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21살, 바뀌는 역사
차량들이 오가는 도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상층 방 안에 세 명의 남자가 모였다.
한 명은 한강이었고.
한 명은 건호.
나머지 한 명은 반은 벗겨진 넓은 이마를 내보인 남자는 판사 조판서다.
하나 무표정으로 무장한 판서의 눈은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표정 풀게.”
웃으며 대화할 분위기는 물 건너갔다. 건호는 따스한 음료를 입에 가져가며 점잖게 말했다.
“......”
그렇다고 표정이 확 바뀌는 판서는 또 아니었다. 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법관 출신으로 대한민국 내에서 제법 알아주는 엘리트 가문 출신이다.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자존심과 성향이 어떤지 짐작 들게 하였다.
“어허, 이 사람 보게. 그리 꽁해서야.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회장님.”
판서는 힘겹게 입술을 뗐다.
아무리 대단한 가문이어도 육성가문에 비하면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다.
지금의 가문이 있기까지 도움을 준 이가 바로 육성가였다. 그의 부친은 친 육성의 사람이었다.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내일모레면 여든에 접어드는 아버지.
늘 말씀하셨다.
‘우리가 지금의 자리에 있는 이유는 다 육성 회장님 덕분이다. 절대 육성과 척을 져서는 안 된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듣고 자라온 말이었다.
굶주리며 공부하는 아버지에게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자 가문을 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이.
그 시절 환경을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 나부터가 문제구나.’
그러다 고개를 좌우로 젓고 생각을 정정했다.
옷, 생활비, 학비 등을 지원해 주고 부족함 없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당시 떠돌던 소문이 ‘육성가의 핏줄과 혈연관계가 될 것이다’였다.
그 정도로 육성가문은 조판서의 집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해는 해. 자네의 영역에 손을 댔으니 기분이 상했겠지.”
이건호의 눈이 옆으로 옮겨졌다.
태연하게 앉아 있는 한강을 쳐다봤다.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여유로움, 스스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대한민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신과 판서다. 두 거인과 함께 있음에도 위축 들지 않은 모습은 감탄을 들게 만들었다.
‘늘 느끼는 놈이지만, 매번 감탄이 나오게 만들어.’
“유 회장.”
한강을 불렀다.
“네.”
“자네의 부탁으로 자리를 마련했다만. 조 판사에게 할 말 없는가?”
짧게 자신을 소개하고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한강에게 바톤을 넘겼다.
“먼저 기분을 상하게 한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사과를 할 이유는 없으나, 이건호의 위신을 생각해 몸을 작게 굽혔다.
“......눈은 그대로군.”
하지만 눈빛은 조금의 미안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영혼이 빠진 사과였다.
“표정은 이렇지만, 정말로 미안하다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누가 됐더라도 자신의 영역에 흠집을 내면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한강의 시선은 조판서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회장님 앞이라 참고 있다는 걸 아세요. 왜 나를 불렀는지 제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유 회장.”
이건호가 앞에 있다고 말을 가려 할 생각은 없었다.
조판서는 이번 일에 대한 책임 유무를 확실히 따지기로 하였다.
“판사님을 뵙고자 한 건 오로지 하납니다.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기 위함입니다.”
무척 건방진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덤덤한 시선은 자리한 두 사람의 얼굴을 당혹게 하였다.
그러기를 잠시.
“유 회장!”
조판서의 이성의 끈을 끊어지게 만드는 우를 범했다.
그의 화는 불길이 되어 한강을 덮쳤다.
“저의 생각을 판사님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악감정이 있어서, 판사님을 가르치기 위한 건방진 말은 아니니 기분이 나쁘셔도 저의 이야기를 참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긴장조차 하지 않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발음에 신경을 쓰며 정확한 음성으로 조판서에게 전달했다.
“이익!”
얼굴이 불게 달아올랐다. 목 주변도 붉게 변한 걸 보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유 회장.”
건조한 이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과 같은 전개는 생각도 못 했는데, 너무도 당돌한 한강의 모습에 이건호는 크게 당황했다.
이쯤에서 중재에 나설 필요성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도 불편을 드려. 하지만, 저에게 조금만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모든 말이 끝나면 그때 저를 혼내 주세요.”
“......”
조판서는 어이없어 말문을 닫았다.
장인이자 육성그룹의 회장에게 던지는 모습에 기겁했다.
세상에 모든 공평 공식을 간직한 인간이라도 된다는 듯. 거침이 없었다.
“판사님은 법전에 적힌 작은 글씨들이 이 세상의 모든 법이고 기준이라 보시나요? 그리고 그 법이란 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이 되는지요?”
“법은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규범이오.”
“말이 좀 이상하군요. 그럼 다르게 질문을 드리죠. 법이란 게 도덕적인 부분을 무시할 정도로 중요합니까?”
“지금 우리가 도덕적이지 않다 이 말입니까?”
“최근 벌어진 사고에 대한 판결을 봤을 때 그렇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에게 미성년자란 이유로 살려주고 용서해 주고. 그렇지 않습니까? 법에는 사람의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용돈을 주지 않았다고 살인을 저지른 미성년자에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소년원에 보낸 게 다였고.
집안으로 몰래 침입한 도둑으로부터 재산을 지키기 위해 행거를 든 가장을 가해자로 만드는 이상한 법.
