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천재 작가-49화 (4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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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48) - 수정완료

    다시 사는 천재 작가 48

    ‘소설의 몸’이라는 게 있다.

    긴 소설을 쓸 때 필요한 건 순간의 집중력이 아니다.

    지루함을 견딜 인내력이다.

    그 인내를 갖춘 몸이 바로 ‘소설의 몸’이다.

    즉, 언제든 집필에 들어갈 수 있는 습관 말이다.

    아침 6시 기상.

    8시까지 출근.

    12시까지 집필.

    2시까지 식사 및 휴식.

    6시까지 집필 후 퇴근

    이후 휴식 및 취침.

    <내외인> 집필에 들어간 후, 내 생활은 이 루틴으로 움직였다.

    매일 일정 분량의 원고가 안정적으로 쌓여갔다.

    남자1과 남자2는 각각의 세계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남자1이 울면 남자2가 눈물지었고,

    남자2가 폭소하면 남자1이 미소지었다.

    마치 서로를 의식한 것처럼, 비슷하게.

    내 소설지만 조금은 섬뜩하다.

    그리고 그 섬뜩함이 싫지 않다.

    오늘은 ‘소설의 몸’에서 잠깐 벗어나는 날이다.

    지훈의 논문 예비발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문대 교학팀 옆 대형 발표실로 향했다.

    “형... 바쁜데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지훈은 벌써부터 떨고 있었다.

    아까 우황청심환도 먹던데.

    “준비 잘 해놓고 뭘 그렇게 떨어?”

    “무대공포증 있거든요. 또, 싫은 사람들 있으면 저 되게 예민해져요.”

    이게 지훈의 성격이다.

    좋은 사람한텐 한없이 퍼주지만,

    싫은 사람한텐 타협의 여지가 없지.

    “형은 대체 강연 같은 거 어떻게 해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면 돼. 자기암시랄까.”

    “반박할 수 없어서 더 열 받네요.”

    “뭔 소리야. 평론가가 소설가보다 똑똑하지.”

    그렇게 발표회장 앞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우웅- 우웅-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먼저 가 있을래?”

    “...후우... 네.”

    지훈이 발표회장으로 들어간 후, 나는 전화를 받았다.

    “네, 이상입니다.”

    -안녕하세요. 여긴 가라사대 편집부입니다.

    ...황당한 곳에서 전화가 왔군.

    받지 말 걸.

    “무슨 일이십니까.”

    -네. 저희가 이번에 이상 선생님의 에세이집을 제작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는데요.

    일본에서 <다시 사는 일>이 3쇄에 들어갔다.

    한국판을 내고 싶다는 출판사의 전화가 수없이 많이 오고 있었다.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긴 하지만,

    가라사대가 전화를 할 줄이야.

    “안 합니다.”

    -하하하... 저희 가라사대에게 서운한 점이 많으시죠? 하지만 이상 선생님께서 한국에서 활동을 하시는 데에 있어서 저희 가라사대와 인연을 만들어 두시는 것도,

    “안 합니다.”

    -물론 인세와 계약금도 충분히 챙겨드리고. 홍보도,

    “안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끊습니다.”

    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히루키 책의 추천사를 거절했던 일.

    벌써 두 번째니 그쪽도 약이 오를 대로 올랐을 거다.

    나는 통화를 그대로 녹음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쓸모가 있을 날이 올지도.

    한국에서 책을 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첫 책은... 소설이었으면 한다.

    난 어디까지나 소설가니까.

    ***

    대학원 논문 발표는 두 단계다.

    예비 발표와 본 발표.

    예비 발표는 논문 계획서를, 본 발표는 논문 전체를 심사받는다.

    걸리는 시간은 두 학기, 총 1년.

    혜경도 FM으로 이 과정을 거쳐 석사 논문을 받았다.

    작가들은 대학 강의를 위해 학위를 따놓는다.

    지훈은 문학을 공부하는 비평가이기에 박사 논문은 필수다.

    나 역시 언젠가 논문을 쓰고 싶다.

    재밌지 않은가, 문학 공부.

    발표장엔 문창과 대학원생들과 교수진들이 있었다.

    싫은 얼굴들이 곳곳에 보인다.

    오희라와 이현강.

    “어머, 혜경아- 오랜만이야.”

    오희라가 힘없이 인사를 한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른 발표자들은 지도교수와 발표를 상의하느라 바쁘다.

    덩그러니 앉은 건 오희라 뿐이다.

    마침 발표를 위해 유인물을 나눠주던 지훈이 왔다.

