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99화 (199/204)
  • 199회

    “뭐라고요…?”

    지훈이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금홍과 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우리 둘이 잡은 손을 내보이며.

    “…이렇게 됐다는 거지.”

    금홍까지 집으로 모인 후, 우리는 한동안 <그 집>에 관해 떠들었다.

    <그 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의 그 지난했던 과정들에 대하여.

    테이블에 지훈이 좋아하는 안주를 쫙 까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훈이 녀석의 얼굴에 감동이 슬슬 번질 때 즈음, 우리는 결국 ‘커밍아웃’을 했다.

    너무 놀라지 말라는 밑밥까지 깔아 놨는데, 저 표정을 보아하니 그것도 별 소용 없는 것 같다.

    “…말도 안 돼.”

    …전혀 예상을 못 했구나, 눈치 없는 녀석.

    “에이, 장난치는 거지? 오늘 만우절인가.”

    “장난 아닌데.”

    나는 내친김에 금홍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이 녀석이 못 볼 것 봤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것이었다.

    “아, 알았으니까 그만 해요! 이상해! 못 보겠어!”

    “별수 있냐. 이제 익숙해지도록 해.”

    내 말에 금홍이 킥킥 웃었다.

    그리고 아직 벙쪄 있는 지훈에게 물었다.

    “정말 몰랐어요? 전혀?”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요.”

    “피터 한 교수님도 눈치를 채셨던데.”

    “…뭐라고요?!”

    지훈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지금껏 우리 사이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피터 한 교수에게 ‘밀렸다는’ 게 더 충격적인 모양이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피터 한 교수, 인간사에 큰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새 그걸 눈치챘다고?

    “아, 자존심 상해… 난 매일같이 같이 있었는데 왜 몰랐지?”

    지훈이 아직도 납득이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녀석의 잔에 맥주를 다시 채워 줬다.

    “아무튼, 늦게 말해서 미안해. <지팡이> 다 끝날 때까지는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 숨기려고 했는데… 지금 타이밍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뭐, 네, 뭐… 제가 뭐라고 할 일은 아니죠. 좀 놀라서 그렇지.”

    그런데 어쩌냐.

    아직 놀랄 일이 좀 더 남았는데.

    금홍과 나는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지금 다 말해 버려?’

    그리고 서로의 표정을 본 순간, 확신했다.

    바로 지금이 말할 때라고.

    “지훈아.”

    “네?”

    “<지팡이>가 끝나면, 나 여행 갈 거야.”

    “아, 갔다 오세요.”

    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마 일이 주, 길어 봤자 한 달이라 생각하겠지.

    “최소 일 년 이상.”

    그쯤 되자, 녀석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그렇게 오래요? 형이 무슨 하융이에요?”

    “비슷하긴 한데… 머리를 좀 환기하고 싶어서. 새로운 곳의 자극도 받고 싶고.”

    나는 맥주잔을 들었다.

    일단은 좀 마시고 생각하라는 뜻으로.

    지훈이 마지못해 잔을 부딪쳤다.

    하지만 술을 마시진 못했다.

    역시, 너무 갑작스러웠나.

    지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벌써부터 이러면 곤란한데.

    아직 금홍이 유학을 간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는데.

    “후우….”

    지훈이 별안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 없으면 심심한데.”

    외로운 게 아니라 심심하단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혼자 둬도 되겠구나.

    하긴, 녀석은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친구가 많다.

    “집, 작은 데로 이사 가야 하나.”

    “굳이 무슨 이사.”

    “하지만 여기 반은 형 건데.”

    “전세금 안 빼도 되니까 너 쓰고 있어. 그리고 나 없을 때 판권이나 저작권, 홍보 같은 매니저 일도 맡기고 가고 싶은데. 괜찮겠어?”

    “어? 저 그럼 안 잘리는 거예요?”

    “내가 널 왜 잘라. 일 시켜야지.”

