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200화 (200/204)
  • 200회

    “숙제요?”

    예상치 못한 말에 내가 되물었다.

    그러자 심 교수가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숙제. 얘길 듣자 하니 앞으로 한 일 년은 얼굴 못 볼 것 같은데… 지도 교수 입장에서 제자의 공부를 일 년이나 방치할 수 있나.”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하지.

    원래 지도 제자들은 지도 교수를 자주 봐야 한다.

    도제처럼 자신의 학식을 넘겨주는 것이 지도 교수의 임무이기도 하고.

    그런데 대체 어떤 숙제를 말하는 걸까.

    “숙제라면 어떤….”

    “별 건 아니고. 우리, 논문 주제는 잡혀 있죠?”

    “네. 20세기 작가 이상에 대한 연구로 주제를 잡기로 했으니까요.”

    심 교수는 작가의 심리와 작품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가 마지막 연구 주제로 남겨 둔 작가는… 바로 전생의 나, ‘이상’이었다.

    “그럼 주제는 나왔고, 그다음은 목차를 짜야겠네. 출국하기 전까지 논문 목차를 짜는 걸로 합시다. 그리고 쓰는 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엄청난 얘길 할 것 같은데.

    “일 년의 시간을 줄 테니. 써 오세요.”

    “….”

    “싫은가요?”

    “아닙니다. 써 오겠습니다.”

    박사 논문을 일 년 안에 쓰는 것.

    상당히 어려운 일이긴 했다.

    게다가 한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대학원생’으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지도 제자’로서.

    해야 할 마지막 의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건 혜경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석사 시절의 설움에도 불구하고… 혜경은 인생을 바치는 마음으로 박사에 진학을 했다.

    그만큼 문학을 사랑했던 거겠지.

    내가 박사학위를 따는 건, 그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심 교수가 비로소 마음에 든다는 듯 웃어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숙제를 받긴 했지만, 어쨌건 허락은 얻어 낸 셈이었다.

    나는 심 교수와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눴다.

    그도 나도 머릿속에 대략적인 목차는 있는지라, 앉은 자리에서 쉽게 합의를 봤다.

    특히 심 교수의 연구자적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게 있어서 조금 모호한 내용들이, 그의 입을 통하자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개념들로 탄생했다.

    제자 된 입장으로 쉽게 할 소린 아니지만, 논문 앞에서 그는 정말 ‘지도 교수’ 다웠다.

    연구실을 나갈 때가 되었을 땐, 나는 그럴듯한 박사 논문 목차를 갖게 되었다.

    조금 더 정리하면, 완벽한 목차가 될 거였다.

    심 교수는 문 앞까지 나를 마중 나왔다.

    “앞으로 한동안은 못 보겠네요.”

    “<지팡이> 완결 후에 떠날 텐데요. 혹시 괜찮으시면 떠나기 전에 식사라도 대접하게 해 주세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거 딱 귀찮아.”

    심 교수다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는 더욱더 그다운 말을 덧붙였다.

    “논문이나 잘 써 와요. 난 그것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 *

    이제는 정말 <지팡이>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쓸 때가 됐다.

    작업실의 칠판은 이미 글자들로 가득 찼다.

    더 이상 뭔가를 써 놓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 칠판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참 어려운 길을 왔다는 생각이 든다.

    3부의 소재는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건… 다름 아닌 하융의 ‘작가주의’였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하융의 여정을 이어 갔다.

    배우가 하융의 곁을 떠난 후, 하융도 그 동네를 떠나 버린다.

    갈 곳은 많았다.

    당시 만주에는 곳곳에 작은 군락들이 있었으니.

    하융은 한 군락에 도착을 한다.

    그곳은 그가 본 어느 군락보다 조선인들이 많았다.

    하융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근처에 독립군들의 본거지와 은신처가 있었다.

    하융의 수중엔 꽤 많은 돈이 남은 상태였다.

    멀끔한 하융의 행색에 몇몇 조선인이 다가왔다.

    그리고 하융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하융은 사실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은 알고 있었다.

    만주벌판의 독립군.

    그들에게 원하는 건 뻔하지 않은가.

    바로 군사자금이었다.

