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97화 (97/204)
  • 97화

    북콘서트를 준비하며 내가 할 일.

    바로 ‘게스트 섭외’였다.

    그나마 누가 가장 편할지 생각하다가….

    역시 강인춘 PD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오랜만에 연락을 했는데도, 그는 퍽 편하게 굴었다.

    ― 어어, 이 작가. 웬일?

    “아, 네. 다름이 아니라….”

    나는 북콘서트에 대해 설명하며 게스트로 와 줄 수 있느냐 물었다.

    그는 낄낄거렸다.

    ― 별걸 다하는구만. 이 작가 대한문학상이랑 일 있었다며? 일부러 그 시상식 날 행사 잡았다고 난리던데?

    “그런 거 아니거든요. 가능한 날이 그때뿐이었어요.”

    다행히 유로문학상 건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알면 또 얼마나 놀려 댈지….

    ― 차라리 일부러 잡지 그랬어. 걔네들 치졸하더만.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자기네들이 북 치고 장구 치다 그렇게 된 거지. 그래서… 와 주실 수 있겠어요?”

    ― 어어, 연말에 일 없으니까 갈게. 그 전에….

    전에?

    ― 오늘 술이나 한잔 하자. 종로 홍합집에서.

    …잘못 걸렸다.

    강인춘 PD, 마시면 말술인데.

    그래도 뭐, 별수 있나.

    몇 시간 뒤.

    종로의 홍합탕집에서 강인춘 PD를 만났다.

    나는 그를 만나자마자 초대장을 내밀었다.

    “뭐야, 이게. 북콘서트 초대장? 이런 것도 줘?”

    “문단에 다 돌렸어요. 제 매니저가 고생이죠.”

    “요란 떨기는. 북콘서트에서 뭘 하는 건데?”

    그는 내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제 신작 <등> 있잖아요. 그 책 중심으로 작품 얘기도 하고… 밥 한 끼 먹으면서 송년회 하는 거죠.”

    “오호. 밥도 줘?”

    “호텔 뷔페 부를 거예요.”

    강인춘 PD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카페에서 한다며. 커피나 마시지 무슨.”

    “손님 모셨으니 그 정도는 해야죠. 게스트가 다 정해진 게 아니라서 누가 올지 말씀은 못 드리지만.”

    “그래, 이 작가가 알아서 하겠지. 일단 짠.”

    그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난 그 술잔에 내 술잔을 부딪쳤다.

    “짠.”

    우린 소주를 털어 마셨다.

    속이 알싸하다.

    “PD님, 새 작품 계약하셨던데요?”

    “아, 내년에 들어갈 거야. 그때까지 잘 쉬어 놔야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홍합을 까먹었다.

    우걱우걱 계란말이를 먹는 강인춘 PD를 문득 봤다.

    이 아저씨가 이래 봬도 스타 드라마 PD니까….

    “PD님.”

    “어?”

    “스릴러 잘 아세요?”

    그는 갑자기 뭔 소리냐는 듯 우물거리며 날 봤다.

    “저 스릴러 써 보게요.”

    “잘 생각했다. 너 극본 쓰라니까. <무너지는 날>도 스릴러 느낌 나잖아.”

    “아뇨. 소설로요.”

    “스릴러 소설? 갑자기 왜?”

    “전략적 글쓰기와 제 내면세계의 만남이랄까요.”

    “뭔 소리야, 그게.”

    미국에서 잘 통할만 한 장르 중에서,

    내 내면과 어울리는 게 스릴러란 뜻이었다.

    “아무튼. 쓴다 치고, 뭘 쓰게?”

    과연 강인춘 PD는 관심을 보였다.

    “많이 정해 놓은 건 아닌데, 기본적인 구도를 생각해 봤어요.”

    “그래. 말해 봐.”

    난 요 며칠간 생각해 놓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 입양아가 있어요. 여자애죠. 그 아이는 살인마에게 부모를 잃었어요. 그리고 한 집안으로 입양을 간 거예요. 그 집엔 양부모와 양오빠가 있어요.”

    “약간 서양적인 분위기가 있네. 고아원 안 가고 입양 간다는 게.”

    뭐, 그걸 노리지 않은 건 아니지.

    “그런데 이 입양을 간 집엔 규율이 있어요. 아이를 제외한 그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규율. 아이는 그 속에서 엄청난 불편함과 긴장을 느껴요.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양부모는 아이에게 질책의 시선을 보내죠. 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죠. 그래도 아이는 집안의 규율을 알기 위해 노력해요. 그 집안의 일원이 되고 싶으니까.”

    “어떻게 노력하는데?”

    “실험을 하는 거죠. 자신의 행동과 가족의 반응의 상관관계를. 즉, 온갖 짓을 다 해 보고 그 반응을 관찰하는 거예요.”

