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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26)
다시 사는 천재 작가 26
강인춘 PD가 날 부른 곳은 추레한 소줏집이었다.
피차 부담을 갖지 말고 만나자는 뜻이겠지.
드르륵-
나는 덜컹거리는 유리문을 열고 소줏집에 들어섰다.
“여깁니다-! 이상 작가님!”
가게 한편에서 중년의 사내가 날 불렀다.
듬성듬성한 흰 수염과 야구모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통통한 중년 여자.
저 여자가 바로 극본가구나.
“반갑습니다. 이상 작가. 강인춘입니다. 이쪽은 극본가 송예나 작가예요.”
“영광입니다, 이상 작가님. 소설 잘 읽고 있어요.”
두 사람 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문학가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오랜 사회생활로 다져진 웃음이었다.
“이상입니다. 반갑습니다.”
“앉으세요. 메뉴는 우리가 멋대로 시켰습니다. 소주에 홍합탕,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죠.”
“일단 한 잔 받으십시오. 당선 축하주입니다. 어허허허!!”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짠!”
우리 셋은 잔을 부딪치고 소주를 마셨다.
속이 알싸하게 타들어간다.
“신인 공모 심사하면서 <무너지는 날>처럼 좋은 작품은 처음 봤어요. 그렇죠, PD님?”
“그럼. 내가 탈락작들 안 살펴봤다면 큰일 날 뻔했다니까.”
“탈락작들이라뇨?”
내 물음에 강인춘 PD가 빈 잔들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어휴, 다 끝나서야 하는 말이지만...외부 심사위원 초빙을 잘못했거든요. 교수 한 분이 이상 작가님 작품을 떨어뜨린 겁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자기 입장에서는 눈에 안 띄는 작품이라 떨어뜨렸다고 하시는데...<무너지는 날>이 눈에 안 띄면 대체 뭐가 눈에 띄는 건지. 아무튼 그 분은 다신 안 부를 생각이에요.”
송 교수 얘기구나.
나는 겨우 웃음을 삼켰다.
그나저나 송 교수가 부당하게 떨어뜨린 내 작품을 살려주다니.
강인춘 PD, 이제 보니 <무너지는 날>의 은인이다.
나는 기분 좋게 소주를 한 잔 더 마셨다.
송예나 극본가가 바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다들 말술들이다.
방송계 사람들이라 그런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폐 쪽이 좀 안 좋아서요. 혹시 물로 따라주실 수 있으십니까?”
술은 여기까지.
사회생활 하자고 내 몸을 망칠 순 없다.
송예나 극본가는 물로 새 잔을 채우며 말했다.
“이상 작가님은 역시 소설가라 그러신지 에고가 강하시네요.”
에고(ego).
즉, 사람의 자아나 자의식.
풀어보자면, ‘너,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아’라는 의미.
“네, 맞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단 강한 편이죠.”
강인춘 PD는 내게 바로 흥미를 보였다.
“그런 분이니 그런 획기적인 방법으로 글을 발표해 오셨겠죠. 홈페이지 말입니다. 그걸로 재미를 좀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재미를 보다.
내숭 떨기 좋아하는 문학가들은 좀처럼 쓰지 않는 표현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들의 화법에 맞춰야, 어서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재미를 봤죠. 어느 순간부터는 통장에 얼마가 들어왔는지도 세지 않게 되더라고요.”
내 대답에 두 사람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인춘 PD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화통하신 분이라 다행입니다. 문학판엔 너무 순진한 분들이 많아서 사실 저희끼리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송예나 극본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인춘 PD는 계속 말했다.
“홈페이지에서 이상 작가의 글을 보고, 필명이 아깝지 않단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순문학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소설을 몇 배는 읽고 살아오지 않았겠습니까. 선생님의 작품은...대단해요. 이런 분이 드라마 극본까지 그렇게 잘 쓰셨으니, 사실 저희 쪽에서도 할 말이 없어요. 잘 했다고 칭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랄까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극본은 처음 써보신 건가요?”
“그런 셈이죠. 소설을 쓰느라 바빴으니까요.”
“건축에 대해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강인춘 PD가 물었다.
“아주 친한...쌍둥이나 다름없는 친구가 건축기사거든요.”
“극본에서 나온 폐가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에도식 건물이란 설정도 신기했어요. 글로만 봤는데도 굉장히 생동감 있는 건물이 상상되더라고요. 자료 조사는 어떻게 하셨어요?”
이번엔 송예나 극본가가 물었다.
