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93화 (193/204)
  • 193회

    프랑스 리브레 출판사.

    해외 문학팀 팀장 에바 편집위원은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곧 올해 4분의 3분기 ‘리브레 클럽’ 시즌이었다.

    리브레 출판사의 독서클럽 프로그램인 ‘리브레 클럽’.

    작년 이상의 <내외인> 낭독이 큰 성공을 얻은 후, 현재 리브레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바쁜 건 장 스테판 사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리브레 출판사에서 점점 인정을 받고 있었다.

    동양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그런지, 그는 확실하게 직감했다.

    지금이 바로 이 리브레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할 타이밍이라는 걸.

    “팀장님. 올해 해외 문학 발간 서적 리스트 가져왔습니다.”

    장 사원이 에바 편집위원에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기합이 여간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어어, 고마워. 어디 보자….”

    에바 편집위원이 서류를 살펴봤다.

    작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리브레에서 낸 문학들.

    그중에서 이번 리브레 클럽의 도서를 골라야 했다.

    “가을 리브레 클럽은 진짜 중요한데 말야….”

    에바 편집위원이 중얼거렸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아직도 아날로그적 문화가 살아 있는 나라였다.

    가을이 되면 책 판매량이 오르는 식의.

    그러니 리브레도 도서를 고르는 일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에바 편집위원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 사원은 어떻게 생각해? 이 책들.”

    “다 좋긴 한데… ‘한 방’이 부족하긴 해요. 작품 자체로는 좋은데 토론을 할 만한 주제 의식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장 사원이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이미 어느 정도 내용 파악을 한 티가 났다.

    에바 편집위원은 그런 그가 기특하다는 듯, 픽 웃었다.

    “좀 더 알아 와 볼래?”

    “그렇게 할게요.”

    장 사원은 쿨하게 서류철을 가져갔다.

    귀찮아할 수도 있으련만, 그런 내색 같은 건 없었다.

    자리에 돌아온 장 사원은 서류를 한 번 더 살펴보았다.

    ‘확실히… 이거로는 부족하지. 작년 <내외인> 이후로 리브레 클럽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졌으니까. 국내 프랑스 작품은 워낙 팬층이 두터워서 할 만한 작품이 많다고 해도, 외국 작품은 아니야. 이견이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어야 해.’

    문제는… 올해는 그런 책을 내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이미 발간한 책 중에 대상작을 골라야 한다는 것.

    “…흠.”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장 사원.

    옆자리의 에바 편집위원에게 물었다.

    “팀장님.”

    “응?”

    “독자 투표를 받아 볼까요?”

    “독자 투표?”

    “네. 온라인으로 간단한 설문 조사를 하는 거죠. 대상작은 한 다섯 개 정도 1차적으로 뽑고, 혹시 모르니 기타란도 만들어 두고요.”

    에바 편집위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IT팀에 협조 요청해 봐. 난 그럼 마리옹 편집장님한테 얘길해 볼게. 일정이 급박하니 동시에 움직이자구.”

    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상황에서 진행할 수 있는 계획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실행을 해야 했다.

    두 사람은 각자 편집장실과 IT팀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며칠 내내 집필에 매달렸다.

    마치 글쓰기 자체에 중독된 사람처럼, 여간해선 작업실을 나서지도 않았다.

    하융의 마지막이 정해진 이상, 나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하융이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의 삶의 가치를 증명하게 할 것.

    3부는 하융이 죽기 몇 개월 전에서 시작한다.

    하융은 갑자기 모든 걸 버리고 만주로 떠난다.

    처음에는 자신이 왜 떠나고 싶은지를 모른다.

    그저 ‘떠나고 싶기에’ 떠났을 뿐이다.

    그리고 만주로 가는 기차에서 깨닫는다.

    자신이 조선 땅에서 작가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걸 이뤘기 때문이란 걸.

    성공에 취해 조선 땅에 있다간… 견디기 어려운 지루함만이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걸.

    그렇다면 왜 만주인가?

    그건 현실적인 한계였다.

    조선 땅을 떠나고 싶다면,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일본, 아니면 만주.

    세계로 나가고 싶다면 일본으로 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하융은 이미 ‘일본의 언어를 빼앗았다’.

    그에게 일본은 더 이상 흥미로운 땅이 아니었다.

    차라리 척박한 만주가, 바람 잘 날 없는 그의 마음을 달래 줄 것 같았다.