    강인춘 PD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봐.”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 아이는 알게 돼요. ‘가족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규율이었다는 걸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그러던 중 아이의 부모를 살해한 살인마의 소식을 들어요. 그 살인마도 산속에서 무참히 살해를 당하게 된 거죠. 그리고 아이는 우연히 알게 돼요. 자신의 가족 중에 살인마를 죽인 또 다른 살인마가 있다는 걸.”

    “그때부터 집안의 규율을 깨고 몰래 가족들의 뒤를 밟으며 미스터리를 풀어 가는 거고?”

    “그렇죠. 디테일은 정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내용이에요. 구체적인 건 앞으로 바뀔 수도 있고요.”

    강인춘 PD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멋지네. 긴장감을 아주 잘 구성했어.”

    “포인트를 잡아 주시면 더 강화시킬 수 있는데.”

    “지금은 감각으로만 한 거고?”

    “취재를 하긴 했지만… 일단은 그런데요.”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음… 하면서 말을 골랐다.

    “누군가는 스릴러를 패고 죽이는 이야기인 줄 알더라고. 아니야. 스릴러는 딱 하나, 긴장감이 전부야. 어떻게 긴장감을 살리느냐. 그게 관건이지.”

    “긴장감은 욕망에서 나오고요?”

    “그렇지. 잘 아네. 네 소설에는 두 가지 긴장감이 있어. 하나는 입양 간 집의 규율을 아는 과정. 그 집안에 잘 적응해야겠다는 욕망과 그것에 실패할 때마다 돌아오는 어딘지 공포스러운 냉대… 가족 단위 내에서 긴장감을 잘 풀어냈어. 누구 하나 죽지도 않았는데 괜히 긴장되잖아.”

    “또 한 가지 긴장감은요?”

    “살인마를 죽인 살인마가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 그런데 그걸 대놓고 물어볼 수 없는 상황이지? 문제는 죽은 살인마가 주인공의 원수라는 거야. 여기서 복합적인 감정이 생겨나. 좋아해야 할지 공포스러워 해야 할지. 이건 감정에 의한 긴장감이야. 이 감정에 의한 긴장감이 굵직한 서사와 만났으니 당연히 잘 살아날 수밖에.”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평이었다.

    요 며칠 머릿속에서 굴려 왔던 이야기.

    한번 말로 내뱉으니 더 확실하게 정리가 되는 듯했다.

    강인춘 PD가 젓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단.”

    “네?”

    “후반에 가서, 살인 사건 때문에 주인공의 내적 긴장이 잘 살지 않을 수 있어. 살인은 자극적이니까.”

    “그럼… 캐릭터를 더 잘 살려야겠네요.”

    “그거지. 그 여자애 스무 살이라고 했지? 연령대를 조금만 더 높여. 그리고 경찰로 만들어.”

    “경찰이요?”

    “응. 그럼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늘어나. 총을 자연스레 가질 수 있는 인물이냐 아니냐, 이 점에서도 스릴러의 긴장감은 확연히 달라진다구.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오호라.

    그럴듯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할게요.”

    “또 그렇게 해야….”

    강인춘 PD가 씩 웃었다.

    “나중에 드라마로 만들기도 쉽거든. 드라마 스릴러가 무조건 경찰 아니면 검찰 얘기인 게 그 이유가 있어.”

    “뭐예요. 결국 그 속셈이었어요?”

    “인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천만 원짜리 조언을 해 줬는데 고마운 줄 모르고….”

    “알았어요, 알았어. 고마워요. 어서 드세요.”

    나는 잔을 들었다.

    강인춘 PD가 신나게 잔을 부딪쳤다.

    마무리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강인춘 PD는 거나하게 취했고,

    나는 그를 택시에 실어 보내는 마무리.

    하지만 만나길 잘했다.

    새 소설의 윤곽이 잡혀간다.

    * * *

    북콘서트를 사흘 남긴 지금.

    지훈과 나는 막판 확인 작업을 하고 있다.

    물론… 결정적인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

    몇 명이나 올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

    “팬들은 꽤 올 것 같은데… 문단 지인들이 얼마나 올지 모르겠어요.”

    지훈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우리는 수많은 문단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돌렸다.

    하지만 확실히 ‘오겠다’고 한 사람은 열 명 정도.

    일정이 아무래도… 대한문학상과 겹쳤기 때문이겠지.

    오는 인원을 모르니 음식 예약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우리의 송지훈.

    나름대로 그 일을 해결한 모양이다.

    “신라문학 본사 바로 옆에 호텔 하나 있잖아요. 거기 출장뷔페를 불렀어요. 음식 떨어지면 바로바로 채울 수 있게. 사람 오면 오는 대로 만들어서 나르는 거죠.”

    “그렇게 유동적으로도 해 줘?”

