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203화 (203/204)
  • 203회

    5년 후.

    오늘은 파티가 있는 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생일 파티.

    아침부터 금홍은 정신이 없다.

    음식 정도면 그냥 사람을 불러서 해도 될 텐데.

    손님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주방을 떠나질 않는다.

    “어제도 늦게 자지 않았어? 괜찮아?”

    난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내가 알기론 어제도 금홍은 번역 일에 시달렸다.

    번듯한 번역가가 된 그녀는, 몰려드는 일감에 매일매일이 강행군이다.

    “괜찮아. 아마도….”

    금홍이 달력을 봤다.

    “오늘까지는 놀 수 있겠어.”

    그럴 줄 알았다.

    내일부턴 또 바쁘단 얘기군.

    “좀 도와줄까?”

    나는 가만히 있기가 민망해 물었다.

    그러자 금홍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 같은데.”

    “옙.”

    괜히 하는 얘기가 아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됐을 때, 금홍에게 요리 좀 해 주겠다고 요란을 떨다가 이 집을 다 불태워 먹을 뻔했지.

    전 재산 털다시피 해서 산 집인데, 그 길로 이혼을 당할 뻔했다.

    그 ‘웃픈’ 일도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금홍이 유학을 마치자마자 바로 결혼부터 했으니까.

    우리 둘 다 오래 기다렸던 만큼, 환경이 안정되니 속전속결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번잡한 주방을 나왔다.

    거실을 터벅터벅 가로지르며 전시된 책들을 봤다.

    여행을 가기 전 쓴 책들을 비롯하여, 열 권에 달하는 <지팡이> 전집, 여행 중에 쓴 시를 엮은 시집, 역시 여행 중에 마무리한 박사 논문, 조나단 감독과 찍은 다큐멘터리 DVD, 영화 <그 집>이 국제영화제에서 받은 상들.

    그리고 귀국한 후 쓰기 시작한 소설집들.

    글 쓰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그런가.

    몇 권의 책을 냈는지도 세기가 어려울 정도다.

    창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저 마셨다.

    멀잖은 곳에 조인후 감독의 저택이 내다보인다.

    가끔은 그도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이렇게 시선이 마주치면 서로 손을 흔들어 보기도 한다.

    처음 조인후 감독의 집에 갈 땐 몰랐다.

    아니, 그때는 조인창 교수의 집이었구나.

    이 높은 언덕과 압도적인 크기의 저택들 중 하나가, 내 집이 될 줄이야.

    “오빠는 이번 소설 원고 다 끝났어?”

    날 너무 매몰차게 쫓아냈단 생각이 든 건지, 금홍이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어, 끝났지. 어제 넘겼어.”

    “잘했네. 사람들은 몇 시에 온대?”

    “한 네 시?”

    “그래? 다행이야. 시간은 충분하네.”

    “너무 고생하지 마. 힘들잖아.”

    “아니야. 맛있게 해서 먹여야지.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는 건데. 오빠 생일이기도 하고.”

    그럼 그때까지 난 뭘 하나.

    사실 파티 같은 건, 사람 부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워낙 외부인 부르는 걸 싫어한다.

    믿을만한 여사님 한 분에게 살림을 맡기는 정도.

    그마저도 오늘 같은 주말에는 부르지 않지만.

    그러니… 나도 나름대로 ‘파티 준비’라는 걸 해야 하는데.

    거실을 아무리 뱅뱅 돌아봐도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였다.

    딩― 동―

    벨이 울렸다.

    나는 인터폰으로 가서 얼굴부터 살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묻지도 않고 문부터 열었다.

    “누가 왔어?”

    금홍이 저 안쪽 주방에서 외쳐 물었다.

    “어. 보면 알아.”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이 등장했다.

    “형.”

    “왔냐.”

    온갖 걸 다 짊어지고 온 지훈이었다.

    양 옆구리에 끼고 온 커다란 엠프 하며, 뭔가 가득 든 가방 하며.

    약속 시간은 네 신데.

    오전부터 달려온 게 딱 지훈답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형, 파티 준비 같은 거 할 줄 모르잖아요.”

    “아닌데.”

    지훈이 웃기지 말라는 듯 픽 웃었다.

    “사람도 안 쓴다길래, 슬리퍼 끌면서 거실만 뱅뱅 돌고 있을 게 눈에 보여서요.”

    …역시 이놈은 날 너무 잘 알아.

    “내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긴 한데, 네가 그렇게 준비를 해 왔으니 너한테 전적으로 맡길게. 뭐 도와줄까?”

