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78화 (178/204)
  • 178회

    탁, 탁, 탁, 탁.

    드러머가 스틱을 네 번 부딪쳤다.

    그러자 베이스가 음을 한 번 길게 끌었고, 이어서 기타가 멜로디를 잡았다.

    몽환적이고, 흔들리는 것 같은 음악이었다.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느낌.

    “음―”

    보컬이 낮게 허밍했다.

    그리고 나른한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금홍이 곁에서 그 뜻을 즉각 번역해 주었다.

    “너는 신의 아이였어― 하지만 타락하고 말았지― 날 보고 웃음 짓네― 천사를 흉내 내며― 너의 뒤를 따라 걸어 보았지― 아마 너는 알고 있었을 거야― 네가 손가락만 움직여도― 나는 무릎을 꿇을 소녀였다는 걸― 음― 그래, 너는 신의 아이였어….”

    <그 집>의 내용을 은유적으로 옮긴 가사였다.

    OST로만 남기기는 아쉬울 정도로 좋은 음악.

    나는 문득 장하늘과 가사를 붙였던 <은은>을 기억했다.

    금홍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을 때, 그녀를 생각하며 지었던 시였다.

    그게 노래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이윽고 밴드의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여타의 안내도 없이, 무대 뒤 스크린에 영상이 하나 떴다.

    바로, <그 집>의 티저 영상이었다.

    방금 전까지 밴드가 불렀던 노래.

    그 노래가 다시금 흘러나오며… 우리의 주인공 어린 ‘수지’가 등장했다.

    그녀가 올려다보는 무채색의 집.

    그 집 지붕에서 날아가는 까마귀들.

    까마귀 한 마리가 카메라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흰 글자로 타이틀이 떴다.

    멋진 시작이었다.

    그 뒤로, 재빠르게 화면들이 전환되었다.

    어린 양오빠가 그리스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장면.

    그는 수지에게 묻는다.

    ― 어때?

    라고.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수지의 실험들.

    양부모의 이유 모를 냉대와 그들의 불안.

    영상은 시종 우울하게 흘러가고, 수지가 밤늦게 집에 돌아온 장면으로 넘어갔다.

    수지가 집 문을 열었을 때, 지금까진 본 적 없는 부모의 환한 웃음을 본다.

    그들은 수지를 보며 놀란 듯 표정을 굳힌다.

    그리고 그 순간.

    집의 뒷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양오빠가 무표정한 얼굴을 짓고 들어온다.

    당장에라도 무슨 일을 벌일 듯이.

    이런 방식으로 약 삼 분가량 영상이 이어졌다.

    영화에서 궁금증을 자아낼 만한 최고의 부분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확실히, 조나단 감독은 감각이 좋았다.

    영상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오싹오싹한 티저네요. 개봉을 하면, 다들 잊지 말고 영화관으로 달려가자고요! 알았죠?”

    파멜라의 말에 긍정의 함성이 튀어나왔다.

    티저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자, 이제 남은 건 파티뿐이에요. 저기 맥주 차가 보이죠? 1달러씩 내고 맥주와 나쵸를 사 먹어요. 그리고… 여기 우리 작가님은, <그 집>의 사인본을 추첨해서 나눠 드려야죠?”

    나는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좋죠. 다들 어서 맥주를 사드세요. 추첨을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 드릴 테니. 무대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요.”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정말로 맥주 차를 향해 갔다.

    내가 아직 무대에 있건 없건 말이다.

    확실히, 이들에게 북콘서트는 일종의 축제였다.

    우리는 그런 무관심 아닌 무관심 속에서 추첨을 했고, 스무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즐겁게 내 사인본 <그 집>을 받아 가며, 나와 사진을 찍거나 악수를 했다.

    그렇게, 북콘서트는 정말이지 즐겁게 끝났다.

    무대를 내려왔을 때였다.

    크리스와 숀이 우리를 맞이했다.

    “고생 많았어요. 성공적인 콘서트네요.”

    크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악수를 건넸다.

    이제 남은 건… 숀이었다.

