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회
“저 교수 한번 되어 볼까 해요.”
지훈이 말했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지훈의 성격이라면… 혼자서 적잖은 고민을 하고 내린 결론이겠지.
“아버지랑은 얘기해 봤고?”
“네.”
허락하셔?
는 좀 이상하지.
지훈이도 이제 서른 다 되어 가는 성인인데.
“뭐라셔?”
“처음에는 싫어하셨어요. 교수 돈 못 번다고. 하지만 제가 그랬거든요. 전 돈을 벌고 싶다기보단 계속 문학이랑 붙어 있고 싶다고요.”
“….”
“그랬더니, 해 보라세요.”
지훈이 킬킬거렸다.
“어차피 임용 성공할 거란 보장도 없으니, 실패하면 그땐 군말 없이 집안일 하는 조건으로.”
“…상당히 멋진 결론인데?”
무조건 성공을 해야 한다는 부담보다는, 실패해도 뒷길이 있으니 안심하고 해 보라는 조언이였다.
그리고 지훈의 아버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무리하게 배수의 진을 치고 사는 사람보다, 적당히 안정적 ‘보험’이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다는 걸.
“그래서, 계획은?”
“일단 정미현 교수님이 특강 자리 하나 주셨어요. 인수대 학부 신입생 특강인데… 다음 주예요.”
“떨리겠네.”
“안 그래도 죽겠어요. 남 앞에 나서는 거 딱 질색인데.”
지훈은 원래 나서는 성격이 아니다.
나 역시 그런 편이지만… 차이는 있다.
나는 상황이 주어지면 그냥 덮어 놓고 해 버리는 반면.
지훈은 그런 상황 자체를 아예 안 만드는 편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별수 없다.
일단 해보는 수밖에.
“강의안 준비해서 연습 한번 해 보든가.”
“어? 도와주시게요?”
“어떻게 하는지 미리 봐줄 수는 있지.”
“좋아요. 그럼 모레까지 한번 준비해 볼게요.”
지훈이 벌써부터 긴장한 듯 말끝을 떨었다.
난 슬쩍 고개를 돌려 지훈을 봤다.
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니… 좀 걱정되는걸?
* * *
조용한 일요일 오후.
나는 칠판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칠판의 왼편부터, 3분의 2가 필기로 꽉 차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오른편의 3분의 1.
바로 3장의 내용이 들어갈 곳이었다.
나는 그 위에다가 썼다.
‘떠돌이’.
사실 ‘떠돌이’란 키워드를 잡은 건, 뚜렷한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단… 직감이었다.
내가 만약 하융이라면.
자신의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었다면.
나는 그 자리를 떠날 것 같았다.
그것이 새로운 목표를 얻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어디를 어떻게 떠돌지?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이건 내 삶의 경험이 적어서일지도 모른다.
전생이건 현생이건… 정착하고자 부단히 애를 써 왔으니.
갑자기 가진 걸 모두 버리고 후련하게 떠나 본 적이 없었다.
“흐음….”
칠판의 마지막 빈칸.
그것은… 결국 내가 살고픈 미래일지도 몰랐다.
생각의 방향을 바꿔야 했다.
과거를 되짚는 대신, 미래를 꿈꿀 때가 된 거지.
나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지?
먼저 문학.
항상 함께 할 금홍.
믿을 수 있는 동료들.
더 많은 인정과 더 많은 경험.
…추상적이군.
나는 피식 웃었다.
머리를 싸맨다고 해서 나올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
게다가 미국에 다녀온 후, 집필에 온 힘을 쏟았다.
그 덕에 비축분이 적지 않게 쌓였다.
일주일 정도는 쉬면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또… 2부 마감 파티도 있고 말이다.
그때였다.
디링―
하는 메일 알림 소리가 울렸다.
나는 피시로 가서 메일 수신자를 확인했다.
“오.”
조나단 감독의 메일이었다.
내용은 물론 영어로 쓰여 있었으나, 주말까지 금홍에게 번역을 맡기는 건 미안한 일.