    “계약금 두둑하게 준다니까 해 주던데요?”

    지훈이 든든한 건지,

    아니면 돈이 든든한 건지.

    “형… 그런데 장하늘 진짜 안 와요?”

    “어. 연락해 봤는데 바쁘대.”

    “와… 좀 실망.”

    누가?

    장하늘이?

    아니면, 내가?

    “야, 그러는 너도 무슨 뮌이고 리브레고 스카이프로 연결해 준다더니 다 안 된다며.”

    “그건 유로문학상이랑 겹쳐서 그런 거잖아요. 그 사람들도 시상식 가겠죠. 히루키는 집필 들어갔대고…”

    “그거 봐. 원래 이런 행사는 변수가 많다고.”

    …라고 말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다.

    장하늘은 좀 늦긴 해도, 온다고 했다.

    갑자기 장하늘이 나타나면 송지훈이 뒤집어지겠지.

    송지훈뿐이랴, 사람들도.

    일종의 깜짝 선물이랄까.

    “쳇… 아무튼 오늘 확실하게 올 수 있는 인원은 픽스해야 해요. 금홍 샘도 못 온다고 했죠?”

    “…응.”

    금홍이가 못 오는 건 정말이다.

    처음에는 온다고 했지만… 갑자기 세미나가 잡혔다나.

    좀 서운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대학원 생활에 세미나는 중요하니까.

    “형 부모님은요?”

    “아, 말씀해 주신다고 했어. 확인 좀 하고 올게.”

    나는 핸드폰을 들고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사실… 혜경의 부모님은 오기를 거부했다.

    자신 같은 촌부들이 갈 곳이 아니라며.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못 온다 해도… 이분들은 꼭 모셔야 한다.

    내가 혜경의 몸으로 들어온 지도 일 년.

    즉, 혜경의 부모가 아들을 본 지도 일 년이다.

    아들이 잘된 걸… 보여 드릴 때도 됐지.

    나는 혜경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어, 뭔 일이냐?

    “아버지. 저 다름이 아니라 연말에 있는 행사 말인데요. 꼭 와 주셨으면 싶은데….”

    ― 아, 안 간다니까. 우리 가면 니가 부끄럽지 않겄냐.

    “하나도 안 부끄러우니까 꼭 와 주세요. 혹시 옷 사 입으실 거면 제가 돈 보내 드릴게요.”

    ― 니가 이때까지 보내 준 걸로 옷이 아니라 가게도 사겄다, 야. 됐어… 우린 티브이로 많이 보니까 괜찮아.

    “어디 안 좋으신 건 아니죠?”

    ― 안 좋긴. 튼튼한데. 농사 아무나 짓는 줄 아냐.

    “시간도 되시는 거고요.”

    ― 뭐… 겨울이니까 막 바쁘진 않지.

    “그럼 그날 집 앞으로 차 보낼게요. 그거 타고 오시면 되겠네요. 끊습니다!”

    ― 어? 어어, 야야! 혜경아!

    나는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 친부모나 큰아버지 부부에게도 이렇게 굴어 본 적 없는데.

    넉살이 좀 늘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다시 작업실로 들어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지훈이 날 불렀다.

    “형, 형. 이상한 기사 났어요.”

    “뭔 기사?”

    “며칠 전 기산데… 제가 지금에야 봤거든요. 이번 대한문학상 상금 확 뛰었대요.”

    “갑자기? 얼마나?”

    “대상은 이천씩 주고, 본심에만 올라가도 삼백씩 준대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푸핫 하고 웃었다.

    그들의 심보야 뻔했다.

    상금으로라도 이슈를 유지시키고.

    본심 작가들 이탈을 막으려는 수.

    “다른 평론가들한테 얘기 들어 보니까 상금 올리는 데 쓴 돈, 다 가라사대 쪽에서 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가라사대가 벌인 일이니 그렇게라도 수습했겠지.”

    “더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뭔데?”

    “가라사대 편집장 사퇴했대요.”

    얼쑤.

    “안 봐도 뻔하네.”

    “그쵸? 가라사대 돈 털게 한 죄로 사퇴. 각 나오잖아요.”

    지훈이 신나서 떠들었다.

    이 녀석, 아무리 그래도 예심 심사위원인데.

    “너, 심사비는 들어왔어?”

    “들어왔죠. 몇 푼 되지도 않는 거. 아무튼 다신 문학상 심사 안 할 거예요.”

    “그래, 욕봤다.”

    아무튼 북콘서트도 대한문학상도 결국 열리긴 열리는구나.

    그리고 사흘 후.

    우리는 합정동 신라문학 본사를 향했다.

    ‘이상’의 첫 북콘서트.

    몇 명이나 올지, 그리고 유로문학상은 어떻게 될지….

    아직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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