    그는 머쓱한 듯 뭐라고 우물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난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내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순문학 작가들은 좀 구리다고 생각했는데… 아, 문학 박사들도요.”

    그 말에 크리스가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좀 다른 것 같네요.”

    “당신이 달라진 걸지도요.”

    내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누들 쪽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정도 인사를 마쳤을 즈음, 저쪽에서 대기하던 지훈이 설렁설렁 다가왔다.

    언제 가져온 건지 맥주도 한 컵 들고.

    난 녀석이 오기 전에 얼른 금홍에게 말했다.

    “금홍 샘, <은은> 기억해요?”

    “<은은>이요? 그럼요. 샘이 작사한 노래잖아요. 장하늘이 부르고.”

    “그거 금홍 샘 생각하면서 지은 가산데.”

    금홍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날 봤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지훈이 타이밍 좋게 내 앞까지 왔다.

    “형, 진짜 무대 체질이던데요? 가수가 콘서트 때 토크 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 고맙다.”

    “근데 금홍 샘은 왜 저래요?”

    지훈이 멍한 금홍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금홍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니에요.”

    “이상하네.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귀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것 같아요.”

    금홍은 그렇게 말하고선 쏙 가 버렸다.

    맥주 차로 가는 걸 보면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바로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곳의 독자들과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마치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그렇게,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우리는 시애틀에서의 마지막 날을 즐겼다.

    * * *

    시애틀 공항 입구 앞.

    “…다들 갑시다.”

    택시 안에서, 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금홍과 지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모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어제 새벽 북콘서트에서 신나게 ‘달리는’ 바람에, 하나같이 몰골들이 엉망이었다.

    우리는 택시에서 내려 공항으로 들어갔다.

    발권을 하고 게이트로 나서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자 몇이 따라붙었다.

    한국에서만큼 많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충분히 귀찮을 정도의 수.

    뭐, 그래도 처음 시애틀에 왔을 땐.

    공항에 단 한 명의 기자도 없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것도 발전은 발전인가.

    어쨌건 우리는 도망치듯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어휴 피곤해….”

    십 미터도 뛰지 않았는데 지훈이 죽는 소리를 했다.

    “죽으면 안 돼요. 비행기에서 잘 수 있어요. 지훈 샘.”

    금홍이 결연하게 말하자, 지훈도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면세점을 둘러 볼 여유도 없었다.

    그저 벤치에서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탑승 방송을 듣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줄을 섰다.

    나와 금홍이 창가 쪽 좌석에 나란히 앉고, 지훈은 앞자리 창가에 앉았다.

    “어휴, 전 지금부터 잘래요.”

    지훈이 말하자 금홍도 이어폰을 끼며 말했다.

    “저도요… 기절할 것 같아요.”

    예, 예, 어련들 하시겠습니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이륙이 시작됐다.

    20세기 사람으로서 이 큰 쇳덩이가 하늘을 나는 건, 여전히 신기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잠이 더 먼저였다.

    이륙이 끝나고 기체에도 평안이 찾아왔다.

    지훈은 이미 곯아떨어진 듯했고, 어느새 금홍도 음악을 들으며 자고 있었다.

    담요라도 덮어 줄까 싶어 금홍을 살피는데, 쥐고 있는 휴대폰에 플레이어 목록이 떠 있었다.

    재생되고 있는 노래는 장하늘의 <은은>.

    나는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선글라스 밑으로 보이는 금홍의 뺨이 유난히 하얬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후, 우리를 맞이한 건… 고향의 공기도 기자들도 아닌, 배고픔이었다.

    거의 열 시간을 기내에서 내린 잔 탓이었다.

    다크서클을 가리려던 선글라스는, 이제 퉁퉁 부은 눈을 가리기 위해 써야 했다.

    헤롱헤롱한 채로 입국장을 나온 우리의 첫 마디.

    “…배고파.”

    “…저도요, 형.”

    그리고 묵묵하게 우릴 보던 금홍.

    2층에 있는 브랜드 분식집을 가리켰다.

    “라면 먹고 가죠.”

    이 얼마나 멋진 말이던가.