인터넷 번역기를 돌려 보니 알아볼 정도의 수준으로 번역이 됐다.
이런 걸 볼 때마다, 참 좋은 세상이란 생각이 든다.
― 이상 작가님, 잘 계시죠? 지금 저의 사무실은 굉장히 바쁩니다. <그 집> 개봉이 하루 남았거든요. 방송국과 언론사를 뛰어다니며 홍보를 하고, 배우들도 토크쇼에 나가서 매력을 뽐내고 있어요.
저는 지금 무척이나 흥분이 됩니다. <그 집>이 미국 스릴러 영화의 한 획을 그을 것 같거든요. 아니, 저는 확신해요. 이건 오스카상을 받아도 부족하지 않을 작품이거든요!
자기 입으로 오스카상을 받을 것 같다니.
정말이지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본 티저 영상을 보면, 좀… 기대해도 좋을 것 같기도?
― 해외 판권 부분을 미국 쪽에 일임을 해 주신 대로,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 유통사와도 이미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고요. 미국에서 제일 먼저 개봉을 하고, 그다음이 한국입니다. 아마 다음 달 안엔 한국에서도 영화 <그 집>을 영화관에서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음 달.
시간이 정말 빠르구나.
영화는 소설 같지 않다.
훨씬 더 많은 제작진과 시간이 투여된다.
그 복잡한 과정이 이제야 다 끝났다니.
이거야말로 감개무량이 아닌가.
― 저는 이미 행운과 성공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작가님께서도 부디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 주시길.
메일은 거기까지였다.
요는, 곧 미국에서 <그 집>이 개봉되고, 그다음 순서가 한국이라는 것.
나의 첫 시나리오.
그 시나리오를 토대로 만든 영화.
조나단 감독의 저택 지하 작업실에서 그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세계는 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기에.
다만, 한국의 관객들이 내 영화를 어떻게 봐 줄지, 나로선 그 점이 관건이다.
* * *
금홍과 나는 우리 집 거실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바로 지훈의 강의 연습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다 쳐도, 금홍까지 부른 걸 보니 절박하긴 절박한 모양이었다.
지훈이 방에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금홍에게 슬쩍 물었다.
“바쁘지 않아요?”
“안 바쁜 건 아닌데… 너무 절박하게 부르길래, 어쩔 수 없었어요.”
금홍이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지간히도 우는소리를 하며 조른 모양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더니, 지훈이 정장을 입고 나왔다.
우리는 그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장까지? 대충 해.”
“맞아요. 연습인데요.”
“아니에요. 진짜 실전처럼 할 거거든요. 이거 받으세요.”
녀석은 마치 로봇처럼 삐걱대며 다가왔다.
그리고 금홍과 내게 각각 종이 뭉치를 줬다.
“…이게 뭔데?”
“강의 계획서요. 형도 써 봤잖아요.”
“…?”
“…안 써 봤어요?”
“안 써 봤는데?”
지훈이 나를 얄밉다는 듯 흘겨보았다.
하지만 안 써 본 게 사실인 걸 어떡하랴.
내 강의는 항상 라이브였다.
물론 주제 정도는 생각을 하고 가지만, 강의 자체는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다.
“학점 주는 강의도 아니고, 특강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나는 그 ‘강의 계획서’라는 것을 훑어보았다.
“…이게 다 뭐야?”
‘문학이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서 ‘근현대 문학의 흐름’이라는 거창한 제목과, 그 아래 나열된 시대별 한국 문학의 흐름까지.
“너 특강 몇 시간인데?”
“한 시간 반이요.”
한 시간 반이면….
‘문학은 무엇인가’만 설명해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내용이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아요?”
금홍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 보다.
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학이 뭔지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그 예를 들어야 할 거고, 그러려면 한국 문학에서 그 예를 찾아야 할 거고, 이왕 그렇게 하는 김에 근현대 문학을 한번 쫙 훑어서 그 개념을 공고히 구축하자… 뭐, 이런 거죠.”
지훈이 주절주절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뭐, 의도는 이해를 한다만….”
