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171화 (171/204)
  • 171회

    미국행 당일.

    우리 세 사람은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에는 사람이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사실 느긋하게 가 보려 했건만, 여기저기 기자들이 포진해 있어 그것도 쉽지 않다.

    인터뷰를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해도 소용이 없다.

    녹음기를 들이대는 건 예삿일이요, 사진 찍히는 건 이미 포기했다.

    따돌릴 방법은 하나, 도망치는 것뿐.

    얼른 발권을 한 후.

    우리는 출국장으로 나가 버렸다.

    “어휴… 죄짓고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공항에 올 때마다 정신이 없는 것 같지 않아요?”

    금홍도 한 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비행이… 일본이었지.

    그때도 조나단 감독을 만나러 갔었는데.

    “그땐 우리 송지훈 매니저가 시놉시스 제본을 늦게 갖다 줘서 비행기 못 탈 뻔했죠.”

    내 말에 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흠! 흠…! 그땐 그렇게 차가 막힐 줄 몰랐다고요.”

    출국장으로 들어온 후엔 평화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각자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고, 별벅스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다들 새벽부터 준비하는 바람에 카페인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금홍 샘, 샘 꿈이 카페 내는 거 아니었어요?”

    지훈이 물었다.

    이제는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금홍이 음― 하고 대답을 아꼈다.

    혹시 금홍은 아직 바리스타를 꿈꾸는 건가?

    “번역일보다 바리스타가 더 나을 것 같아요?”

    사실 금홍이 무슨 일을 하건 나야 큰 상관은 없다.

    본인이 행복하고, 법에 저촉되지만 않는다면야.

    다만 대학원까지 간 게 아깝긴 하니까.

    “둘 다 좋아요. 하지만 아무래도 발전 가능성이랄까… 그런 건 번역 쪽이 더 크긴 하죠. 하지만 커피도 놓고 싶진 않고, 손 놀리기 싫어서라도 주말에 계속 카페 일 하는 것도 있어요.”

    하긴, 금홍의 수입을 생각하면… 굳이 알바를 할 필요는 없다.

    그 시간에 다른 번역 알바를 해도 돈을 몇 배는 더 벌 수 있을 테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금홍은 대단히 현실적인 타입의 사람이었다.

    이른 나이에 문학을 포기한 것만 봐도 그렇지.

    하지만 그런 그녀도 좀 변한 것 같다.

    돈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좋다’는 이유만으로 바리스타 일을 계속하는 걸 보면.

    “여유가 생겼네요, 금홍 샘.”

    나는 금홍에게 말했다.

    금홍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불안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졌고요. 뭐, 나중에 소소하게 카페 하면서 번역도 하고 싶어요.”

    “워~ 낭만적이네요.”

    지훈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저 원래 낭만적이거든요? 그럼 지훈 샘은?”

    “네?”

    “지훈 샘은 미래 계획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 어떻게 돼요?”

    그러게.

    마침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도 궁금하다. 너 비평만 계속할 순 없잖아. 현실적으로.”

    이 ‘현실적’이란 경제적인 걸 의미했다.

    순문학판 글 값이 너무 헐값이라, 비평만으로는 절대 먹고 살지 못한다.

    물론 내 매니저 일을 해 주고 있긴 하지.

    원한다면 평생 같이할 마음도 있고.

    하지만… 그게 진짜 지훈이 바라는 삶일까 싶었다.

    지훈에겐 훨씬 더 큰 잠재력이 있는데.

    막상 몰아붙이니, 지훈은 입을 싹 다물어 버렸다.

    지훈이 좀 이런 면이 있긴 하다.

    신나게 놀다가도, 저에게 관심이 집중되면… 소라게처럼 쏙 숨어 버리는.

    이럴 때 방법은 하나다.

    소라게 껍질을 토닥토닥 두드려 나오게 만들어야지.

    “네겐 선택지가 많은 거야. 네가 계속 매니저 일해 줘도 나한테는 땡큐고. 다만 다른 계획이 있냐, 이거지.”

    “저… 사실은 형….”

    사실은?

