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회
도마크 측과 일본 패널들이 돌아가기 하루 전날.
미쯔하루 편집장과 나는 모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사 온 과자와 차 세트를 내밀었다.
나도 질세라 그를 위해 준비한 한과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작가님이시군요.”
“편집장님을 잘 아니까요. 또, 언제 뵐지 모르니까요.”
“그렇군요. 잘 먹겠습니다.”
“저 역시 잘 먹겠습니다.”
우린 서로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토론이 잘 끝나서 그런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보다 그의 얼굴이 꽤 좋아 보였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무리해서 토론을 열기를 참 잘했다고요.”
“…그렇습니까.”
토론의 반응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먼저 히루키 작가.
그는 짹짹이에 이런 말을 남겼다.
‘부끄럽고 통쾌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니. 신기한 토론이었다.’
일본의 독자들은 ‘일본팀이 졌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나를 공격하기보다는… 일단은 일본 패널들 탓을 하는 것 같았다.
특히 정치학자, 소설가, 기자 세 사람을.
“도마크 내의 임원들 여론도 바뀌었거든요.”
임원들?
임원들이라면….
한때 내 에세이 <갈림길> 발매를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독자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내야 할 책을 내자는 이야기들이 슬슬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참… 잘된 일이군요.”
난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은, 도마크 출판사의 과오를 인정하고,
앞으로의 변화를 다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저희는 정치적 갈등을 만드는 책을 내길 피해 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출판사가 곤란해지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독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게 그들의 수준을 무시했던 것일지도 모르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린아이에게 달콤한 사탕을 쥐여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이는 언젠가 자랄 테고, 그 성장을 위해선 쓴소리도 필요하다.
“<지팡이>를 다 쓰시면, 일본에 꼭 들러 주십시오.”
“일본에를요?”
계약 때문인가?
“네. 저희 독자와의 만남을 꼭 해 주세요. 자리는 저희가 마련하겠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요청이 쇄도하고 있었거든요.”
예전이었으면 한 번쯤 망설였을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쉽게 오가긴 했지만, 내심 내 나름의 각오가 필요했으니까.
적어도 내 전생을 떠올리며 우울해하지 않겠다는 각오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다.
“그럼요, 가도록 하죠.”
* * *
2부의 마지막 ‘팀 이상’ 회의.
밤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서 열리게 됐다.
오후까지 금홍이 세미나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집으로 온 금홍이 구두를 벗으며 말했다.
피곤한 기색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회의는 다음에 할 걸 그랬어요. 피곤하지 않아요?”
“아니에요. 미루다 보면 한도 끝도 없어요. 시간 될 때 해 버리는 게 낫죠.”
주방에서 지훈이 음료를 세 병 들고 나왔다.
“금홍 샘, 하이! 발표 잘 했어요?”
“완전 망했어요. 말이 계속 꼬여서… 어휴, 말 안 할래요.”
금홍의 말에 지훈이 킬킬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계속 세미나에 불려 다닌다는 건, 대학원생들 중에서도 능력이 출중하다는 거다.
박사를 졸업해도 세미나에서 외면받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우리 세 사람은 거실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지훈이 감개무량하다는 듯 원고를 봤다.
“벌써 2부도 끝났네요. 시간 빨라요.”
“지금 종이책으로 몇 권이나 나왔었죠?”
“5권까지 나왔어요.”
금홍의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벌써 5권이나….”
지훈과 금홍이 새삼 놀랐다.
종이책에 관해선 신라문학에 일임한 상태이기에, 우리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있다.
25편을 1권으로 찍는다고 치면, 한 달이면 한 권이었다.
즉, 쉬지 않고 출판 공장이 돌아간다는 소리.
그만큼 <지팡이>가 사랑을 받는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래도 끝이 보여서 후련하겠어요, 혜경 샘.”
“후련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렇죠.”
우린 잠시 말이 없었다.
벌써부터 이런 말을 할 때는 아니지만, 나도 지훈도 금홍도… <지팡이>를 위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다 나름의 아쉬움이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번 점검해 보고, 앞으로의 전개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볼까 해요.”
“네. 말씀하세요, 형.”
“1부와 2부에서 다룬 내용들은 이래요. 역사가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안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또,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또, 작가가 가지고 있는 창작의 원천인 허무함에 대해서도 다뤘고요.”
“굵직굵직하네요.”
지훈이 말했다.
“대하소설만이 다룰 수 있는 주제의 깊이지. 장편 소설은 이것 중 하나만 다루는 것도 버거우니까.”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대하소설을 쓴다고 했을 땐, 지훈은 걱정이 많았다.
현재 문학계의 흐름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하지만 이제는 반대는커녕… <지팡이>의 제1 독자가 되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돼요?”
금홍이 물었다.
“하융에게 일본에서 제의가 와요. 일본에서, 일본인이 되어 작품 활동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죠. 그렇게만 되면 일본뿐만 아니라 서구세계에서도 인정을 받을 기회가 생기니까요.”
“아! 그거 에세이 <갈림길>에서도 나온 내용이잖아요!”
“네. 맞아요. 그걸 좀 활용해 볼까 해요.”
“반갑네요, 형. 저 그 부분 되게 좋아하거든요.”
“나도 잊고 있었는데… 지금쯤 써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음… 하융이 일본으로 가게 되나요?”
“아니요. 하융은 일본으로 가지 않아요.”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절하는 거죠. 일본인이 되는 것을. 대신, 자기가 이뤄 놓은 것을 모두 버려요.”
“…왜요?”