딱히 자료 조사는 하지 않았다.
그저 기억 속 건물들을 글로 써내려갔을 뿐.
“고서들을 많이 뒤졌죠. 어느 정도 상상력도 가미했고요.”
“크으...이런 건 이상 작가밖에 못 쓰겠어. 그렇지, 송 작가?”
송예나 극본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수정이 필요하다는 부분에는 동의하시죠, PD님?”
구렁이 담 넘어 가듯 대화의 주제가 넘어간다.
“그건 그렇지. 아무래도...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이상 작가. 작품은 아주 훌륭하니까.”
“수정을 할 거란 예상은 충분히 하고 왔습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강인춘 PD가 눈짓으로 송예나 작가에게 바통을 넘긴다.
그러자 송예나 작가가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속’된 느낌이 부족해요.”
속된 느낌.
좋게 말하면 평범한 느낌, 나쁘게 말하면...천박한 느낌.
“대중성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내 작품은 충분히 ‘대중적’이다.
대중이 공감할 만한 상황 설정, 쉬운 장면화, 감정선.
그게 갖춰지지 않았다면 이들은 날 뽑지 않았을 것이다.
강인춘 PD가 말했다.
“대중성은 충분해요. 하지만 말입니다. 요즘 드라마는 작품성과 대중성만으로는 승부할 수 없어요. 특히나 신인 작품은 더욱 그렇죠. 속되다는 건...요샛말로 ‘막장미’라고도 하죠. <무너지는 날>에는 막장미가 덜 해요.”
“막장미라고요?”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대중적인 것을 넘어, 사람들을 기함하게 하고 때로는 욕까지 나오게 하는 ‘막장미’가 필요하다니.
“요새는 하도 독한 드라마가 많이 나와서 그래요. 초반에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시청률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업계의 어두운 현실이랄까요.”
송예나 극본가는 소주를 들이켰다.
“요즘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문법이에요. 하지만 문법서에는 적혀 있지 않죠.”
그녀의 말처럼, 김혜경이 배운 드라마 작법에는 ‘막장미’같은 단어는 없었다.
확실히 드라마는 유행에 민감하고 현장감이 강하구나.
“초반부에서 좀 더 시선을 끌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맞습니다.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요.”
강인춘 PD가 송예나 극본가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어때요, 고치실 수 있겠습니까?”
이건 질문도 아니다.
답은 정해져 있다.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 고쳐야겠죠.”
“화끈해서 좋습니다! 하하하!”
“하지만 쉽진 않으실 거예요. 순문학을 하셨던 분이라. 제가 도와드릴게요. 저와 같이 집필하시죠.”
송예나 극본가가 말했다.
그녀는 드라마 업계의 잘 나가는 작가다.
이런 극본가가 내민 손을 거절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같이’ 쓰자니.
‘같이’의 범위가 어디까지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신인 극본가들이 안정적으로 첫 작품을 쓸 때 왕왕 있는 일이에요. 물론 이름은 공동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상 작가님이 커리어에는 문제가 안 되죠.”
송예나 극본가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덮어놓고 안 된다고 할 수도, 덥석 제안을 물 수도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보며 생각했다.
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만약 거절한다면,
내가 과연 ‘막장미’라고 하는 21세기형 대중코드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
그때였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강인춘 PD가 들어왔다.
그는 은근슬쩍 내 옆에서 볼일을 봤다.
벌써 술기운이 많이 오른 듯,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이상 작가님,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겁니다.”
“...예?”
“드라마판은...정글이라 이 말입니다.”
드라마판은 정글이다.
강인춘 PD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저 말의 속뜻은 어렵지 않다.
공동 작업이 대부분인 드라마.
넋 놓고 있다간 내 이름이 뒤로 밀릴 수 있단 뜻.
정신이 번뜩 났다.
난 화장실을 나가 자리로 돌아왔다.
송예나 극본가는 내 그릇에 홍합탕을 덜어주며 말했다.
“생각은 해보셨어요?”
“예. 결정했습니다.”
“어떻게요?”
“이 극본, 저 혼자 고쳐보겠습니다.”
그녀가 나를 빤히 보았다.
“...쉬운 작업이 아니에요. 이상 작가님.”
“쉬운 작업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려워도 제가 해야죠.”
“....”
“제 거니까요.”
<무너지는 날>에 나 외의 다른 작가의 이름을 올릴 생각은 없다.
그녀가 아무리 잘 나가는 극본가가라 하더라도.