    살 곳을 찾아 이민을 가는 가난뱅이들과 노동자들.

    하융은 그 틈에 섞여 만주행 기차를 탔다.

    그리고 그 기차 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난다.

    그는 기방에서 몇 번 본 적 있던 영화배우였다.

    영화란 부르주아나 지식인들만이 누리는 문화였기에, 기차 안에서 그를 알아보는 이는 하융 뿐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하융을 알아보았다.

    그는 하융의 작품을 좋아한다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만주로 향하는 길고 긴 시간.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배우의 삶은 하융의 삶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고생도 모르고 자랐지만, ‘딴따라’ 생활을 자처한 탓에, 집안에서 절연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했다.

    조선 영화판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것도 모자라, 일본 영화에 등장할 기회를 얻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지루해졌다.

    돈은 좋았지만 명예는 무거웠고, 유명해질수록 자신을 집요하게 감시하는 총독부도 싫었다.

    ― 사람들은 모두 나를 광인(狂人)으로 생각했지만, 저는 다 버리고 왔습니다. 아, 물론 돈은 빼고요. 광인이긴 하나 우인(愚人)은 아니거든요.

    그 우아한 말투에서 배우의 태가 났다.

    이 척박한 만주 땅에 어울리지 않는 잘난 외모와 말투.

    하융은 그런 부조화가 재밌다고 느꼈고, 그가 마음에 들었다.

    ― 저와 비슷하군요.

    하융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주로 가고 있는 사정을 말했다.

    배우는 놀랍다는 듯 하융의 말을 들었다.

    ― 세상천지에 저와 똑같은 사람이 또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가 물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하융이 대답했다.

    ―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폭소를 터트렸다.

    기차 안 사람들이 다 깰 정도로 큰 소리로.

    ― 저도 마찬가집니다.

    두 사람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속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만주 여행의 동지를 찾았다는 것과 함께 예술적인 뭔가를 해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똑똑똑―

    그때였다.

    노크 소리에 이어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지훈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은 채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

    기분으로만 따지자면… 방금 전까지 만주행 기차에서 두 사람과 함께하다가, 순식간에 작업실로 끌려 온 것 같았다.

    “형, 여섯 시간째에요. 쉬셔야 해요.”

    꽤나 단호한 말투.

    나는 시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써야 할 이야기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내 몸이 먼저였다.

    “그래. 좀 쉬자. 저녁이나 먹을까?”

    “안 그래도 시켜 놨어요.”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켠 후에, 거실로 나갔다.

    지훈의 말처럼 식탁엔 백반이 차려져 있었다.

    집필에 에너지를 쏟을수록, 속이 편한 걸 먹어야 한다는 지훈의 고집 아닌 고집이었다.

    그러니 내가 무슨 반찬 투정을 하랴.

    그냥 주는 대로 먹어야지.

    “많이 썼어요?”

    “음… 적당히?”

    “연재분으로 치면, 하루에 몇 편이나 나오게 돼요?”

    “모르겠어. 그렇게는 안 따져 봐서. 기분상… 세 편 정도가 아닐까.”

    “와… 형, 손 빠르네요.”

    “하지만 매일같이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또 2부 끝나고 좀 쉬었던 것처럼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 오고.”

    “하지만 이번에는 안 쉬고 끝까지 달리실 거죠?”

    난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쉬고 싶지 않아.”

    지훈과 나는 그렇게 식사를 시작했다.

    속에 음식이 들어가니, 묘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긴장이 가득했던 몸이 풀린 것이다.

    “형, 보고할 거 좀 있는데. 지금 해도 돼요?”

    “어어. 그럼.”

    요즘 따로 브리핑 들을 시간도 없다.

    아침에 운동 다녀오고, 집필에 들어가면 저녁이 되어서야 끝나니까.

    이렇게 짬을 내서 일 처리를 해야 한다.

    “프랑스 리브레에서 연락이 왔어요.”

    “리브레?”

    “네. 이번 가을 리브레 클럽에 <지팡이> 낭독을 해도 되겠냐는데요?”

    “…그건 발간된 책만 가능할 텐데?”

    “아, 안 그래도 그 얘길 써 놨더라고요. 원래는 후보에 없었는데, 독자 투표에서 <지팡이>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나 봐요. 저번에 짧은 낭독회도 했는데, 정기적인 행사에서는 왜 불가능하냐고… 그런 의견들이 많았나 봐요.”