지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하융의 입장에선 더 높이 올라갈 곳이 없거든. 적을 잃은 장수는 싸울 곳도 잃어버리는 법이야. 장수라는 허울에 기대어 살 게 아니라면 관복을 벗어 버리는 게 낫지. 하융도 똑같아. 글로 하고 싶은 건 다 했고, 이제는….”
“….”
“세상을 좀 더 배울 차례야. 작가라는 허울을 잠시 내려놓고 떠돌이가 되는 거지. 뭐, 부랑자가 되지 않을 만큼의 돈도 있으니까.”
“…형,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전개.”
지훈이 놀랐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어디로 떠도는데요? 앞으로의 전개 말이에요.”
“아, 그게….”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하하…!”
내가 해맑게 이야기하자, 지훈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봤다.
“…뭐라고요?”
“떠나보내야겠다는 생각만 확실해. 앞으로 하융이 어떻게 될지는… 이제부터 진지하게 생각해볼까 해.”
이건 내 삶과도 연관이 있었다.
지금까지 <지팡이> 1, 2부는 모두 내 삶을 반영한 거울이었다.
그렇게 난 내 삶을 다 털어 버렸고, 3부는 일종의… 내 미래가 되겠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지난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시간이 걸렸다.
조금 더 내 욕망을 파악할 필요도 있을 테고.
금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해해요. 가지고 있던 걸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날 보고 싱긋 웃어 주었다.
역시. 금홍은 날 이해해 줄 줄 알았다.
그녀 역시 자기 기반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번역’이라는 일에 갑자기 뛰어들었으니.
“뭐, 그럼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주세요. 비축분도 충분하니까요.”
“그래. 오늘은 원고에 대해서만 얘길 좀 해 보자.”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논의한 부분은… 역시나 경감의 속마음이었다.
“이 부분, 번역할 때 길을 잘 잡아야 할 것 같아요. 까딱 잘못하면 경감이 하융의 작품이 일제에 위협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출감을 시켜 준 것 같이 보이거든요.”
금홍이 해당 원고에 붉은 동그라미를 치며 말했다.
“그럼 그 부분은 명확하게 잘 살려 주세요. 경감은 하융의 작품을 보고 일종의 충격을 받은 거예요. 특히 이 사람은 예술의 ‘예’ 자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하융의 작품을 보고 예술이라는 게 뭔지 느낀 거죠. 난생처음 느낀 감정이니 혼란스러움도 있었을 테고요. 경감으로서의 자아와 예술 소비자로서의 자아가 맞부딪치다가 결국 후자가 이기게 됐다는걸, 잘 표현해 주셨으면 해요. 저도 그 부분은 더 선명하게 수정을 좀 해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금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를 했다.
“그럼 이 경감과 하융은 어떤 우정 같은 걸 나눈 셈이기도 하겠네요.”
지훈이 말했다.
나로선 생각해 본 적 없는 지점이었다.
“우정?”
“네. 꼭 친구가 되어야만 우정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생겨나는 교감, 저는 그게 우정이라고 생각해요. 딱히 서로에게 호감이 없어도… 교감만으로 가능한, 그런 특별한 관계.”
“…말 되네.”
지훈의 말처럼, 경감과 하융이 나눈 것은 한 마디로 ‘교감’이니.
“그럼 하융의 소설은….”
“교감의 매개체가 되는 거죠.”
“그 내용, 평론으로 써도 괜찮겠다.”
“완결만 나 봐요. <지팡이>로 박사 논문도 쓸 수 있을걸요?”
그 말에 우리는 웃었다.
뭐,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박사 논문을 쓸 수 있는 문학 작품.
그것은 한때 유행한 작품으로는 부족하다.
학계와 문단에서 충분히 인정을 받은 작품만이, ‘박사’라는 학위를 줄 수 있는 토대가 되니까.
그렇게 몇 가지 이야기를 마친 후, 회의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미 막차는 끊겨 버렸고, 결국 지훈과 내가 차로 금홍을 태워다 주기로 했다.
금홍은 택시를 타도 된다고 했지만, 다 늦은 새벽에 혼자 택시를 태워 보내는 것도 좀….
그렇게 한국외대를 향해 지훈은 차를 몰았다.
나는 금홍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혜경 샘. 이번에도 파티해요? 1부 끝났을 땐 했잖아요.”
“어… 그런 건 생각 못 했는데요. 여러분들이 원하면 하죠.”
“전 원합니다.”
지훈이 득달같이 말했다.
“저도요.”
금홍도 빼지 않았고.
이제 남은 건 피터 한 교수인데….
“그럼 저까지 찬성했다고 치고 다수결로 결정해 버립시다. 파티 열 테니 피터 한 교수님께서도 필참하셔야 한다고 전해 주세요.”
내 말에 두 사람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까탈스럽고 분위기 휘어잡는 걸 좋아하는 피터 한.
아마 내 말을 전달받으면 꽤나 황당해할 거다.
그리고 툴툴대면서 음식을 들고 오겠지.
“아, 다 왔다. 저기 내려 주시면 돼요.”
금홍이 대한외대 정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훈은 부드럽게 그 앞에 주차를 했다.
“감사해요, 두 분 다.”
“뭘요. 굿나잇.”
지훈이 손을 살살 흔들어 인사를 했다.
“파티 일정 나오면 알려 줘요.”
“그럼요. 잘 가요.”
나는 금홍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맘 같아선 기숙사 앞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금홍이 간 후, 나는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피곤하다. 빨리 가자.”
“넵. 아, 형. 저 할 말 있어요.”
지훈이 다시 차를 슬슬 돌리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그래서 나도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뭔데?”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저, 교수 한번 되어 볼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