    아직은 내 ‘매니저’ 자리에 지훈을 두고 싶었다.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여러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할뿐더러, 지훈에게 있어 매니저는 주 수입원이기도 하니까.

    녀석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같이 해야지.

    그 말을 하니 녀석도 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그새 비어 버린 금홍의 잔에 맥주를 따르려 했는데, 맥주가 다 동나 있었다.

    “맥주가 없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아까 사 온 병맥주를 꺼냈다.

    슬쩍 거실을 보니, 금홍이 지훈에게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자 지훈이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아, 두 사람 진짜!”

    유학 간단 소리를 드디어 한 모양이다.

    지훈은 이제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따라놓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다들 갑자기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나 혼자 두고!”

    “죄송해요. 그렇게 됐어요.”

    금홍이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이씨… 이것도 피터 한 교수님은 알아요?”

    “그게… 교수님께서 추천하신 유학이니까요.”

    “아오!”

    지훈은 못 참겠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그나마 오늘이 좋은 날이라 저 정도지, 안 좋은 타이밍에 말했으면 화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맥주병 뚜껑을 따고, 지훈의 빈 잔에 따라 주었다.

    “미안해, 미안해. 일단 마셔.”

    지훈은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심각해졌다.

    한참이나 녀석은 말이 없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진짜 화났나?

    “저도… 뭔가를 해야겠어요.”

    지훈이 말했다.

    “형이랑 금홍 샘 한국에 없는 동안.”

    “잘 생각했어. 뭐 하고 싶은데?”

    “제가!”

    지훈이 별안간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형 오기 전에 박사 학위 땁니다.”

    지훈이 큰 소리로 선언했다.

    그건 꽤 거창한 계획이었다.

    보통 박사 학위를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 년.

    아무리 유능한 학생이라도, ‘행정적으로’ 일 년은 족히 걸린다.

    그리고 지훈은 그 ‘유능한 학생’의 범주에 들어가니….

    “지금부터 열심히 달리면 가능은 하겠네.”

    “당연하죠. 형 한국 오면, 송 박사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지훈이 호언장담했다.

    좀 급한 감이 있긴 하지만,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니… 지훈도 의욕이 생긴 듯했다.

    “형, 근데….”

    “응?”

    “지도 교수님이랑은 얘기 다 끝난 거예요?”

    “…아.”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팀 이상’의 앞날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

    한국대학교 ‘대학원생’인 내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군.

    한국대학교에 박사로 입학한 지도 이 년이 다 되어 간다.

    이미 정규 과정을 거의 다 끝났고, 남은 건 일 년의 논문 학기.

    논문 학기란 대학원생이 논문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수한 학기다.

    논문 학기는 들어야 하는 수업이 없다.

    딱히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되고, 학비를 내는 것도 아니다.

    원하지 않으면 논문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대로 ‘수료’인 상태로 남거나, 혹은 논문 학기 이후에 논문을 써도 무방하다.

    문제는 나의 지도 교수인 심 교수다.

    심 교수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빨리 박사 졸업을 시켜야 하는 상황에, 내가 외국으로 장기 여행을 가는 걸… 좋아할 리가.

    나는 금홍과 지훈에게 말했다.

    “이거, 우스갯소리로 ‘쇼부’를 봐야겠는걸.”

    * * *

    한국대학교.

    심 교수의 연구실.

    아니나 다를까.

    심 교수는 노골적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했다.

    면목 없는 일인 건 맞았다.

    인수대에서 한국대로 왔을 때가 생각난다.

    아무도 내 지도 교수를 해 주려 하지 않는 것을, 심 교수만이 날 제자로 받아들여 줬지.

    ‘20세기 이상’의 연구를 함께해 보자면서.

    “꼭 가야겠다고요?”

    “…네.”

    “논문은?”

    “다녀와서 쓸 생각입니다.”

    “얼마나 다녀올지 모른다면서.”