    조선에 대한 애정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조선인에 대한 애정은 남아 있었기에, 하융은 자신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을 떼어서 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융은 몰랐다.

    그 일이 자신을 살리는 일임과 동시에, 죽이는 일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하융은 그곳에서도 글을 썼다.

    만주에서 만난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

    그들이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에 대하여.

    그 글은 조선이나 일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었다.

    반도와 섬.

    그런 작은 땅이 담을 수 없는 기개가 있었고, 동시에 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삶의 황량함도 담겨 있었다.

    그 특별한 감각은, 하융이 조선 땅을 버리고 스스로 얻어 낸 것이었다.

    하융은 그곳에서 글을 쓰고, 원고를 가끔 조선의 친구에게 보냈다.

    점점 쌓여 가고 있는 원고가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하융을 찾아왔다.

    예전 날 하융에게 군사 자금을 받아 간 독립군들이었다.

    그는 하융에게 묻는다.

    ― 당신에 대해 들은 게 좀 있는데… 당신, 일본어로 글을 쓰는 작가라지?

    서슬 퍼런 말이었다.

    조선에 목숨을 바친 독립군들의 눈에는, 하융은 배반자이자 변절자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알고 온 것 같았다.

    하융이 일본에서 꽤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걸.

    그들은 많은 것을 따져 물었다.

    왜 조선어를 버리고 일본어로 글을 썼느냐.

    천황을 칭송하는 글을 쓴 것이냐.

    우리에게 준 돈이, 사실은 일본의 돈이 아니냐.

    하융은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느낀 건 분노가 아니라 배신감이었다.

    하융이 최선을 다해 해명을 하면, 그러니까 자신의 글이 일본이 아닌 조선을 위한 것이라 하면… 그들은 하융을 이해할 것이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어 했다.

    하융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소설에 다 썼소.

    그게 전부였다.

    하융은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독립군들은 황당했다.

    만주는 무법지대나 마찬가지였다.

    독립군들이 하융을 죽인다고 해서, 그 죽음의 진상을 파헤쳐 줄 공권력은 없었다.

    또한, 조선인들은 대부분 독립군의 편이었고.

    독립군들은 하융이 범상치 않은 이라는 걸 느꼈다.

    지금도 일본어로 뭔가를 쓰고 있는 이 속 모를 작가.

    이런 사람을, 그들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독립군들은 하융을 죽이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받은 군사자금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을 받아 놓고도 하융의 목숨까지 빼앗는 것은, 그들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독립군들은 결국 씁쓸한 얼굴로 하융의 숙소를 나선다.

    ― 다시는 보지 맙시다.

    라는 인사를 남긴 채.

    하융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그는 독립군의 싸움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만리타국에서 민병이 된 그들이 좀 안쓰럽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과 함께할 마음은 없었다.

    군인이 분노하는 자라면, 작가는 슬퍼하는 자여야 한다.

    하융은 그저.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슬픔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융은 죽음의 위기를 넘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융이 지내는 군락을 일본군들이 에워싼다.

    독립군을 소탕하러 온 군인들이었다.

    여기까지 썼을 때였다.

    3부가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내 에너지도 점점 깎여 나가는 걸 느낀다.

    그저 글이 잘 써진다고 밤낮없이 달릴 순 없었다.

    소설의 클레이맥스에 다다르는 지금은 더더욱.

    나는 작업실을 나왔다.

    그리고 주방에서 커피를 한 잔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작업실에서 나온 인기척을 느꼈는지,

    마침 지훈이 제 방에서 나왔다.

    “너도 커피 줄까?”

    나는 지훈에게 물었다.

    “좋죠.”

    “조금만 기다려.”

    찬장의 잔 두 개를 꺼내, 커피를 따랐다.

    지훈은 내가 준 커피를 받아 마셨다.

    “형, 다음 <지팡이> 회의는 언제예요?”

    “응?”

    “좀처럼 말이 없어서요. 원래 언제쯤 한다고 미리 말해 주잖아요.”

    “아, 그랬지.”

    사실 ‘팀 이상’ 회의를 한 지 좀 됐다.

    평소의 리듬이었다면 한 번은 했었어야 했지만….