    “그 동안 과에 무슨 일이 있던 거냐?”

    “저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희라 선배 이혼했대요. 한동안 안 보이더니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 갑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더래요.”

    “이혼? U대학 국문과 교수라는 사람이랑?”

    “네. 제자랑 바람이 났다나요.”

    끔찍하구만.

    이현강과 콩고물 받아먹으려던 패거리들이 오희라를 버린 것도.

    남의 후광으로 떵떵거린 자의 최후란 이렇게 씁쓸하다.

    “예비발표 패스하고 바로 본 발표 하게 해달라고 이 교수한테 엄청 졸랐대요. 등단 못 했으니 학위라도 받아가야겠다는 거죠. 더는 학교에 눌러 붙을 상황도 아닌 것 같고.”

    지훈이 툴툴거린다.

    “내버려둬. 빨리 졸업해주면 우리야 땡큐지.”

    “쩝... 그래요. 저 그럼 발표하러 갑니다.”

    지훈이가 예비발표자석으로 가서 앉았다.

    오희라가 예비발표도 없이 학위를 딸 수 있을까?

    아주 가끔 본 발표로 직행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학생의 기량이 대단이 좋을 때 말이다.

    오늘 분위기도 참 볼만 하겠다.

    진행은 사무원인 금홍이가 맡았다.

    금홍이는 마이크를 들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2021년 1학기 인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논문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시작하는 건 예비발표.

    발표자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지훈은 마지막, 세 번째 순서였다.

    “제 논문 주제는 1990년대 단편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자아분열입니다.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소설이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한국 사회는 IMF라는 격동기를 겪게 됩니다. 이에 따라 어두워진 사회 분위기와 성공가도를 달려가던 개인의 삶이 급격히 변화하여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소설은 적극적으로 탐색했으며...”

    지훈은 떨면서도 또박또박 발표를 했다.

    비평가답게 정리정돈이 잘 된 논문이었다.

    묘하게 <내외인>의 내용과 통하기도 하고.

    지훈의 발표는 교수들의 칭찬 일색으로 이어졌다.

    이현강만이 침묵으로 발언을 넘겼다.

    예비 발표는 그렇게 평온히 넘어갔다.

    드디어 본 발표다.

    논문 발표회의 백미.

    첫 번째 순서는 오희라.

    그녀는 엄청나게 긴장한 것 같았다.

    심드렁한 이현강이 신경쓰였겠지.

    지도교수가 방어를 해 줄 마음이 없으니.

    “제가 발표할 논문은... 한국 노동 소설의 흐름 분석입니다.”

    뭐지? 저 애매한 제목은?

    ‘흐름’이라는 건 ‘명확한 기간’ 안의 움직임을 말한다.

    지훈이 연구시기를 1990년대라고 특정한 것처럼.

    “저는 현재 한국 문학에서 생산되지 않는 노동 소설을 다시금 돌아보고 그것이 시대별로 갖는 의미를 확인해보았습니다.”

    ...알 것 같았다.

    평소 노동 문학의 ‘노’ 자에도 관심이 없던 그녀가 갑자기 이런 주제를 정한 이유를.

    오희라는 논문을 쉽게 쓰고 싶었던 거다.

    노동문학은 선례 연구가 많아 짜깁기하기 쉬우니까.

    이 논문은 논문으로서 아무 가치도 없다.

    게다가 이건 <노문>에서 이미 다룬 내용 아닌가.

    “...해서, 발표를 마치는 바입니다.”

    오희라가 발표를 마무리했다.

    금홍이가 진행을 이어갔다.

    “그럼, 지도교수 평가가 있겠습니다. 그 후, 질의응답 시간 갖겠습니다.”

    이현강이 입을 열었다.

    “주제가 좀 고리타분하긴 하지만, 이런 논문도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요즘 문단에서 새로운 거, 새로운 거, 많이 찾는데 학계까지 헐레벌떡일 필욘 없으니.”

    논문은 부족하지만 넘겨주겠다는 뜻이다.

    오희라에게 해주는 마지막 선물처럼.

    시니어 교수가 저렇게 말해버리니, 나머지 교수들도 할 말이 없다.

    학과장인 송 교수는 발표문을 읽어왔는지조차 미지수.

    정미현 교수가 결국 한 마디 했다.

    “노동문학이라는 주제가 너무 나이브하다는 생각은 드는데요.”

    “나이브하죠. 하지만 논문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건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학생의 수준을 고려한 논문입니다.”