    우리는 대답 대신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라면의 신도들마냥 계단을 올랐다.

    라면 세 개, 떡볶이 이 인분, 순대 이 인분.

    그 얼큰하고 뜨거우며 기름진 음식들은… 지난 며칠 서양식에 절여진 위를 달래 줬다.

    “으하…!”

    라면을 먹던 지훈이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비로소 말할 기운이 난 모양이었다.

    “난 이제야 형이 이해가 돼요.”

    “뭐가?”

    “형 프랑스 갔다 왔을 때, 첫 끼가 국밥이었잖아요. 난 이 형이 없던 국뽕이 생긴 줄 알았지.”

    금홍이 킥킥 웃었다.

    난 좀 부끄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국뽕이 아니야. 생존이지.”

    “인정, 인정. 이젠 이해한다니까요.”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라면 그릇을 뚝딱 비웠다.

    “…이제야 한국에 온 기분이 나네요.”

    금홍도 여유를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짧고 굵은 여정이었죠.”

    내 말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차게 썼어요. 역시 형 따라가길 잘했다니까. 조나단 감독 집에서 갔던 게임룸은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야.”

    “성공해서 너도 집에 하나 들여라.”

    아무튼 그런 시답잖은 얘기를 하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왔으니 지난 며칠 동안 집중했던 <그 집>을 잊고, 이제 다시 <지팡이>에 매진해야 한단 생각.

    내 마음을 알았는지, 금홍이 귀신같은 질문을 던졌다.

    “혜경 샘, <지팡이>는 바로 이어 쓰실 거죠?”

    “그럼요. 내일부터 또 집필 들어갈 거예요.”

    “내용 궁금한데… 좀 알려 줄 수 있어요?”

    지훈이 물었다.

    “그래, 좋지. 일단 자리를 좀 옮기자.”

    우리는 분식집 옆 별벅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후식 겸 커피를 마시며 얘길 나눴다.

    “하융은 문단의 스타가 되지만 허무감에 빠져요. 화려한 인터뷰들과 평론가들의 칭찬 앞에서는 잠시 행복하지만, 혼자 집에 돌아오면… 해야 할 일을 놓고 있단 생각이 들게 되는 거죠.”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게…?”

    금홍이 물었다.

    “네. 스승이 남기고 간 질문의 답을 찾는 일이요.”

    “그들의 언어를 빼앗아라?”

    지훈이 받아쳤다.

    “그래. 정확히 기억하고 있네.”

    “임팩트가 좀 강해야죠.”

    “아무튼, 그 말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다가…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어서 하융은 ‘심’을 찾아가.”

    “‘심’이요…?”

    금홍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그래, 심.

    금홍을 모델로 만든 그 캐릭터.

    “그래요. 뭐, 답답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긴 했어요. 그 사이 ‘심’은 학교의 교사가 되어 있었어요. 하융은 말만 빙빙 돌리다가 이렇게 말해요. 누군가의 언어를 빼앗아야 할 것 같다고. ‘심’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은 성실하게 들어 주죠.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얘기해요. 마치 지금까지 쌓여 있던 앙금들을 털어 내듯.”

    “‘심’은 국어 교사가 된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어 교사예요. 그 지점이 정말 중요한데… 당시 조선어를 가르치면 여간 눈치를 받는 게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심’이 농담조로 이렇게 말해요.”

    “어떻게요, 형?”

    “나야말로 일본에게 내 언어를 빼앗긴 것 같다고. 특히 조선어를 써서 일제에 바칠 보고서를 써야 할 때 그런 기분이 든다고.”

    “흐음… ‘심’은 일본어를 모르나 보죠?”

    “여성이니까, 조선어를 써도 그러려니 했던 거지. 남자 교사였으면 어떻게든 일본어를 써야 했을 거야.”

    “그것참… 여러 가지 요소들이 얽혀 있네요.”

    “식민지잖아요. 온갖 모순들이 가득한.”

    두 사람은 신기한 정보를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심’의 그 말을 들은 순간 하융은 알게 돼요.”

    “뭘요?”

    “스승이 남긴 말의 의미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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