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 3814017
#
다시 사는 천재 작가 - (27)
다시 사는 천재 작가 27
금홍이가 막장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 아닌가?
세계 고전 영화만 볼 것처럼 생겼는데.
“음...막장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예요? 보통 문창과 학생들을 꺼리잖아요.”
금홍이가 픽 웃는다.
“그건 내숭이죠. 순수문학만을 추구하는 ‘척’, 대중 콘텐츠는 소비 안하는 ‘척’. 물론 드라마 자체를 안 보는 애들도 없진 않겠지만...대부분 볼 걸요? 또, 막장은 한 번 보면 놓지 못하게끔 만들어놓잖아요.”
하긴. 김혜경도 막연한 거부감 때문에 막장 드라마를 안 보긴 했다.
한 편이라도 진지하게 봤다면 상황은 달랐을까.
“금흥 선생님, 혹시 막장을 쓰기 위한 팁이 있을까요?”
“풉...막장을 쓰기 위한 팁이요?”
금홍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말아다오. 나는 진지하단 말이다.
“카페테리아에서...커피 사드릴게요.”
“지금요?”
슬쩍 시계를 봤다.
오후 3시.
교학팀이 가장 한가하고, 잠이 오는 시간.
“지금 당장. 가죠.”
“좋죠.”
금홍이와 나는 교내 카페테리아로 왔다.
아이스 카페 모카를 두 잔 시켜서 금홍이가 잡아 놓은 자리로 갔다.
햇살을 받은 금홍이는 예뻤다.
어딘지 즐거워 보이기도 했고.
“여기요. 코코아 맛 밖에 안 나는 카페모카.”
농담 삼아 언젠가 금홍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기억력 좋으시네요.”
“막장력은 바닥이에요. 전수 좀 해주세요.”
“집에서 심심할 때마다 드라마 보던 덕을 이렇게 써먹네요.”
금홍이는 빨대로 카페모카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내게 말했다.
“사실 ‘막장’이라는 게 정해진 개념은 아니잖아요. 상황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요.”
“그렇죠.”
“혜경 샘이 생각하시는 ‘막장’이란 뭐예요?”
글쎄.
이 경우엔 혜경의 기억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머릿속에 있는 거라곤...
“김치 싸대기?”
“하하...그럴 줄 알았어요. 저도 막장 드라마에 빠지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건 정말 극단적인 경우고요.”
“그럼 일반적으로는요?”
“음...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머릿속에 이런 걸 정리하고 다니는 게 아니니까요...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자면...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공감되는 상황이 아니라,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요?”
“맞아요. 그런 거 있잖아요. 저기 나오는 저 감정이 뭔지도 알고, 저 상황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도 알아서 공감하고 싶지 않은데...상황설정이 너무 강렬하게 임팩트가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공감해버리고 말잖아요.”
아하. 이해가 됐다.
“그래서 욕 하면서도 보게 되는 힘이 있다, 이거네요.”
“그렇죠. 출생의 비밀, 치정,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복수심...이런 거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봐 왔잖아요. 그래서 대충 어떤 감정인지 알지만 그 상황을 새롭고 자극적으로 그려놓으면 어느덧 빠져들게 되는 거예요.”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알지만 빠져드는 것...알기에 더 편하게 공감하는 것...
하지만 강렬한 것, ‘막장’.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근본적으로는 시청자들이 별달리 머리를 쓰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는 클리셰라는 거네요. 그 클리셰를 눈 못 뗄 정도로 강렬하게 표현해야 하는 하고요.”
“다행이에요. 금방 이해하셔서.”
금홍이 생글생글 웃는다.
“그런데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티 나요?”
엄청 나는데. 무슨 좋은 일 있나?
“별 건 아니고, 제가 혜경샘한테 도움이 된다는 게 신기해서요. 등단작가에 이젠 프로 극본가인데. 모르는 걸 제가 알려드리는 셈이니까...제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잖아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말이었다.
금홍이가 날 좋게 봐줘서 좋긴 하지만,
어딘지 자신감 없는 모습이 좀 안됐기도 하고.
금홍인 문학 쪽에 자신감이 없다.
이게 다 김한 그 놈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감을 가지세요’라고 쉽게 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그건 금홍이 자신만이 이룰 수 있는 깨달음이니까.
난 그저 곁에서 지켜봐주는 수밖에.
“이 드라마, 잘 되면 금홍 샘 덕이에요.”
“말씀이라도 감사하네요. 아무튼, 파이팅이에요 혜경 샘.”
금홍이가 밝게 웃었다.
저 미소를 봐서라도 <무너지는 날>을 꼭 성공시키고 싶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나는 책상 앞에 붙어 앉아 계속 극본과 씨름을 했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그런 상황은 너무 많은데.”
잠깐, 공감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작품을 통한 ‘공감’이라는 것에는 많은 요소가 필요하다.
받아들이는 개인의 감성 수준,
시대적, 사회적 차원의 공감 코드,
또...
‘작품’과 어울리는 ‘상황’.
그래.
집중해야 할 건 결국 작품의 결이다.
시청자들을 공감의 구덩이로 밀어 넣기 위해서는 드라마 자체가 그 공감과 어울려야 한다.
그 즈음에서 떠오른 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조금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내겐 순호의 죽음이 그랬다.
순호가 죽었다는 건,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젊어서 죽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그 충격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슬픔의 감정.
“죽음...죽음...드라마의 죽음이라면...복수...분노와 연결되겠지.”
<무너지는 날>은 무거운 작품이다.
치정이나 집안싸움 같은 ‘막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그런 설정이 초반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순 있겠지.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초반부가 둥둥 뜨고 만다.
지금으로선 ‘죽음’을 이용하는 게 최선의 선택.
