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77화 (177/204)

177회

“자, 북콘서트가 세 시간 정도 남았죠? 그럼 이제 슬슬 콘서트 계획을 세워 볼까요?”

파멜라가 말했다.

행사를 세 시간 남기고 계획을 세운다고?

‘누들’ 다운 즉흥성이었지만, 무모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어떤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마도 그들 나름의 계획이 있으리라.

다만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상’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궁금해서겠지.

“작가님, 알고 보니 문학 박사님이시던데요. 일단 잠 깨는 껌이라도 비치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숀이 아닌 척 빈정거리며 말했다.

파멜라는 그만하라는 듯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고, 크리스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저 친구, 학벌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크리스의 공격에 숀이 얼굴을 구겼다.

거참 얼굴에 생각이 다 보이는 친구였다.

다들 알아서 망신을 주니 괜히 나서고 싶진 않았다.

“아직 박사님은 아니에요. 졸업을 못 했으니까요. 아쉽게도 껌은 필요 없겠네요.”

나는 일단 웃으며 그의 말을 넘겨 버렸다.

그리고 북콘서트에 대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가볍게 가고 싶어요.”

“오, 그건 저희도 동의하는 바예요.”

파멜라가 내 의견을 반겼다.

“생각이 같다니 다행이네요. 북콘서트의 주체는 뭐니 뭐니 해도 책이니까요. 제가 쓴 건 스릴러라는 장르 소설이고, 그에 맞춰 북콘서트도 구성을 해야겠죠.”

“흐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크리스가 말했다.

“뭘 말이죠?”

“저흰, 그러니까… 숀이 말했던 것처럼 일단은 순문학을 하신 문학 전공자시니까요. 아, 오해는 말고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졸업장까지 따 버린 문학 박사거든요.”

크리스의 학벌이 높았구나.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분위기가 다소 다른 거였어.

학벌이 사람의 어떤 것을 결정하진 않는다.

다만 출판사와 같은 특수한 공간에서는 아무래도 티가 나기 마련이지.

그래서 저 숀이란 친구의 콤플렉스를 건드렸을 테고.

난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서 저흰 작가님께서 ‘문학 강의’를 하실까 봐 걱정을 했거든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귀여운 발상이 아닌가.

내 웃음에 다들 조금씩 당황한 것 같았다.

심지어 통역을 하는 금홍조차도.

나는 겨우 웃음을 삼키고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

“전 여기 놀러 왔는데요. 관객분들과 <그 집>을 가지고 실컷 놀다 갈 거예요.”

“오.”

숀이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바로 아닌 척 입을 막았다.

그 탄성을 이어받은 건 파멜라였다.

“멋진 ‘쇼’가 될 것 같은데요?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름의 자기소개는 여기서 끝내도 될 것 같았다.

이번엔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자, 그럼 여러분들이 생각한 기획안을 좀 들어 봐도 될까요?”

세 사람은 당황한 듯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역시 파멜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떻게 아셨어요? 저희 나름의 기획안이 있다는 걸.”

“아무리 누들이라도 그런 것 하나 없이 저를 기다리실 리가 없죠.”

“하하… 못 당하겠네요.”

크리스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작가님이 부담스러우실까 봐… 이야기를 나눠 보고 저희 쪽 의견을 말씀드리려 했거든요.”

“뭐, 그럼 기획안을 볼 수 있는 자격은 통과가 된 건가요?”

내 말에 파멜라가 고개를 과격하게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숀, 가서 좀 가져올래?”

“내가…?”

“우린 앉아 있고 넌 지금 삐딱하게 서 있으니까.”

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누들의 실세는 어디까지나 파멜라였다.

숀은 군말 없이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파멜라는 그 종이를 받아 내게 내밀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그 말은 겸손이었다.

그 기획안에는 별의별 게 다 있었다.

작가와의 대화, 질의응답은 물론이고, 영화 <그 집>의 OST를 녹음한 밴드의 공연, 심지어 영화의 티저를 ‘최초 공개’ 한다고 적혀 있었으니.

나는 놀라서 물었다.

“밴드 공연과 티저 공개는 뭐예요?”