    “희한하네.”

    “뭐가요?”

    “리브레 클럽이 아무리 유명해졌다지만… 본질은 오프라인 독서 모임이야. 젊은층보다는 노년층이 많이 참여하지. 그런데 프랑스에는 종이책으로 <지팡이>가 나오지 않았잖아. 온라인 접근율이 높지 않은 리브레 클럽 회원들은 <지팡이>를 잘 모르지 않겠어?”

    그렇지 않은가.

    ‘낭독’이라고 하는 건 이미 보장된 팬들이 원하는 것인데.

    <지팡이>를 온라인으로 접한 젊은 층도 아니고, 아직 책도 받아 보지 못한 노년층이?

    그런데 지훈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 형은 대체 뭐지?’라는 얼굴로.

    “…왜 그렇게 봐?”

    “형은 진짜 사람 마음 알아주는 데는 재주가 없네요.”

    “뭐, 뭐?”

    사람 마음 알아주는 데 재주가 없다니.

    작가가 절대 들어서는 안 되는 말 아닌가.

    “형… 생각을 해 보세요. 프랑스에 형 팬이 적지 않을 거잖아요. 특히 <내외인> 낭독 덕분에 노년층에서 꽤 인기가 많을 거잖아요.”

    “하지만 그 독자들이 본 건 <내외인>이지 <지팡이>가 아니잖아.”

    그러자 지훈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형은 정말… 제가 말 안 해 주면 전혀 모를 겁니다.”

    “뭘?”

    “‘덕후’의 마음을.”

    “덕후의 마음…?”

    “그래요! <내외인>을 좋아하게 되면, 당연히 이상이란 작가에게 빠지게 되고, 이상이란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신작을 내긴 하는데 책으로는 안 보여 줘… 그럼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그러니 리브레 클럽이라는 기회를 이용하겠다는 거죠, 형의 프랑스 팬들이!”

    …그런 건가?

    지훈이 설명을 하니, 이제야 알 것 같긴 하다.

    뭔가의 ‘덕질’을 한다는 건… 그런 순애보가 항상 깔려 있는 모양이다.

    흠… 그 마음에 뭔가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지훈에게 물었다.

    “리브레 클럽은 아무래도 노년층에 집중되어 있겠지?”

    “그렇죠.”

    그럼 그들에게 맞는 원고를 보내 줘야겠군.

    “리브레에 이렇게 답장을 보내 줘.”

    “….”

    “리브레 클럽에 <지팡이>를 부디 써 달라고. 순수한 마음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다만, 3부가 끝나면 그걸로 클럽을 열어 줄 수 있느냐고 물어봐.”

    “3부면 완결이잖아요.”

    “응. 하지만 책을 낼 때까지는 기다릴 것 없고, 온라인에서 연재가 끝나면 말이야.”

    “그럼 가을은 넘기고, 겨울 리브레 클럽에서 진행해야겠네요.”

    “맞아. 그때까지는 완결이 날 것 같다고 넌지시 일러 주고. 노년층의 경우엔… 3부의 내용이 더 맞을 거야.”

    인간의 운명과 죽음에 관한 부분이니까.

    조금 기다리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독자층에 맞는 클럽을 여는 게 맞는 일이겠지.

    “음… 잘 전달해 볼게요. 어찌 됐건 팬들이 좋아할 거예요.”

    팬들의 마음이라.

    참 어렵고도 어렵다.

    작품을 쓰는 것보다, 내게는 더 미지의 세계다.

    “아, 그리고 내일이 <그 집> 미국 개봉일인 건 아시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네. 시사회도 끝났는데요. 시사회에 갔던 영화 평론가들 평이 괜찮아서, 소설 <그 집> 판매율도 소소하게 올랐대요. 아마 내일 제대로 개봉이 되면 더 오르겠죠.”

    “그럼 그 평들….”

    “이미 금홍 샘한테 번역 맡겨 놨습니다.”

    하고 지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녀석, 정말 참모로선 최고다.

    그때.

    디링― 하고 지훈의 폰이 울렸다.

    “어? 금홍 샘이다. 번역 다 끝났나 봐요. 보실래요?”

    지훈이 휴대폰으로 파일을 다운받더니, 화면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내 첫 번째 영화 시나리오에 대한 첫 영화평론이라.

    마음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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