    “어련하겠어요. 사모님은?”

    지훈은 언젠가부터 반 장난식으로 금홍을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걸 금홍이 싫어하는 걸 알기에 더욱.

    “요리해.”

    “아이고~ 사모님! 요리 잘하고 계십니까?”

    “그놈의 사모님 소리!”

    금홍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외쳤다.

    지훈이 낄낄대며 건들건들 주방으로 갔다.

    아직 저렇게 학생티를 못 벗은 것 같지만, 지훈은 저래 봬도 교수 임용을 앞두고 있다.

    내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지훈은 박사 논문을 무사히 다 쓰고 강의를 뛰고 있었다.

    적어도 십 년은 시간 강사 생활을 할 각오가 있었는데, 지도 교수인 정미현 교수가 올해 말에 퇴임을 한단다.

    지훈을 그 자리의 내정자로 점찍어 두고.

    별 탈이 없다면… 내년에는 교수가 되어 있겠지.

    잠시 후, 지훈이 웃으며 주방에서 나왔다.

    아마 금홍과 서로서로 실컷 놀려 댔을 거다.

    언젠가부터 두 사람은 그 재미로 만난다.

    “엠프부터 설치하죠.”

    “노래 선곡은?”

    “힙합. 이의는 받지 않습니다.”

    지훈이 강경하게 말했다.

    피터 한이 미국으로 가 버린 후.

    지훈은 더욱 더 파티에 진심이 되었다.

    어째 볼 때마다 새 엠프가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지훈을 도와 엠프를 설치했다.

    이런 쪽엔 별로 재주가 있는 편이 아니라서, 지훈이 하는 걸 보고 겨우 따라 하는 정도로.

    그런 날 보고 지훈이 피식 웃었다.

    “형은 진짜 글 쓰는 거 빼고는 다 젬병이다.”

    “이제 알았냐.”

    “하지만 괜찮잖아요. 글… 흠, 이걸 잘 쓴다고 표현하는 것도 너무 식상한데? 천재라고 해 드릴게요.”

    천재라.

    천재를 구별하는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굳이 거부하진 말아야지.

    지훈이 슬쩍 물었다.

    “받을 것 같아요? 이번에.”

    “뭘?”

    “그 있잖아요.”

    “노벨문학상?”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지훈이 움찔했다.

    사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지팡이>는 노벨문학상에 노미네이트 됐다.

    유럽과 미국 전역, 문화적 풍토가 다양한 아시아권까지.

    <지팡이>는 많은 나라에서 인정받았고, 아직까지 ‘이상의 역작’이라 불리고 있다.

    마흔도 안 된 작가가 ‘역작’을 갖고 있다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지만.

    하지만… 2년 연속 <지팡이>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언론의 설레발이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정작 난 아무렇지 않았는데… 아니, 사실은 이런 젊은 나이에 그런 상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 자체로도 상당히 만족스러웠는데.

    나 외의 수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지훈에게 말했다.

    “지구 반대편 스웨덴에서 주는 상인데. 내가 뭘 어쩌겠냐. 주면 좋고 아니면 말지.”

    “벌써부터 언론에서는 형이 받을 거라고 떠들던데요?”

    “떠드는 게 그 사람들 일이니까. 임용 준비는 잘 하고 있어? 내정됐다고 해도 해야 할 게 많을 텐데?”

    “말도 마세요. 벌써 여기저기 인사 다닌답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뒤에서 저 씹는데요. 젊은 놈이 교수 되고 싶어서 안달 났다고. 지들은 그냥 임용에서 떨어진 거면서.”

    우리는 그 말에 킬킬 웃었다.

    누가 송지훈을 씹는다고?

    그럼 해줄 말이야 하나뿐이지.

    “부러워서 그래, 부러워서.”

    지훈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압니다.”

    * * *

    “어서 오세요!”

    금홍이 반갑게 손님들을 맞았다.

    이 앞에서 만났는지, 강인춘 PD와 조인후 감독이 같이 왔다.

    “어이구~ 집 좋네!”

    강인춘 PD가 너스레를 떨며 들어왔다.

    커다란 과일 바구니도 잊지 않았고.

    조인후 감독은 비교적 편안한 차림이었다.

    아무래도 가까이 사는지라, 그는 몇 번이나 이 집에 온 적이 있었다.

    거실에는 사람들이 이미 바글바글했다.

    김미소 작가가 데려온 작가 군단들, 신라문학의 두 원로들과 오진우 평론가.