‘막장미’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자.
억지스러운 ‘죽음’도 안 돼. 진입장벽만 높아질 뿐이다.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하는 거야.
<무너지는 날>과 같은 전문직 드라마에 어울리는 ‘죽음’.
그것엔 보다 비장한 무게감이 필요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부모의 죽음’이란 막장이 이 드라마의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린다는 걸.
나는 <무너지는 날>의 프롤로그에 주인공의 부모가 괴한의 습격에 죽는 장면을 넣기로 했다.
부모를 죽인 건 다름 아닌 삼촌.
하지만 살해의 이유는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건 ‘집’ 뿐이다.
그리하여 집에 담긴 기억을 읽는 주인공의 능력은 그 자신의 서사와도 자연스럽게 섞인다.
길을 잡아 놓으니 집필은 속전속결이었다.
주인공에게 확실한 동기가 주어지니 행동도 명확해졌다.
좀 더 ‘주인공스러워’졌달까.
사흘 후, 나는 <무너지는 날>의 새로운 1, 2화 극본과 16회 분의 기획안을 강인춘 PD의 메일로 보냈다.
약속했던 날보다 하루나 더 빨리 보낸 셈이었다.
***
강인춘 PD는 느지막이 침대에서 눈을 떴다.
어젯밤, <무너지는 날> 제작을 위해 제작사와 투자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워낙 기대작이라 투자는 무리 없이 들어오는 중이었다.
다만, 그들은 송예나 극본가가 극본 집필에 참여하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 사람들은 이 작품을 성공작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대박작으로 만들고 싶은 거지.’
강인춘 PD는 숙취에 찌든 몸을 겨우 일으켰다.
일어나자마자 <무너지는 날> 극본부터 생각하다니.
자신도 어느새 이 작품에 몰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습관처럼 컴퓨터를 켰다.
하루 만에 수북하게 쌓인 메일을 하나씩 살펴보던 강인춘 PD가 살짝 놀랐다.
“벌써?”
이상의 메일이 와 있었다.
[<무너지는 날> 수정본을 보냅니다.]
강인춘 PD는 달력을 보았다.
약속했던 날보다 하루나 빨랐다.
“흠...여유 있다 이건가...당돌한데.”
강인춘 PD는 메일을 열어 극본 두 편을 다운로드 했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음...으흠...음...”
강인춘 PD의 눈이 점점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다급하게 수정된 기획안을 다운받아 열었다.
“...이건...”
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놀라움도 잠시, 그의 손 사이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큽...크큭....아...아하하하하!!”
그리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진짜 물건이네....”
그는 이상의 메일을 그대로 송예나 극본가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톡을 남겼다.
-지금 쓰는 거 당장 멈추고 내 메일 한 번 봐봐.
***
같은 시각.
송예나 극본가는 책상에 붙어 앉아 <무너지는 날> 극본을 수정하고 있었다.
글은 잘 풀려가고 있었다.
워낙 본판이 좋으니 조금만 손을 대도 장면들이 살아나는 듯했다.
송예나 극본가가 설정한 ‘막장미’는 역시 치정이었다.
사랑했던 여자의 배신으로 시작하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방식.
치정은 ‘막장미’를 살려주는 가장 안정적인 방법이었다.
송예나 극본가의 장기이기도 했고.
‘이정도면 공동 집필로 이름을 올릴 수 있겠지.’
그때였다.
우웅-
강인춘 PD의 톡에 핸드폰이 울렸다.
-지금 쓰는 거 당장 멈추고 내 메일 한 번 봐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송예나 극본가는 고개를 갸웃하며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함에는 강인춘 PD가 전달한 이상의 메일이 있었다.
“벌써 다 썼다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파일을 다운받아 열어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마우스 휠을 굴려 극본을 읽었다.
“...아...그렇구나, 죽음으로 초반의 기선제압...음...아...”
시간이 지날수록... 감탄사조차도 내뱉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극본을 다 읽었을 때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송예나 극본가는 이번엔 기획안을 다운받아 열어보았다.
기획안을 읽는 그녀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이건...이건 정말...”
우웅-우웅-
강인춘 PD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송예나 극본가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PD님.”
-봤어?
“아...예.”
-어때?
“아...이 사람...”
-대단하지? 크흐흐...
강인춘 PD는 벌써부터 신이 났는지 웃음을 숨기질 못했다.
그 역시, 이 극본을 보고 감을 잡은 것이다.
이 작품은...
“이건...그냥 대박작이 아니에요.”
-크크크....
“초 대박작이라고요.”
-아하하하하!! 맞아, 송 작가. 나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
“하아...저는...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기분이에요.”
송예나 극본가는 방금 전까지 애지중지하며 써내려가던 극본을 보았다.
자신의 수정본은 흥행을 보장할 만큼의 재미는 있다.
하지만...이상의 <무너지는 날>을 보니 알 것 같다.
치정이란 막장은 이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상의 수정본이 확실히 좋았다.
작품의 무게와 초반에 시선을 끄는 소재인 ‘아버지의 죽음’이 아주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었다.
또, 그 ‘막장미’가 순문학을 하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품격 있는 대사들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저는 처음 알았어요. ‘막장미’가...이렇게 우아할 수도 있네요. 하하...하...”
송예나 극본가는 결국 힘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가 완전히 졌어요.”
-맞아, 송 작가. 이번엔 안 되겠어.
“말씀 안 하셔도 알아요. 이번엔 뒤에서 박수나 쳐야겠어요.”
송예나 극본가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개의 극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것도 경쟁이라면 경쟁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 경쟁에서 완전히 졌다.
하지만...나쁘기만 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런 경외감을 신인의 극본에서 느낀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극본의 세계에서도...천재는 천재일 수밖에 없나 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