    오희라의 얼굴이 벌게졌다.

    정미현 교수는 불쾌한 얼굴이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라는 표정.

    “그럼 질의응답 시간을 갖겠습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책잡을 게 없는 게 아니다.

    두 사람과 얽히기 싫은 거다.

    특히 오희라는 학위를 받으면 얌전히 학교를 떠날 테니.

    그리고 그 학위로 어디선가 글쓰기 선생이라도 하겠지.

    나는 손을 들었다.

    <노문>을 본 이상 그냥 넘어 갈 문제가 아니었다.

    “네. 김혜경 선생님.”

    금홍이가 날 호명하자, 사람들이 모두 날 보았다.

    오희라의 눈동자가 요동을 친다.

    “먼저 논문을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착오가 있으신 것 같아 기분이 참담하군요. 첫째, 현대 한국 문단에서 ‘노동문학’은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 장르입니다. 작년에 김미소 작가가 노동문학으로 등단을 했고 얼마 전엔 노동문학을 다루는 정식 문학잡지인 <노문> 창간호가 나온 시점입니다. 그렇다면 논문의 후반부와 결론부는 모조리 바꾸셔야죠.”

    “김혜경.”

    이현강이 바로 내 말을 막는다.

    “대학원생이라면 문학잡지 정도는 가려 읽어야지. 변방의 오만가지 잡스러운 책들을 다 보나?”

    “단순히, 노동문학을 다뤄서가 아닙니다. 이 논문의 내용. 이미 그 잡지에 비슷하게 실려 있거든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휴대폰으로 목차를 보던 사람들이 흠칫 놀란다.

    “정말이야....”

    “거의 비슷해.”

    오희라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저, 저는 모르는 일...!”

    “네. 그러실 수 있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으니, 이 논문을 계속 진행하시면... 표절이 된다는 겁니다.”

    표절.

    학계에서 이보다 더 위험한 단어는 없다.

    발표회장에 얼음장같은 침묵이 감돈다.

    이현강은 매서운 눈으로 오희라를 노려본다.

    자신의 위신을 깎았다고 생각했겠지.

    “저기, 저도 자료를 안 찾는 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변방에 있는 자료까지 어떻게 다 찾아보나요? 지금 여기 계신 분들, 혜경이 빼고는 <노문>에 대해서 아무도 몰랐잖아요.”

    “하지만 선배님께서 모르시면 안 되죠.”

    낮고 침착한 말투.

    놀랍게도 지훈이었다.

    “예비발표를 준비하는 저도 수없이 많은 자료를 뒤지고 또 뒤지면서 혹시나 중복된 내용이 있을까 불안해합니다. 본 발표자는 더 많이 찾아보셨어야죠. 조금만 검색하면 나오는 걸, 그걸 하지 않아서 이 난리가 난 게 아닙니까. 자료 조사는 논문의 기본입니다.”

    지금껏 똥이 더러워 피해왔던 지훈이었다.

    당황한 오희라가 입을 다물었다.

    이 기회를 놓칠 송 교수가 아니었다.

    “이 교수님께서 지도를 다시 하셔야겠습니다.”

    이 교수와 송 교수는 저번 총장 일로 사이가 멀어졌다.

    이현강은 송 교수와 상대도 하기 싫단 얼굴이었다.

    그는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한 학기 미뤄야겠군요. 오희라는.”

    “교수님! 하지만 저는...!”

    학교를 더 다닐 여유가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겠으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신없던 논문 발표가 그렇게 마무리됐다.

    나는 자리에 돌아 온 지훈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아후... 참을 걸 그랬어요. 그런 인간이랑 상종 안 하는 게 최곤데. 저도 논문 준비하면서 힘들었나 봐요.”

    “아니야. 너도 오래 참았어.”

    “저기, 혜경 선배님. 이현강 교수님께서 잠깐 와보시라는데요?”

    한 학생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이현강이?

    나는 교수석에 앉아 있는 그에게 갔다.

    “부르셨습니까.”

    “오랜만이군. 네가 지금 몇 학기지?”

    “박사 2학기입니다.”

    “아직 멀었군. 제대로 하도록 해. 아까 보니 아는 것도 많던데. 잘 나가는 작가의 논문 수준이 아주 기대가 돼.”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대학원생은 지도교수 없이 논문을 쓸 수도, 심사에 부칠 수도 없다.

    즉, 내 학위와 졸업은 그에게 달렸다는 것.

    하지만 나 역시, 결심한 게 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제가 교수님 밑에서 논문을 쓸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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