“저희가 이런 준비도 없이 북콘서트를 하자고 했을까 봐요? 조나단 감독님께 연락을 해서 따로 부탁을 드렸죠. 티저는 아직 정식으로 나온 게 없어서, 감독님께서 짧게 편집을 해 주셨어요.”

“하지만 감독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는데요.”

“하하… 나름의 서프라이즈랄까요? 어떠세요?”

어떻긴.

내가 참여한 영화의 음악과 티저를 최초로 만날 수 있다는데.

“정말 좋아요. 당장 시작하고 싶어요.”

* * *

북콘서트는 장소까지 누들다웠다.

바로 누들 본사 근처, 언제 공사가 멈춘 건지 알 수 없는 공터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버려진 땅’.

하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에… 특별한 멋이 있었다.

정제된 것은 깔끔하다.

동시에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렇게 도심 속의 자연스러운 공간은… 깔끔하진 못해도 편안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찾아왔다.

나는 공터 구석에서 파멜라에게 물었다.

“참여 인원은 총 몇 명인가요?”

그러자 파멜라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되물었다.

“당연히 무제한이죠.”

“네?”

“좋잖아요. 마침 LJ 칼럼에 피터 한이 우리 북콘서트를 광고까지 해 줬는데. 이 공터가 터져버릴 정도로 사람이 많이 왔으니… 로큰롤 스타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걸요?”

로큰롤 스타.

파멜라의 그 말은 괜한 비유가 아니긴 했다.

일반적인 북콘서트와는 달리 관객 의자도 없었다.

무대와 사람들, 그리고 밴드 공연을 위한 악기만 보면, 정말로 로큰롤 공연장 같은 느낌이 났다.

해가 슬슬 져가고 있었다.

펑,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조명이 켜지자.

“와… 분위기 끝내주네요.”

지훈이 가만히 읊조렸다.

“나가시죠.”

크리스가 시계를 확인하곤 말했다.

나는 금홍과 파멜라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우아한 박수 대신.

“와아아아아아!!!”

하는 함성부터 쏟아졌다.

내가 놀라서 파멜라를 보자, 이 정도는 기본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관객들은 대부분 젊은 층이었다.

딱 봐도 누들의 책을 좋아할 것 같은 힙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가득 채운 공터의 끝엔, 문화부 기자들이 미친 듯이 날 찍어 대고 있었다.

“자자, 다들 좀 조용히 해 보자고요. 작가님의 인사를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파멜라가 능숙하게 관객들의 소란을 잠재웠다.

관객들은 그제야 좀 얌전해지며 날 보았다.

나는 ‘한국식으로’ 허리를 살짝 숙였다.

“이상입니다. 멋진 분들이 많이 오셨군요.”

내 ‘동양식 인사’에 그제야 박수가 쏟아졌다.

파멜라는 능숙하게 북콘서트를 진행했다.

대부분의 북콘서트는 책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하지만.

“우리는 그런 지루한 거 필요 없죠? 바로 작가님이 입을 열도록 하자고요!”

능구렁이 같지만 시원스러운 진행.

어느새 순서는 질의응답 시간으로 넘어가 버렸다.

관객들은 그런 누들 식의 행사에 이미 익숙한 듯, 너도나도 손을 들거나 질문을 외쳤다.

이건 정말… 미국이 아니면 겪어 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난 직접 질문자를 골랐다.

가장 절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를 말이다.

그녀는 유난히 키가 작아서,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저도 스릴러 작가가 되고 싶어요! 비법을 알려 주세요!”

그 질문에 나는 푸핫, 하고 웃고 말았다.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북콘서트의 질문은… 하나같이 얌전하고 우아한 것들이었다.

아무리 ‘콘서트’라지만, ‘북’이 붙는 이상 분위기는 경직되니까.

그런데 ‘비법’이라니.

이토록 날것의 질문이 날아올 줄이야.

내가 웃자, 소녀는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웃지 마세요! 전 진심이라고요!”

내 심성이 못된 것인지, 그 말을 들으니 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더 웃으면 소녀가 상처를 받을 테니, 난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마이크를 들었다.