    “저… 박사 논문 써야 할지도 몰라요.”

    …박사 논문?

    나는 머리를 굴려 봤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지훈이 작년에 박사에 들어왔으니, 아직 논문 생각할 때는 아닌데?

    “벌써?”

    “…네. 아, 사실… 제 지도교수님이랑 얘길 좀 해 봤는데 저보고 임용 도전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임용이면… 교수 임용이요?”

    금홍이 놀라 물었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소식도 이런 희소식이 없었다.

    사실 교수 임용은 모든 대학원생의 꿈일 거다.

    특히 돈 벌 길이 막막한 인문대라면 더욱.

    하지만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교수는 하늘이 내려 준다고.

    그만큼 실력은 기본이고 운이 따라 줘야 한다.

    그리고 운 중에서 가장 큰 운이 ‘지도교수 운’.

    즉, 지도교수가 얼마나 그 학생을 밀어주느냐다.

    지훈은 이미 정미현 교수의 애제자.

    이런 경우, 학생 본인의 의지만 충분하면…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전에 가장 중요한 것.

    “너, 교수를 하고 싶어?”

    “그게 잘 모르겠어요.”

    지훈이 참으로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학생들 가르쳐 본 적도 없고… 또, 제가 아직 학생이라서 그런가 뭔가 실감이 안 나요. 강단에 선다는 게.”

    금홍과 나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금홍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물론 엄청난 기회처럼 느껴지겠지. 이 기회 안 잡으면 평생 후회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들 테고.”

    “…네. 딱 그 마음.”

    “다른 평론가들 생각하면 네가 지금 그런 고민하고 있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하지? 그래서 솔직하게 좋다 싫다 말도 못 하겠고.”

    “…넵.”

    “사치 아냐. 너 교수 안 해도 충분히 먹고 살아. 그러니까 여유를 가지고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 갈 수 있는 길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해도 되고.”

    지훈은 좀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형… 마음이 좀 놓이는 것 같아요. 주위 사람들한테 말도 못 했거든요. 동료 비평가들은 강의 자리 하나에 목을 매는데… 제가 이런 고민 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해요.”

    …그렇지, 사실 그게 현실이다.

    아마 지훈이 내 매니저 일을 하지 않았으면,

    그들과 다를 바 없이 교수를 꿈꿨겠지.

    문학가에게 경제적 안정감은 그 정도로 중요하니까.

    “부모님이랑 상의는 해봤어요?”

    이번에는 금홍이 물었다.

    보라, 저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물음을.

    “…해 봤죠.”

    “뭐라세요?”

    “아버지는 음… 아오! 그래요. 아버지도 문제예요. 저보고 계속 집안 사업 배우라는 거예요. 교수는 결국 명예직이라 돈 못 번다고. 사실 비평하는 것도 아버지 눈에는 취미 생활 정도로 보일 것으로요?”

    이쯤 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송지훈 이거 배부른 소리 하는구만, 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지훈이 집안에 가진 부담감을 생각하면… 고민이 되기도 할 거다.

    아무래도 나처럼 자유로운 상황은 아닐 테니까.

    역시, 내가 해 줄 수 있는 반응은 하나다.

    “너 하고 싶은 거 정하고, 얘기해. 그럼 도와줄 수 있는 선에서 도와줄게.”

    일단 지훈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쩌면 지훈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갈림길에 섰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일수록,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겠지.

    지훈이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네. 진지하게 생각 좀 해 볼게요.”

    * * *

    시애틀 타코마 공항.

    우리는 수화물을 찾아 출국장으로 나섰다.

    오랜 비행에 퉁퉁 부은 다리.

    어딘지 찌뿌둥한 몸… 장기 비행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다.

    인천공항에서 사진을 찍어 대던 기자들을 생각하면, 어찌나 평화로운지 모르겠다.

    어쨌건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갔다.

    호텔은 조나단 감독이 예약을 해 줬다.

    예약이 된 방은 특실 두 개.

    조나단 감독은 금홍과 내가 각각 쓰길 바랐겠지만, 지훈이 함께 왔으니… 자연스레 남자 방, 여자 방으로 나뉘었다.