이 극본의 작가는 어디까지나, 나 이상이다.
송예나 극본가는 내 반응에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음...이상 작가님. 드라마는 소설이랑 달라요. 흥하지 못할 것 같은 작품은 애초에 제작이 안 될 거고요. 신인 작가가 고집을 부리다가 제작이 엎어진 경우도 왕왕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보낸 1,2화. 최소한 언제까지 수정해서 드려야 여유롭게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송예나 극본가와 나의 신경전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강인춘 PD는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일주일? 아니, 닷새.”
“충분합니다. 고쳐서 보내드리죠.”
나는 쐐기를 박았다.
“그 수정본이 부족하다 여겨지시면, 그때 저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송예나 극본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려우실 텐데...”
“일단은 믿어 보자구, 송 작가.”
강인춘 PD가 송예나 극본가를 달래듯 말했다.
***
‘신인 극본가’ 이상이 떠난 후, 소줏집엔 강인춘 PD와 송예나 극본가만 남았다.
송예나 극본가는 소주를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켰다.
“하아...저대로 둬도 될까요?”
“송 작가, 신인 작품에 이렇게까지 욕심내는 건 처음이네?”
송예나 극본가의 필모는 화려했다.
그 중 반 정도는 신인의 작품에 중간 투입되어 ‘공동 집필’이 된 경우였다.
그러나 그녀를 욕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신인의 동의하에 일어난 일이고, 그녀에겐 작품을 성공시키는 능력이 있으니까.
“<무너지는 날>, 잘만 다듬으면 정말 대박작품이 될 거란 말이에요. 그걸 저 신인작가가 해낼 수 있을까요?”
“문학천재잖아. 난 좀 기대가 되는데?”
“순문학과 방송문학은 달라요. 그냥 손 놓고 맡기기엔 불안해요. 작품성만 좋고 중박 작품으로 끝날까 봐. PD님은 불안하지도 않아요?”
“내가 왜? 송 작가가 있는데.”
“....”
“<무너지는 날>, 요즘 따로 수정하고 있잖아. 이상 작가 원고가 별로면 바로 대체하려고. 아니야?”
강인춘 PD가 능구렁이처럼 물었다.
송예나 극본가가 새침하게 웃었다.
“노코멘트 할래요.”
‘여우같긴.’
송예나 극본가는 방송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극본가들의 세계는 PD들의 세계보다 은밀하고 예민했다.
어리바리한 작가들은 ‘공동작업’이라는 명목 하에 작품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십상이었다.
강인춘 PD의 입장에선 깊이 관여하기에 골치 아팠다.
결과적으로 좋은 글이 온다면 누구의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이상 작가... 태도는 마음에 드는군.’
방송계는 말 그대로 정글.
그리고 작품은 극본가의 자식이나 같다.
함부로 자기 자식을 남에게 맡기는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또...두 작가를 제대로 경쟁시키고 싶기도 했고.
***
교학팀 사무실.
평소와 같은 풍경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어젯밤 강인춘 PD와 송예나 극본가와의 만남 이후 생각이 많아졌다.
송예나 극본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방송계는 문학계와는 다르다.
소설가는 작품이 실패했을 때 오로지 혼자 리스크를 감당한다.
하지만 방송계는 억대의 돈이 투입되는 곳.
극본가가 잘못하면 광범위한 피해자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막장미’는 초반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주는 안전지대 같은 거다.
‘막장미’를 제대로 넣지 못하면 <무너지는 날>의 주도권은 송예나 극본가에게 빼앗긴다.
그것도 ‘공동 집필’이라는 합리적인 명분하에.
장담하건데 송예나 극본가도 자기만의 <무너지는 날> 수정본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이건...경쟁이다. 싸움이 아니라.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내가 쓴 극본을 차근차근 살펴봤다.
확실히 ‘막장미’가 부족했다.
부드럽고 우아하게 시작하고, 영상미로 눈길을 잡는다.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의 눈에는 심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너지는 날>에 어떤 ‘막장미’를 넣어야 할까...
“막장이라...”
“막장이요?”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나보다.
금홍이가 고개를 살짝 빼고 날 보았다.
“...금홍 선생님, 막장 드라마 좋아해요?”
“좋아하다니요...”
금홍인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는 듯 대답했다.
문창과 학생들은 막장이니 치정이니 하는 걸 은근히 깔봤다.
순수문학을 공부한다는 자부심 아닌 자부심들.
그때, 금홍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사랑하죠, 막장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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