    “마무리 지을 때까지는 쭉 쓰게.”

    “어? 회의 안 하고요?”

    “응. 일단은 나 혼자 몰입해 보고 싶어. 그렇게 해서 다 쓰면, 그때 보여 주려고.”

    “호오… 금홍 샘 보고 싶지 않아요?”

    지훈이 짓궂게 놀려 댄다.

    녀석은 가끔 이런 식의 농담을 치곤 한다.

    안 먹힐 걸 알면서도.

    “알아서 보니까 걱정하지 마라.”

    “어? 언제 봤는데요?”

    “너 같으면 너한테 말해 주겠냐?”

    “아, 진짜. 치사해요… 아무튼, 완결까지는 쭉 달리시게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응. 그 후에 바로 회의 열자.”

    “그래요, 그럼. 형 작품이니까 그렇게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네요.”

    그때였다.

    작업실 쪽에서 미세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형, 전화 온 거 같은데.”

    “그러게. 받아야겠다.”

    웬만한 연락처는 무음으로 돌려놓은 지금.

    알람이 오는 전화라면,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작업실로 들어와 휴대폰을 확인했다.

    화면에 반가운 이름이 떠 있었다.

    신라문학의 이준환 편집위원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안부를 나누자, 그가 바로 본론을 말했다.

    ― <지팡이> 9권이 나와서 말입니다. 차도 한잔 함께할 겸, 수령하러 와 주시겠습니까?

    * * *

    다음 날 오전.

    나는 일찍이 신라문학으로 갔다.

    이준환 편집위원의 방에는 박조운 편집장도 함께였다.

    “벌써 9권이라니. 시간 빠릅니다.”

    이준환 편집위원이 말했다.

    “보아하니 딱 10권으로 끝날 것 같은데. 보기가 아주 좋구만.”

    박조운 편집장도 한마디 했다.

    나는 <지팡이> 9권을 살펴보았다.

    1권에서부터 쓰던 하융의 초상화를 아직도 표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판매 지표도 아주 좋아요. 구매율은 뒤로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곡선이 완만한 편이라서. 10권까지는 무리 없이 판매가 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편집위원님.”

    “우리한테 감사할 게 뭐 있나.”

    박조운 편집장이 호탕하게 말했다.

    “베스트셀러에 <지팡이>가 올라간 지가 몇 달짼데, 아직도 순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게 대단한 거지. 하긴, 나도 아침마다 이 소설 보는 낙으로 살아요.”

    박조운 편집장은 보란 듯 책을 들춰 보며 말했다.

    그렇게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그들에게 내 여행 계획에 대해 밝혔다.

    그들은 처음엔 좀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하긴, ‘대학원생’의 장기 여행은 놀랄 일이지만, ‘작가’의 장기 여행은 흔한 일이지.

    “나도 젊었을 때 많이 다닐걸. 뭐 하러 이 코딱지만 한 땅이 좋다고 붙어 있었는지 몰라.”

    “박조운 자네는 그 시절에 한식 아니면 밥 못 먹는다고 유난을 떨었잖나. 그래서 우리가 안 데리고 다녔지.”

    “뭐야? 그게 정말이야?”

    두 사람은 또 그렇게 한참을 투닥거렸다.

    따로 보면 근엄하기 짝이 없는 양반들인데, 함께 있으면 삼십 년은 젊어지는 것 같다.

    나도 나이가 들면… 저런 친구가 남아 있으려나.

    “그나저나, <지팡이>의 마지막이 아주 궁금합니다.”

    이준환 편집위원이 내게 말했다.

    지금 업로드된 부분까지 봤을 테니… 아마 하융이 배우와 지내는 내용까지 알겠구나.

    “맞아요. 갑자기 3부에 들어서자마자 죽는다고 하니까. 기대가 안 될 수가 있나.”

    박조운 편집장이 말했다.

    그들은 <지팡이>의 마지막에 대한 작은 힌트라도 달라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글쎄, 내용에 대해 스포일러 해 줄 순 없고.

    이 말 한마디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두 사람이 귀를 쫑긋 세웠다.

    “하융을 영원히 살게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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