한강은 그러한 부분을 지적했다.
상식과 도덕적인 부분을 무시하는 법이 과연 진짜 나라를 지탱하는 규범이라 말할 수 있을까?
‘기득권층이 감옥에 들어가도 다시 나올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한 걸 테지.’
불편한 생각일 수 있지만, 이러한 부분을 포함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세상의 법이란 게 서민이 만든 게 아닌, 기득권층이 제 입맛에 맞게 만들어 놓은 게 법이다.
“궤변을 늘어놓지 마시오. 유 회장.”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무단횡단으로 벌어진 사망사고가 어째서 운전자의 잘못인지 저를 납득시켜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운전자가 판사님의 아드님이나 사모님으로 생각하셔서 말입니다. 여기 계신 이건호 회장님도 엮어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제가 이해하기에 아주 좋을 거 같습니다.”
태연자약하던 조판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을 열려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과연 가족이 얽혀도 지금의 무단횡단자의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조판서의 눈동자가 이건호를 가리켰다.
“난 신경 쓰지 말게. 없다 생각해도 좋네.”
말은 저리하지만, 과연.
오늘 들은 이야기를 없는 말로 여길 수 있을까?
“아들에게 25%, 회장님께 75%의 책임이 있음을 밝혔다. 땅땅. 회장님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들에게 50%의 책임이 있음을 얘기하며 소송을 걸었다... 정확히 이겁니다.”
“......”
“......”
한강의 한마디에 둘은 침묵했다.
어떤 말도 쉽사리 할 수 없도록 만들어갔다.
타인을 비유로 했다면 생명에 대한 존귀함을 곁들여 포장을 해볼 터인데, 가족과 거인을 교묘하게 놓음으로써 다음 말을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말을 하지 못하시는군요. 그렇죠. 이게 정상입니다. 판사님들의 판결은 보험사기를 늘이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습니다. 매년 2%씩 증가하고 있답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른다. 그냥 가져다 붙였다.
“법에 대해 모르지만, 도덕적이란 사전적 의미는 아주 잘 압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나 바람직한 행동을 도덕적이라 하죠. 여기서 벗어난 행동은 법이란 울타리에 묶어 벌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법의 순서도 이를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단순히 종이만 보고 심판자가 되어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닌, 법이 생겨난 이유와 잘못의 기준이 어디서 파생되어 나온 건지를 따져 판결을 내리는 것이 옳은 방법이지 않을까?
“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사회질서에 악영향을 주는 판결을 꺾어 사회 정서에 맞게끔 판결을 해주셨음 합니다.”
정서란 참으로 복잡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하게 엉겨 붙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을 거쳐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겐 악법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겐 좋게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법은 결국 다수결의 원리.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고 피해를 입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
한강의 강렬한 시선은 오로지 조판서를 향했다. 그가 결정한 판결은 아니었지만, 그의 입김을 무시할 이는 없었다.
“정말 말도 나오지 않게 만드는 논리야.”
멍때리고 있던 조판서의 입이 그제야 열렸다.
판사도 사람이다. 충분히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문제는 잘못된 판결 하나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꿔버린다는 점.
“헌법 제7조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제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모든 영역에 차별을 받지 않는다. 책임질 수 있으십니까?”
이런 걸 봤을 때, 법원은 헌법을 어기고 있었다. 평등하지 않은 법 아래 차별을 두고 국민의 위에 서려 하는 모습.
이럴 거면 헌법이란 게 왜 있을까? 공무원이 권위를 챙길 필요가 있을까?
“......판결을 바꿔 주면 되는 겁니까?”
한강의 목소리만이 길게 이어지던 공간에 허탈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공기를 탔다.
“감사합니다.”
한강은 들려온 목소리에 길게 답하지 않았다.
생각으로 가득했을 그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함을 전했다.
“내가 졌습니다.”
피곤함이 그의 얼굴에 맺혔다. 설마 육성에 와 이런 어이없는 말들에 얻어맞을 줄 몰랐다.
‘보통이 넘어.’
부끄럽고 쑥스러운 일이지만 완벽하게 졌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이의 공격은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있어 아주 치명적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양보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이번 일로 법원은 새롭게 인식되게 될 겁니다. 판사님으로 인해 법원이 크게 바뀌길 바랍니다.”
방에 들어와 처음으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었지만, 모든 것에 ‘진심’이 있었음을 현 자리에 있던 둘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말이 떠오르는군. 옆에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을 두라는 말이......’
한강을 처음 접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냉정함을 잃고 오로지 화로써 한강을 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곁에 두고 싶은 인물로 바뀌었다. 최소 대한민국 내에서 이건호와 자신에게 막말을 퍼부울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이 회장님. 아무래도 저는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후배 녀석과 선약이 있다는 걸 잠시 깜박했습니다.”
“......그러게. 가보게. 멀리 나가지 않겠네.”
이건호는 앉은 자세로 조판서의 인사를 받았다. 이건호는 방문이 닫히는 걸 보다, 시선을 한강에게 향했다.
무언가 고민으로 물든 시선을 한참을 보낸 이건호는.
“속이 후련하더냐?”
짧고 굵게 한마디를 던졌다. 말 한마디 안에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