    지훈과 금홍에 더불어… 방금 온 두 사람까지 하니,

    “이 큰 집이 좁아 보이네요.”

    조인후 감독이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빨리 와요, 이 작가. 주인공이 안 오면 쓰나.”

    박조운 편집장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날이 갈수록 더 정정해지는 느낌이다.

    “네네, 갑니다.”

    나는 그들이 비워 놓은 상석에 앉았다.

    상에는 미리 맞춰 놓은 하얀 케이크와 금홍이 아침부터 고생해서 만든 음식들이 있었다.

    “이걸 정말 다 번역가님이 만드신 거예요?”

    김미소 작가가 놀라 물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대단하다는 듯 말이다.

    금홍은 뭐 이정도 가지고 그러냐는 얼굴이지만.

    “와인부터 마시죠? 사실은….”

    지훈이 가방에서 웬 와인을 하나 꺼냈다.

    “뭐야 그게? 사 왔어?”

    “피터 한 교수님께서 보내 주셨어요. 형 생일 축하 선물로. 여기까지는 못 오시니까.”

    도마크나 리브레, 누들….

    온갖 출판사에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낼 때에도, 피터 한은 조용히 있었더랬다.

    그런데 이런 깜찍한 선물을 보내 주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다.

    지훈은 사람들의 잔에 와인을 채웠다.

    풍기 깊은 향기가 공기 중에 퍼졌다.

    대체 얼마짜리를 보낸 건지, 감도 안 잡힌다.

    “자, 이제 잔을 채웠으면… 건배 한 번 할까요?”

    이준환 편집위원이 말했다.

    “건배사는 생일이신 이 작가님이 하시죠.”

    조인후 감독이 내게 건배사를 넘겼다.

    딱히 생각해 놓은 건 없는데… 나는 잔을 들고 잠시 생각했다.

    건배사라….

    나를 보고 눈을 빛내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들 모두 뭔가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걸.

    “‘다음 글을 위해!’는 어때요?”

    내 말에 사람들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김미소 작가가 말했다.

    “저는 좀 더 거창한 게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것참 괜찮은 것 같아요.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이잖아요.”

    “그래요. 건강이나 돈 얘기하는 건 식상해.”

    강인춘 PD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건배사가 정해지고.

    “다음 글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잔을 부딪쳤다.

    소소하지만, 즐거운 파티였다.

    와인 병은 금방 빈 병이 되고, 또 새로운 와인을 땄다.

    사람들은 잘 먹고 잘 떠들었다.

    보는 내가 뿌듯할 만큼.

    강인춘 PD과 조인후 감독은 새 작품에 대한 고민을 나눴고, 김미소 작가와 지훈이는 한국 문단에 대해 투덜댔다.

    신라문학의 두 원로는 은퇴 이후의 삶을 어떻게 하면 재미나게 꾸릴 수 있는지 상의하기도 했다.

    금홍과 오진우 평론가는 진지하게 시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데, 전 아직도 <지팡이> 만한 소설을 못 봤어요.”

    어쩌다가 김미소 작가가 그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다.

    불콰한 얼굴을 보니, 술이 좀 돼서 그런 걸지도.

    <지팡이>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집중했다.

    “특히 마지막이요. 마지막 내용이 발표됐을 때… 전 세계에서 반응이 왔잖아요.”

    그러자 지훈이 말을 이어받았다.

    “시작은 프랑스였죠. 리브레클럽 3부 낭독회가 큰 센세이션이 됐으니까. 노인들을 중심으로 죽음에 대한 소설을 읽게 하니… 어딘가 소름 끼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그 이상 성공한 낭독회가 아직도 없다잖아요.”

    김미소 작가가 이어 말했다.

    “독일도요. ‘작가다움’에 대한 논의가 틸 버켈의 논평을 시작으로 마치 유행처럼 번졌어요. 전 유럽에서. 마치 문학을 정의하는 새로운 문학적 논제를 찾은 것처럼요. 저 아직도 강의할 때, 그 논의를 가지고 얘길 해요. 그리고… 그다음이 미국이었나요.”

    김미소 작가가 옛날 일을 떠올리듯 미간을 찌푸렸다.

    “일 얘긴 그만하죠. 놀려고 모인 자린데.”

    민망해진 내가 말을 막아 봤지만.

    “…맞아요. 다음 반응은 미국이었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오진우 평론가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순수하게 열었던 내 ‘생일 파티’는, 어느새 <지팡이> 토론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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