    “어후… 죽을 것 같아.”

    “…나도.”

    지훈과 나는 각각의 싱글 침대에 엎어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잠이 들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우웅― 우웅―

    별안간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려 휴대폰을 봤다.

    …모르는 번혼데.

    게다가 한국식 번호도 아니다.

    조나단 감독인가?

    나는 일단 푹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이상입니다.”

    상대는 영어로 내게 물었다.

    ― 이상 작가님?

    …넌 누구냐.

    두껍고 허스키한 목소리.

    조나단 감독의 목소리는 절대 아닌데.

    ― 저 누들 출판사의 심사위원 크리스라고 합니다.

    …!

    누들 출판사?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연락에, 잠이 싹 달아났다.

    나는 일단 되는대로 짧은 영어로 대답했다.

    “아, 예. 반갑습니다.”

    그러자 그는 좀 흥분한 것 같았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뭔가를 말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알아들을 수가 있나.

    상당한 집중을 하고 난 후에야, 그의 말을 반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미국에 왔다는 건 기사를 통해 알았고, 그 말을 듣고 누들 출판사에서는 뭔가 회의를 했고… 그래서, 지금 이 근처라고?

    “지금, 이 근처라고요? 여기, 호텔이요?”

    ― 네.

    하고 또 뭔가를 잔뜩 말한다.

    그러나 난 이미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가 들릴 리가 있나.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는 걸 포기하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거기서 기다리세요. 지금 갈게요.”

    전화를 끊은 후.

    나는 나갈 준비를 했다.

    도착한 후 그대로 뻗었으니 준비랄 것도 없지만.

    이 난리통에서 지훈은 잘만 잤다.

    나는 부디 금홍이 깨어 있길 바라며, 전화를 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다행히도 금홍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금홍 역시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 …뭐라고요?

    “그래서, 지금 당장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혹시 같이 가 줄 수 있어요?”

    ― 그럼요. 샤워하기 전에 연락받아서 다행이에요. 다 젖은 머리로 나갈 뻔했네.

    우리는 그렇게 급히 호텔 복도에서 만났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자, 멀지 않은 곳에 한 흑인이 서 있었다.

    인텔리 느낌을 풍기는 깔끔한 차림의 젊은 남자.

    그는 날 보더니 환한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이상 작가님.”

    “크리스 씨?”

    “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당신의 열렬한 팬이에요.”

    그는 날 잡아당겨 포옹까지 했다.

    서양인 특유의 체취와 길쭉한 체형이 느껴졌다.

    뼈대가 큰 조나단 감독과는 또 다른 느낌.

    아무튼 우리는 호텔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금홍의 도움을 받아, 아까 그가 전화로 한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작가님이 미국에 오신다는 건 기사를 보고 알았어요. 미국에서도 작가님을 슬슬 주목하고 있거든요. <그 집>의 영화화 때문에라도요. 아무튼 그걸 안 후에 저희 누들 출판사 안에서 회의를 좀 하고 나니… 이미 미국으로 출발을 하신 거예요. 무례하다는 걸 알긴 하지만 저희로선 작가님을 만날 방법이 이것뿐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기다려 봤습니다.”

    “저희가 묵은 호텔은 어떻게 아시고요?”

    “하하. 미국 기자들은 모르는 게 없죠.”

    …무섭구나, 이 나라.

    아무튼, 나는 그가 반가웠다.

    누들에서 내 스릴러 소설 <그 집>이 당선되었을 때, 심사위원 크리스는 심사 경위에 극찬을 남겼다.

    누들의 결과 살짝 다른 <그 집>이 5위로 입선한 것도, 그의 힘이 컸을 거라고 예상한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영화 쪽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미처 누들에 연락을 드릴 수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멋대로 찾아온 걸요.”

    그는 그 큰 손을 휙휙 저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겸손하고, 많이 배웠으며,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고,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들에서 무슨 회의를 하셨는지….”

    “아, 작가님.”

    크리스가 말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누들과 작은 행사를 하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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