“실용적인 답안을 알고 싶으면 서점의 수많은 작법서를 뒤져 보세요. 다만 미래의 스릴러 작가에게 한마디 하자면, 읽는 이의 즐거움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

“장르 소설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즐거워야죠. 안 그래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별안간 소녀가 외쳤다.

이런 연예인이나 받을 법한 고백은 처음이었기에, 난 또 웃고 말았다.

나만 웃었겠나, 관객들 모두 낄낄거렸다.

“고백을 받았으니 답을 줘야죠, 작가님.”

파멜라가 짓궂게 물었다.

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미안해요. 고백을 받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아무리 장난이어도, 금홍이 옆에 있는데 그럴 순 없었다.

뭐, 금홍도 성격상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지만.

“오호~ 나쁜 남자네요. 자, 그럼 또 다른 질문 있을까요?”

파멜라의 말에 누군가가 잽싸게 손을 들었다.

뿔테 안경을 낀 히스패닉계 남자였다.

“<지팡이>를 다 쓰고 스릴러 소설을 또 쓸 건가요?!”

그건 참, 예리한 질문이었다.

내게 스릴러는… 일종의 외도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미국 시장을 효율적으로 뚫을 방법.

나름대로 미국 시장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지금, 나 역시 내 스릴러 소설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야겠지.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어요.”

난 정말 솔직히 말했다.

내가 순문학, 그것도 대하소설인 <지팡이>를 쓰는 중이라 그런지… 그들의 얼굴에 내심 실망이 스쳤다.

“다들 알다시피, 저는 스릴러 소설로 데뷔한 작가가 아니에요. 지금 이렇게 자유롭고 멋진 곳에서 북콘서트를 하고 있지만… 지금 유럽에서는 제 소설로 품위 넘치는 낭독회를 하고, 일본에서는 제 소설을 두고 정치적으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죠.”

“….”

“지금 이런 곳에 제가 서 있는 것도, 그들에겐 굉장히 놀랍고 어색한 일일 거예요.”

“….”

“미국이건 유럽이건 일본이건 한국이건… 어느 쪽의 풍경을 맞거나 틀리다고 할 수 없어요. 세상일은 대부분 상대적이니까요. 그리고 그건 앞으로의 제 작품도 마찬가지겠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실망감은 나에 대한 이해로 서서히 바뀌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 미래는 한 마디로 ‘미스터리’예요.”

“미스터리요?”

파멜라가 되물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미스터리’란 단어에 반응했겠지.

‘미스터리’는 장르 소설의 중요한 소재니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이토록 ‘미스터리’한 걸 보니… 앞으로 장르 소설을 놓지 못할 가능성이 크겠죠?”

결국, 나는 완곡하게 표현한 셈이었다.

앞으로도 스릴러를 쓸 ‘가능성’이 있다고.

그 말을 이해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귀가 아플 정도의 외침들.

이들의 환호는 비단 날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내 팬이라기보단, 누들의 팬에 가까우니까.

다만 이 멋진 곳에서 기쁜 소식을 즐길 뿐.

마치 축제를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의 자유롭고 부담 없는 태도는, 내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문학을 즐긴다’는 것의 다른 차원을 열어 줬으니.

몇 개의 질의응답이 오고 갔다.

그리고 밤이 충분히 깊어졌을 때였다.

파멜라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자, 질문은 충분히 받았어요. 이제 손은 그만 들라고요. 현대인들인 만큼, 나중에 메일을 이용하도록 해요.”

파멜라의 구박 아닌 구박에 사람들이 손을 내렸다.

다들 아쉬워하는 얼굴이었지만, 파멜라는 사람들을 이끄는 묘한 힘이 있었다.

“이제 북콘서트의 진가를 보여 줄 차례에요. 이번에 <그 집>이 영화로 개봉하는 거 잘 알죠? 그 OST를 녹음한 밴드를 모셔 보죠!”

또한번 함성이 쏟아졌다.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던 건지, 편안한 차림의 네 남자가 무대에 올랐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악기를 튜닝했다.

그리고.

탁, 탁, 탁, 탁.

드럼이 스틱을 네 번 두드리자, <그 집>의 OST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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