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79화 (79/204)

79화

파리 8지구.

리브레 출판사.

에바 편집위원은 핸드폰 영상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장 스테판이 찍어 온 1회 리브레 클럽 영상이었다.

아랍인들과 어린 학생들이 낭독하는 <내외인>.

그것은… 묘하게 아름다웠다.

“…놀랍네요. 낭독이라니. 생각지도 못했어요.”

에바 편집위원이 중얼거렸다.

“실제로 봤을 땐 더 놀라웠어요. 부산스러웠던 분위기가 점차 <내외인>으로 집중되는 모습이… 소름이 끼쳤다니까요.”

프랑스어 특유의 부드러운 운율.

시니컬하지만 기품 있는 ‘이상’의 문장들.

그것만으로도 이 낭독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랍인의 프랑스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에바 편집위원이 놀란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아랍인.

파리에서 가장 천대받는 이민자들이 아닌가.

프랑스어.

이상의 문장.

그리고 아랍인이라는 변수.

이 조화는 지금껏 본 적 없는 ‘프랑스어’를 창조한 것만 같았다.

“이걸 홍보 영상을 만들어 달라고요?”

“네. 그렇게 부탁하셨어요.”

“…들어줍시다, 그 부탁.”

“네, 팀장님. 일단 DB팀에 요청해서 홈페이지에 이 영상을 끼워 넣을 데가 있는지 파악할게요.”

“신인 게시판.”

“네?”

“신인 게시판 배너에 여러 슬라이드가 있잖아요. 기존 <내외인> 카피를 내리고 이 영상을 자동 재생할 수 있는지 문의해 봐요.”

“하지만….”

신인 게시판은 일종의 신인 도서 홍보란이었다.

홍보라고 해 봤자, 슬라이드 형식의 배너지만.

“하지만 <내외인> 카피가 올라간 곳은 그 배너가 유일한데… 그걸 내리고 이 영상을 올려도 괜찮을까요?”

한 마디로, 이 영상 하나로 모든 홍보를 감당해야 한다는 뜻.

“그럴 가치가 있어요. 이 영상, 잘 편집해서 올리라고 해요. <내외인>의 첫 문장부터 똑똑히 들을 수 있게요. 또, SNS에서도요.”

“…네, 알겠습니다.”

장 사원은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에바 편집위원이 저렇게 확신을 보인다면… 그녀가 옳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편집장님께 보고할까요?”

원칙대로라면 보고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에바 편집위원은 그렇게 순진하진 않았다.

아니, 눈에 불이 켜졌다는 말이 더 맞겠다.

‘마리옹 편집장은 내게 <내외인>에 손 떼라고 했지. 지금 말하면 분명 반대할 거야. 일단 밀어붙이자.’

“홍보를 늘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하는 거예요. 보고하지 말고, 제 선에서 해 보죠. 내가 책임질 테니 진행해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 사원이 DB팀으로 떠났다.

에바 편집위원은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핸드폰으로 찍은 조악한 영상.

그러나 에바 편집위원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영상이야말로 <내외인>을 프랑스에 제대로 정착시킬 거라고.

* * *

오늘은 강연이 없다.

이른 오전부터 박물관 한두 군데를 돈 후.

호텔 앞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와 크로아상을 먹었다.

우웅―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장 스테판이었다.

― 작가님, 리브레 홈페이지 신인 게시판에 접속해 보십시오. 영상이 올라와 있습니다.

나는 휴대폰으로 리브레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신인 게시판 슬라이드 배너를 몇 개 넘겼다.

…여깄구나.

19지구의 사람들이 <내외인>을 낭독하는 영상.

살짝 보정을 했지만, 여전히 날것의 느낌이 났다.

확실히 매력 있는 영상이었다.

책에 집중할수록, 아랍인들의 눈빛과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렇게 한참 영상을 보고 있을 때였다.

야외 테이블이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그런가.

옆자리 중년 남자가 내 휴대폰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내게 프랑스어로 뭐라 말을 걸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그는 머릿속 저편의 영어를 끌어오려는 애썼다.

그리고 내게 다시 물었다.

“후즈 북? 후즈 노블?”

영상 속 책의 주인을 궁금해한 거군.

대놓고 내 것이요라고 말하긴 어색한 노릇.

난 웃으며 나도 모른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팔짱을 끼곤 낭독을 계속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 카페, 크로아상, 커피, 낯선 이와의 대화.

어딘지 고풍스러운 낭만이다.

이런 낭만은 1930년대에도 크게 유행했다.

괜히 상념에 빠지게 한다는 점에서 문학과 닮았고.

그래서인지 난 항상 다방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내 다방에서 상념에 빠져 글을 쓰며 살고 싶었지.

딱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파리는 ‘옛날 부자 동네’인 게 맞다.