    그건 그렇지.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내가 언제 은퇴를 할 줄 알고.”

    심 교수는 손가락으로 뭔가를 셌다.

    그리고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삼 년 후에 난 은퇴해요. 그럼 다녀와서 논문을 쓰는 게 시간적으로 벅찰 수도 있고. 또한, 나도 이 작가 말고 제자들이 있을 거 아니오. 은퇴하기 직전이 되면 다들 학위를 따겠다고 달려들 텐데….”

    지도 교수가 은퇴를 해 버리면, 지도 제자들은 논문 지도를 해 줄 교수를 잃는다.

    그래서 교수는 은퇴 몇 년 전부터 제자도 받지 않고, 가능한 한 지도 제자들을 빨리 졸업시킨다.

    “일이 이렇게 되어 죄송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다녀와서 바로 논문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내 뜻을 다시금 밝혔다.

    그러자 그가 허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외국에 가서 뭘 하시게?”

    “가장 큰 목적은 앞으로 쓸 글들의 자양분을 모으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기획되어 있는 일들도 있긴 합니다.”

    “그게 뭔데? 들어나 봅시다.”

    그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제자’ 이상을 꾸짖곤 싶지만, ‘작가’ 이상의 계획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먼저, 미국 시애틀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조나단 란스마이어 감독과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아직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 감독과 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고요. 아마 성사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이야기는 어젯밤에 들은 것이었다.

    조나단 감독이 급하게 메일을 보낸 것인데, 미국의 모 방송사에서 우리를 가지고 다큐멘터리를 찍어 보고 싶단 의사를 내비쳤다.

    구체적인 기획 주제도 잡혀 있었다.

    <두 예술가는 어떻게 서로의 예술을 섞었나>

    멋진 기획이었고, 우리의 작업 방식과도 일맥상통했다.

    당연히 내 대답은 ‘예스’였다.

    “또?”

    “프랑스 파리로 가야 합니다. 겨울 독서클럽에서 <지팡이>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데, 아니, 낭독이 될 수도 있고요. 딱히 제가 할 일은 없지만, 독서클럽을 주관하는 출판사 쪽에서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잡기로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거기서 서면으로 <지팡이> 발간 계약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지팡이>를 내줄 유럽의 여러 출판사를 들려 볼 생각입니다. 저의 책을 내어주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고, 어떤 과정으로 책이 나오는지도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모든 곳의 독자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끝인가?”

    “일본으로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지팡이>의 내용이 워낙 예민했는데, 위험을 감수하고 책을 내준다고 했던 출판사 대표와 얘길 좀 나누고, 역시 독자들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일본이란 땅은… 특히 제게 의미가 남다르기도 하고요.”

    심 교수는 더 묻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건 <지팡이>가 완결된 후의 이야기이긴 합니다. 하지만 후반부 한두 개의 에피소드만 남겨놓은 상황이라…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하, 거 참.”

    “….”

    “할 말 없게 만드는군.”

    “…죄송합니다.”

    “어느 지도 교수가 제자가 그런 일정을 가지고 있다는데 발목을 잡을 수 있겠어요? 정말 너무하는군.”

    칭찬과 타박이 뒤섞인 말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한 번 더 말했다.

    “교수님의 일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약속 드릴 수 있습니다.”

    심 교수가 날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숱이 별로 남지 않은 머리를 짚었다.

    깊이 팬 주름 사이로 그의 고민이 엿보이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생각을 마친 듯 대답했다.

    “…하긴, 내 말 잘 들을 것 같아서 이 작가를 제자로 받아들인 건 아니니, 실망할 것도 없긴 하지.”

    뉘앙스로 보아하니, 허락을 해 준다는 뜻 같았다.

    “교수님….”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는 그만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냥 보내 줄 순 없지.”

    “네?”

    “내가 숙제를 하나 주겠어요. 지도 교수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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