지훈의 눈은 열의와 긴장으로 불타고 있었다.
금홍과 나는 서로를 바라봤다.
우리는 아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였다.
‘어차피 말해 봤자 안 듣겠지?’라고.
“어, 그래. 그럼 해 보자. 한 시간 반이라고 했지? 시작!”
“어어, 벌써요? 저, 잠깐 마음의 준비를….”
“실전엔 마음의 준비 같은 거 할 시간도 없어! 그냥 해!”
“으아아… 알았어요!”
하더니 지훈이 정색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흠! 흠흠! 에… 저는 인수대학에서 문예창작과 학부를 나오고 인수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를 졸업했으며 지금 박사 과정에서 수학 중인 송지훈이고요… 작년에 평론으로 등단을 했고 여러 문학 매체에서 글을 싣고 있는 비평가입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학문 분야는 근현대 문학의 정치적 상징들인데요, 이게 뭐냐면….”
이런.
자기소개 듣다가 수업 끝나겠네.
“잠깐, 잠깐. 반장 선거 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학생에는 두 종류가 있지.”
혜경과 나의 지식에 따르면 말이다.
“첫째, 강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학생. 그런 학생은 이미 너에 대한 구글링을 끝내고 강의실에 앉아 있는 거니까 굳이 재방송해 줄 필요 없어.”
“…아하.”
“둘째, 강사에 대해 관심이 없는 학생. 그런 학생들은 강사의 이력에는 관심이 더 없어. 강의를 잘한다면 강의 내용에는 관심을 주겠지. 그러니까 구구절절하게 네 소개를 해 봤자 지루해하기만 할걸?”
“그럼 어떡해요? 강의 유인물에 적어서 줘야 하나?”
“이것만 말해도 돼. ‘안녕하세요. 오늘 특강을 맡은 비평가 송지훈입니다.’”
“…정말 그대로 돼요?”
“돼. 그리고 오히려 그편이 학생들 기억에 잘 남아. 그 뒤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너 계획서에 있는 거 다 말하려면 이 인사도 길다.”
“후… 어렵네요. 그럼 해 볼게요.”
지훈은 내가 시키는 대로 인사를 간략하게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신이 준비해 온 강의를 시작했다.
“…때문에,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선 예술의 역사와 기원을 살펴보는 게 좋습니다. 예술의 기원은 다 아시다시피 선사시대 벽화로 추정할 수 있는데요….”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다니.
고지식하기는.
하지만 그게 송지훈다워서 나쁘지 않았다.
금홍이 내게 슬쩍 속삭였다.
“내용이 알차긴 한데… 문학 얘긴 언제 나올까요?”
“아마 1시간 반 안엔 안 나오겠죠?”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됐다.
“컷. 수업 시간 끝났어.”
“네?! 말도 안 돼! 10퍼센트도 말 안 했는데요?”
지훈은 황당하다는 듯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정말 한 시간 반이 지난 걸 알고 입을 벌렸다.
지훈의 눈이 황망하게 변했다.
“형… 저 망하겠죠…?”
윽. 기죽었다.
“아냐, 아냐. 안 망해. 일단 앉아 봐.”
난 지훈을 달래가며 소파에 앉았다.
금홍도 재빨리 지훈에게 말했다.
“지훈 샘, 강의 자체는 진짜 재밌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설명하시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은데요?”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요?”
“어. 나도 동의해. 네가 지금 짜 온 강의 계획서는 한 시간 반짜리가 아니라 한 학기용이야.”
그러니까… 3시간짜리 수업 16번 정도 하면 커버 가능한 양이란 거다.
48시간짜리 수업을 한 시간 반 안에 하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나는 지훈에게 말했다.
“결국 선택과 집중이야. 선사시대 얘긴 재밌긴 한데 특강에서 할 만한 얘긴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일단 이건 빼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좀 더 현대적으로 풀어 보는 건 어때?”
지훈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이 이상 조언을 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결국 강의자는 지훈이고, 지훈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의미가 있으니까.
잠시 후, 지훈이 계획서의 한 곳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 그럼 이 얘기 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