더럽고 냄새나며 관광객들이 바글거리는 동네.

그러나 이런 낭만이 있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를테면… ‘예술가의 이미지’가 살아 있는 도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서만 쓸 수 있는 어떤 소설이란… ‘예술가’에 관련된 게 아닐까?

우웅― 우웅―

전화가 울렸다.

장 스테판이었다.

“네. 이상입니다.”

― 작가님? 저 스테판입니다. 잘 쉬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요. 아침엔 박물관도 좀 다녀왔어요. 책에서만 보던 예술품들을 직접 보니 좋던데요.”

― 제가 휴무일에 더 좋은 곳으로 모시죠. 연락을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낭독 영상이 효과가 없진 않은 것 같아요. <내외인>의 인터넷 구매율이 좀 올랐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 아니, 오아시스 같은 소식이었다.

“한숨 돌렸네요.”

― 에바 편집위원님께서도 앞으로의 강연을 낭독식으로 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요. 이미 그럴 생각이시겠지만… 확인 차 연락을 드렸습니다.

“네. 저도 그렇게 진행할 생각입니다. 내일 있는 17지구에서의 2회차 강연에서는 <내외인>의 2장을 낭독할 생각입니다.”

― 1장은 건너뛰시고요?

“이미 19지구에서 했으니까요. 클럽 회원들이 1장까지는 읽어올 수 있도록, 작은 공지라도 해 주시죠.”

― 17지구는 노인분들이 많이 사시는 곳이라… 클럽 진행 전에 1장 낭독 영상을 틀어 드리겠습니다.

파리의 노인들이라.

예전 날 심 교수가 해 줬던 얘기가 떠올랐다.

‘유럽이랑 한국은 젊은 세대는 엇비슷할 거야. 하지만 한국 늙은이랑 유럽 늙은이는 완전히 다른 종이라 보면 돼요. 특히 프랑스는 옛날 부자나라라서 자부심이 대단하겠지.’

“그분들은 자발적으로 모이신 건가요?”

― 그건 아닙니다. 17지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자체적인 독서 모임을 합니다. 그 모임에 저희 리브레가 책과 강연을 제공하게 된 거죠.

자존심 센 노인들에다가, 원래 있던 모임에 내가 끼어 들어가는 식이라….

쉬운 상대들은 아니겠군.

“아무튼, 홍보도 그렇고, 강연도 그렇고… 제멋대로 굴어 죄송하군요.”

― 죄송하긴요. 사실 작가님 아이디어에 저희도 놀라는 중입니다. 강연에서 낭독을 하고, 또 그 낭독을 홍보 자료로 쓰시다니….

“하하… 눈앞에 있는 산을 하나씩 넘는 것뿐이죠. 그럼 내일 뵙죠.”

― 네. 호텔로 모시러 갈 테니 그 앞으로 나오십시오.

“매번 감사합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파리의 전경을 마주 보며 커피를 마셨다.

“17지구라….”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남은 리브레 클럽은 수월할 것 같은데.

* * *

파리 1지구 부촌.

프랑스의 국민 예술 영화 감독 로베르 공드리의 저택.

로베르 감독은 오늘도 개인 상영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몽테뉴 영화제’의 출품작을 보기 위해서였다.

딱히 심사를 맡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영화제를 앞둔 감독의 기본 소양이랄까.

이번 시즌에 본 영화만 해도 이십여 편.

눈에 피로가 극한으로 쌓여 갔다.

한 편 한 편 모두 훌륭하긴 하지만….

‘유럽 영화들은 하나같이 느낌이 비슷해져 가는 게 문제야. 이래 놓고 상은 유럽 영화들이 휩쓸게 되겠지.’

그것은 ‘익숙함’의 문제였다.

심사위원들도 ‘익숙하게 잘 만든’ 영화가 편하니까.

다른 문화권의 영화들?

어지간히 신선하지 않으면 상을 타기 어려웠다.

방금, 또 하나의 영화가 끝났다.

그는 줄담배를 뻑뻑 피우며 다음 영화를 재생했다.

“어? 조인후 감독 거 아냐?”

한국의 조인후 감독.

그가 좋아하는 예술 영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영상의 미장센이 아주 섬세한 감독.

“제목이… <내외인>이라.”

‘제목 한번 의미심장하네. 머리 좀 식히고 봐야겠군.’

로베르 감독은 담배를 눌러 껐다.

그리고 비척비척 상영관을 나섰다.

며칠째 영화들에 시달리고 있는 그의 모습.

걸인이나 다름없이 초췌했다.

“어머, 감독님 나오셨어요?”

집안일을 해 주는 메이드가 깜짝 놀랐다.

그는 손을 슥 들어 올리곤 아는 척을 했다.

“배가 고픈데. 테라스로 간식을 좀 부탁해요.”

