짜 마왕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우리 아버지는 눈이 파래지는 재주가 있는 동네 치킨집 사장님일 뿐이었고, 난 또래 아이들보다 몸이 좀 튼튼한 동네 치킨집 아들내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 뒤.

    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제 1장 - 즉위하다.

    남중, 남고에 이어 공대에 들어간 남자의 공통점은 단순했다.

    여자를 멀리한 세월이 너무 길어 예쁜 여자 앞에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용호. 올해 스무 살인 동네 치킨집 아들은 다소 달랐다. 말은 제대로 못했지만 일단 사고 자체는 똑바로 했다.

    “그러니까, 대가 끊겼다고요?”

    컴퓨터 앞에 사각팬티에 티셔츠 차림으로 앉아있던 용호는 모니터 너머에 자리한 두 사람에게 물었다.

    한 명은 척 보는 순간 ‘집사’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초로의 백발노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 정장 차림의 젊은 미녀였다.

    노인은 누가 봐도 인간이 아니었다. 피부는 온통 붉은 색이었고, 주름진 얼굴과 하얀 머리칼 사이에는 작은 뿔 두 개가 삐쭉 솟아있었다. 당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엉덩이 쪽에 꼬리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분의 후예시여. 과거 7대 죄악 가운데 한 분이셨던 탐욕의 마왕 마몬 님의 고귀한 혈통이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 어찌 비통하고 참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천용호 님이 남아 계시니까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노인의 과장스런 목소리에 연이어진 것은 다소 차갑게 가라앉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초콜릿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갈색 피부를 가진 은발 여인이었다. 용호가 공대생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거리에 나가면 열이면 열 뒤를 돌아볼 것 같은 미녀였다.

    포니테일로 높이 묶어 늘어트린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귀 바로 위에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작은 뿔 두 개가 돋아있었다. 귀도 무슨 엘프마냥 뾰족한 걸 보면 노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닌 모양이었다.

    용호는 저도 모르게 여인 쪽으로 향하려는 눈동자를 다시 노인에게 돌린 뒤 헛기침을 터트렸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뒤 말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죠. 7대 죄악 가운데 하나인 마왕 마몬의 혈통이 끊겼다. 마왕- 그러니까 가주가 없는 던전은 오래지 않아 죽는다. 던전이 죽으면 던전에 예속된 사역마들 역시 죽는다. 그래서 가주 자리를 이을 마왕 마몬의 후손을 찾다가 나한테 왔다?”

    “오오, 과연 현명하십니다. 그분의 후예다우신 총명함입니다.”

    노인이 다시 한 번 감격했다는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그 태도가 너무 열렬했던 터라 절로 의심이 생긴 용호는 여인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용호의 기대대로 여인은 약간은 딱딱한 어조로 설명했다.

    “현존하는 후예들 가운데서 천용호 님의 피가 가장 강합니다. 그리고 사실…….”

    “사실?”

    “가주 자리에 오르실 정도의 힘을 지니신 분 역시 천용호 님 뿐입니다.”

    마왕 마몬의 후손이 용호 하나만 남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당장에 용호 자신의 아버지께서도 멀쩡하게 살아계셨으니 말이다.

    ‘일단 납득은 되는데.’

    후손들 가운데서 가주 자리에 오를 만한 인재가 용호 자신뿐이다. 그래서 굳이 이렇게 찾아- 아니 납치해 왔다.

    용호는 눈앞의 두 사람이 ‘마족’ 혹은 ‘악마’라는 사실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다. 갑자기 방 한 가운데에 게임에서나 보던 파란색 포탈을 열고 나타난 존재들이니 말이다.

    더욱이 용호가 허우적거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생전 처음 보는 방으로 옮겨진 후였다.

    컴퓨터와 책상은 그대로 있었지만, 나머지는 아니었다. 돌로 만들어진 칙칙한 방안에는 눈앞의 두 사람 뿐이었다.

    용호는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집안에 마왕의 피가 흐른다는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면 뭔가 돌발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든가, 미친 소리 말고 제발 집에 보내달라고 빈다든가 말이다.

    용호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이미 끌려왔어.’

    말은 좋게 좋게 하고 있었지만 용호 자신은 이미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끌려온 뒤였다. 어쩌면 이곳이 이미 저들이 말하는 ‘마왕의 던전’ 안일지도 몰랐다. 아니, 칙칙하기 짝이 없는 네모난 돌방을 보면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여기서 만약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가주가 없으면 던전이 죽고, 던전이 죽으면 던전에 예속된 사역마들이 죽는다.

    이 이야기 역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면 눈앞의 두 사람에게는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마왕의 후예.

    던전을 지배하는 가주.

    5년 전이라면 무조건 하겠다고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당시의 용호 자신은 마왕의 후예라는 사실 자체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머리가 굵을 만큼 굵은 지금은 좀 달랐다. 솔직히 말해 마왕 자리에 묘한 환상을 품고 있다는 것 자체는 똑같았지만, 거기에 몇 가지 조건이 더 따라붙었다.

    “돌아갈 수는 있나요?”

    “예?”

    “가주 자리에 올라도 제가 살던 집에 돌아갈 수 있냐고요. 가끔 휴가 같은 걸 내서 돌아간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용호의 추가 설명에 당황하던 노인은 안도의 숨을 토했다. 여인이 말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피 때문에라도 천용호 님께서는 1년 내내 마계에 머무실 수 없습니다. 가끔씩은 인계의 공기를 쐬셔야 하죠.”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더욱이 지금 말대로라면 저들이 용호 자신의 귀향을 만류할 이유도 없었다.