“그럼요. 비타민도 같이 챙겨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그는 또 그렇게 비척비척 테라스로 나갔다.

서늘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

저 멀리 에펠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1지구.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살기 힘든 동네였다.

로베르 감독이야 그 ‘파리의 상징’을 보며 권태롭게 하품을 하지만.

“여기 있어요, 간식.”

메이드가 유리 테이블에 쟁반을 두고 나갔다.

로베르는 빵을 하나 입에 물고 휴대폰을 들었다.

“오랜만에 조 감독한테 전화나 해 볼까.”

몽페르 영화제와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가 겹쳤다.

베니스로 간다고 하면 서운한 티를 낼 생각이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조인후 감독이 전화를 받았다.

― 공드리 감독님.

“조 감독님. 비행기 표는 사셨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를 했다.

조 감독은 유창하게 받아쳤다.

― 일단 유럽행으로 끊었지요.

“이탈리아행이라면 퍽 섭섭할 겁니다.”

― 하하하… 다행히 샤를 드골로 향해 갑니다.

그제야 로베르 감독이 씩 웃었다.

“이거, 하는 수 없이 좋은 술을 좀 준비해야겠군요.”

두 사람은 이런저런 근황을 나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영화제 이야기로 넘어왔다.

조인후 감독이 슬쩍 물었다.

― 혹시 <내외인>을 보셨습니까?

“아뇨, 이제 볼 생각입니다. 전화를 끊고요.”

― 음… 프랑스 배급사 쪽에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작품, 원작 소설이 있습니다.

“네? 그런 얘긴 처음 듣는데요?”

― 아, 역시….

“지금 ‘유럽 놈들 일 처리 하고는’이라고 생각했죠?”

조인후 감독은 뜨끔했는지 말이 없었다.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럽놈들 일 처리는 저도 넌덜머리가 난다니까요.”

― 하하하… 아무튼 그 영화, 이상이라는 한국의 작가가 쓴 <내외인>이란 소설을 원작으로 했습니다.

“뭐. 원작이 있어도 영화는 영화로만 봐야죠.”

로베르 감독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가 관심이 있는 건 어디까지나 영화적 해석이기에.

― 영화를 보시면 원작 소설이 보고 싶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조인후 감독이 이렇게까지 말한다고?’

로베르 감독은 의아했다.

아무리 그래 봤자 영화는 영화, 소설은 소설일 텐데?

“아무튼, 알았습니다. 저는 빵 좀 먹고 다시 상영실로 돌아가야겠습니다.”

―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럼 열흘 후에 파리에서 뵙죠.

“몽페뉴 영화제가 벌써 열흘밖에 안 남았군요. 기다리겠습니다.”

로베르 감독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밖을 바라보며 빵을 우적우적 먹었다.

‘소설이 원작이라… 그런데 작가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뭐, 알 바 아니지.’

쟁반은 어느새 비어 버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비타민을 털어 먹고 테라스를 나섰다.

* * *

파리는 참 이상한 도시다.

크기는 서울의 6분의 1밖에 안 되면서, 동네마다 이렇게 느낌이 다르다니.

17지구는 부촌은 아니다.

19지구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도 아니고.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달까.

가끔 돌아다니는 노인들은 나와 장 스테판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분들은 동양인을 처음 보는 모양이죠?”

내 말에 장 스테판이 체념조로 웃었다.

“전 익숙해요. 노인들이잖아요.”

장 스테판과 나는 문화센터로 들어갔다.

19지구보다는 더 크고 환한 곳이었다.

나는 장 스테판과 행사장까지 안내를 받았다.

10명의 백인 노인들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19지구보다 나은 점은….

그들의 손에 <내외인>이 들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안경 너머로 날 물끄러미 보았다.

이방인에 대한 은근한 호기심과 적대감이 담긴 눈들.

장 스테판이 덤덤하게 카메라를 고정했다.

오늘은 휴대폰이 아니라 회사용 캠코더였다.

“안녕하세요, 이상입니다.”

나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들도 마지못해 내게 인사했다.

“17지구에서도 정원 열 분이 모두 차서 영광이네요. <내외인> 1장은 다 읽어 보셨나요?”

“읽진 않았어요. 대신 아까 센터 관장이 와서 1장을 낭독하는 영상을 틀어 주더군요.”

나와 마주 보고 앉은 노인이 대답했다.

성성한 백발, 깨끗한 안경, 형형한 눈빛, 낮고 울림이 깊은 목소리.

나는 바로 눈치챘다.

목소리가 유난히 좋은 저 노인.

저 노인이 일종의 ‘반장’이로군.

“그렇군요. 그거면 됐습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작가님, 우린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군요.”

“…européen(유럽의).”

그 말은, 장 스테판의 통역 없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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