    용호는 다시 눈동자를 굴렸다. 노인은 초조함에 절어 있었고, 은발 여인 역시 딱딱한 표정을 고수하고는 있지만 두 눈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주를 구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말이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왕의 후예.

    어쩌면 중3때부터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지금 이루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너무 긍정적인 생각이려나?’

    낯선 세계에 이미 끌려왔고, 눈앞에는 가주를 구하지 못하면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는 ‘마족’ 두 사람이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사실상 하나밖에 없었다.

    어차피 가야만 하는 길.

    그렇다면 끌려가는 모양새는 사양이었다.

    이왕 오를 가주의 자리라면 용호 자신의 두 발로 걸어가리라.

    “좋습니다. 가주 자리에 오르도록 하죠.”

    용호의 시원한 선언에 초로의 노인은 어지간히 감격했는지 눈물을 쏟아냈다. 은발 여인 역시 가슴에 손을 올리고 몇 번이나 안도의 숨을 토했다.

    너무도 인간적인 두 사람의 모습에 용호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래, 까짓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별 일이야 있겠는가? 용호 자신은 마왕의 후예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용호에게도 있었다.

    &

    용호는 멍청한 얼굴로 ‘마왕의 옥좌’ 위에 앉아 있었다. 장식 하나 없이 그저 투박하기만 한 돌 옥좌였다.

    마왕의 방 풍경 역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네모진 칙칙한 방은 천장도 바닥도 벽도 모두 그냥 돌이었다. 그나마 옥좌와 문 사이에 놓여 있는 낡고 낡은 붉은 카펫이 방안에 ‘색’이라는 것을 더해주고 있었다. 창문은 물론 하나도 없었다.

    “전대 가주가 어떻게 죽었다고?”

    “마왕들의 연회에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치욕감을 느끼신 나머지 자결하셨습니다.”

    마왕 마몬의 가문은 망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고, 망하기 직전이었다. 이 둘 사이에 무슨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계’에는 마왕이 많았다. 대충 수십 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 마왕들은 모두 저마다의 던전을 가지고 있었고, 몇 년에 한 번씩 ‘마왕들의 연회’라는 곳에 모인다는 모양이었다.

    과거 7대 죄악 가운데 하나라는, 그러니까 마계 칠대마왕 중 하나인 마몬의 후예라는 영광도 옛말이었다.

    몰락을 거듭하는 마몬가는 마왕들 사이에서 멸시와 경멸의 대상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저렇게 되지 말아야 하는 반면교사의 상징 정도랄까.

    쓸데없이 넓기만 한 던전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고, 그나마도 관리할 사역마가 없었다.

    현재 던전의 사역마는 눈앞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딴청을 하는 가주의 호위기사 ‘카타리나’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집사 ‘엘리고스’ 둘 뿐이었다.

    전대 가주가 죽었을 때 다른 사역마들은 죄다 다른 던전으로 이직하거나 방랑 사역마가 되었는데, 두 사람은 가문에 예속된 사역마라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카타리나의 설명이었다.

    용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위대한 마왕 마몬의 후예라는 사실을 가슴에 품고 그 자긍심 하나로 살아가던 전대 가주와 용호 자신은 입장 자체가 달랐다. 애당초 선조가 7대 죄악 가운데 하나인 마몬이란 사실도 오늘 처음 알지 않았는가?

    그러니 마왕의 연회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치욕감을 느낄 일도 없었고, 당연히 치욕감에 자결하는 일 따위도 없었다.

    물론 마왕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에 기대했던 몇 가지 망상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용호 자신은 아직 마왕이라는 신분보다는 ‘동네 치킨집 아들내미’, ‘컴공과 신입생’이라는 신분에 친숙함을 느꼈다.

    용호의 반응이 생각보다 온건하자 카타리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것 같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냉정한 실력파 여기사-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하는 짓을 볼수록 허당 같단 말이지?’

    어쩌면 그냥 가주 안한다고 했어도 죽자 살자 덤비는 게 아니라 그냥 흑흑 울며 포기하지 않았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 부정적인 생각을 지운 용호는 카타리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엘리고스는?”

    용호 자신이 가주 자리에 오르겠다고 말한 순간 만세삼창하며 좋아하더니 어느새 사라진 그였다. 카타리나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던전 상인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가주님께서 진정한 가주 자리에 오르시기 위해서는 던전 상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 그게 무슨 말이지?”

    가주 자리에 오르는 데 던전 상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설마 던전 상인에게서 던전 입주권 같은 거라도 사야 한다는 소리인가?

    용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카타리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던전의 주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전대 가주 혹은 다른 던전의 주인인 현직 가주를 입회인으로 한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마몬가는…….”

    “전대 가주는 자살했고, 딱히 초빙할 가주도 없고?”

    카타리나는 대답 대신 울상을 지었다. 보면 볼수록 허당같은 그녀였다.

    “던전 상인이라는 자도 가주인가?”

    약간의 피로를 담아 물었다. 카타리나는 입술을 몇 번 움츠리더니 용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렇진 않습니다. 그… 죄송하지만 오늘 치르실 가주 즉위 의식은 다소 약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손발을 꼼지락 거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라도 용호가 가주 자리를 때려 치겠다고 할까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카타리나나 엘리고스에게 살해당할 일은 없겠네.’

    이번에도 어떻게든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낸 용호는 썩은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마몬 가의 가주보다 치킨집 아들내미, 미래의 치킨집 주인이 더 전도유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온 것 같습니다.”

    초조하게 용호의 눈치를 살피던 카타리나가 화색이 되어 말했다. 무슨 기척 같은 것이라도 느낀 것인지 카타리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 제 1장 - 즉위하다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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