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익숙한 옆모습이었다. 우성과 박윤성을 사이에 두고 있는 그는 머리 뒤쪽으로 나 있는 뿔을 등 뒤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백작’이라는 지위를 과시하듯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하멜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백작급 악마가 왜 여기에 있는 걸가?
의문이 들었지만 우성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볼락의 등장은 그에게 있어서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박윤성이 천사 진형의 플레이어인 이상, 그는 볼락의 적이었으니 말이다.
“천사들의 똥강아지가 들어왔다더니, 진짜였군.”
“넌 뭐냐? 악마야?”
휘익-.
하늘에 떠 있던 순백의 검 하나가 볼락을 향해 날아왔다. 하나라고 해도 우성에게는 무시 못 할 위력을 가진 검이었는데, 볼락은 손을 들어 순백의 검을 잡아냈다.
지이이이잉-.
볼락의 손아귀에 잡힌 순백의 검이 낮게 울음을 떨었다. 가녀린 동물이 짐승의 손아귀에 잡힌 것처럼, 순백의 검은 한동안 빛을 내뿜으며 울더니 이내 소멸되었다.
“미카엘의 개였나? 밑에 놈들이 당할 만하군.”
볼락은 곱상한 얼굴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박윤성은 자신의 검을 손쉽게 막아낸 볼락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을 찡그렸다.
볼락의 시선이 옆에 있는 우성에게로 돌아갔다. 그 시선을 다시 마주하자 우성은 몸을 흠칫 떨었지만, 금세 안정을 찾았다.
“새로 들어온 이방인이냐?”
“그… 렇습니다.”
“천사들의 졸개가 들어왔다기에 왔는데, 제법 기이한 인연을 만났구나.”
젊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늙은이 같은 말투였다. 볼락의 말에서 우성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천사 진형 플레이어인 박윤성은 엄연히 말해 우성뿐만이 아닌 악마 진형 모든 플레이어들의 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NPC이기도 한 악마 볼락도 포함되는 말이었다.
악마 진형 플레이어들, 그리고 앞의 말로 보아 그의 수하들까지 박윤성에게 당하자 그가 직접 나선 듯했다.
“야, 너 뭔데 미카엘을 알아?”
“그걸 굳이 말 해줘야 하나?”
볼락의 몸이 옆으로 돌아가 박윤성과 눈을 마주쳤다. 시커먼 볼락의 눈을 마주한 박윤성이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미간을 좁혔다.
“그놈의 뿔을 보니 너도 악마인 것 같은데… 그래도 제법 등급이 높나 봐?”
“역시, 내 종들을 죽인 게 네놈이었구나.”
“응. 경험치 포인트도 제법 괜찮고, 가지고 있는 아이템도 제법 돈이 되겠더라고. 그리고 여자 악마들은… 킬킬. 하나같이 뭐 그리 미인들이던지.”
황홀한 표정을 짓던 박윤성은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발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 모르나 볼락이 수하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꽤나 화가 날 법도 했다.
하지만 볼락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볼락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본디 보통 악마는 천사들과는 달리 수하를 썩 아끼지 않지만…….”
파스스스-.
볼락의 주위로 바닥에 무성히 나 있던 잡초들이 썩어갔다.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가던 잡초들에게서 은은한 검은색 안개가 흘러나와 볼락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 볼락은, 보통 악마는 아니라 말이지.”
“볼락?”
고개를 갸웃거리던 박윤성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났어! 하멜의 영주라며? 악마진형 소도시 하멜의 백작급 악마. 이야, 이거 대단하신 분이 나타나셨네?”
스스스스-.
하늘에 떠 있던 순백의 검이 형태를 바꾸어 창으로 변했다. 박윤성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고, 볼락의 몸에서는 은은한 검은 안개가 피어 올랐다.
“궁금하다. 배작급 악마를 잡으면 뭘 줄까? 아, 너희 악마들은 뱃속에 하나씩 정수를 가지고 있었지? 그거만 꺼내서 팔아도 돈 좀 되겠다. 키킥.”
“내가 존경하던 악마께서 이런 말을 하셨지.”
쐐애애액-!
수많은 순백의 창이 일제히 볼락을 노리고 쏘아졌다. 일대를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위력이었다. 근처에 있던 우성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이, 볼락의 말이 이어졌다.
“너무 높은 굴뚝을 쳐다보면, 모가지가 부러지는 법이라고.”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말이었다. 우성의 눈이 반사적으로 번쩍 떠졌다. 그 순간, 우성은 눈을 감기 전과는 전혀 다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
“알겠느냐?”
어디론가 흩어진 순백의 창들. 그리고 여유로이 서 있는 볼락과, 눈이 까뒤집힌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박윤성.
눈을 감고 있었던 터라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박윤성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당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우성의 시선이 볼락에게로 향했다. 눈 깜짝 할 사이 박윤성을 제압한 그는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었다.
“케켁. 미친… 뭐야 이거…….”
“뭐긴? 모가지가 부러진 게지.”
볼락이 천천히 쓰러져 있는 박윤성을 향해 걸어갔다. 박윤성은 다가오는 볼락을 누워 있는 상태로 보다가, 거짓말처럼 몸을 허공에 띄웠다.
“시팔, 뒤져!”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 선(善)의 천사 진형의 플레이어가, 악(惡)의 대명사인 악마에게 할 말로는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손에 가득 맺혀 있는 새하얀 빛은 악마에게는 제법 위협적이겠다 싶었다.
파직-.
“캬악!”
볼락이 마주 손을 뻗자, 박윤성은 볼품없이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워낙 압도적인 격차에 우성이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 우연히 그의 눈에 볼락의 손이 들어왔다.
‘피?’
볼락의 손에 흐르는 검은 액체는 분명 피였다. 얼핏 악마의 피는 검은색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 역시도 박윤성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수백 자루의 순백의 창을 그렇게 쉽게 막아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대단하긴 대단했다. 손에 피 조금 묻히는 정도로 박윤성을 이토록 쉽게 제압하다니. 반대로 생각해 보면, 소도시라고는 하나 도시 하나를 다스리는 백작 급 악마 하멜에게 상처를 입힌 박윤성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결국은 둘 다 어지간한 거지만.’
두 사람에 비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지만 우성은 절망하지 않았다.
우성이 아포칼립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고작 이십일도 채 되지 않았다. 현실에서의 시간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이틀로 줄어든다.
반면 박윤성은 최소한 4회 차 플레이어(사실은 2회 차였지만 우성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였다. 우성은 아직 아포칼립스 내에서 ‘신규 플레이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한 상태였고, 같은 회 차의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충분하다 못해 사기적인 스텟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쓰러져 있는 박윤성과 그의 앞에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볼락을 보며 우성은 발을 떼었다.
볼락은 땅에 쓰러져 있는 박윤성을 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박윤성은 한쪽 날개를 퍼덕이며 간신히 뒤로 조금씩 움직였다.
파직, 파지직-.
박윤성이 날리는 순백의 창이 볼락의 주위에서 흩어졌다. 처음에 비해 숫자도 줄고, 위력도 볼품 없이 약해진 순백의 창은 더 이상 볼락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흐음. 이 녀석을 어쩐다.”
“오지 마! 꺼, 꺼져!”
“시끄러운 입은 일단 내버려 두고…….”
콰드득-.
“끄아아아아악!”
“일단, 눈에 거슬리는 날개부터 찢어야겠군.”
어느새 박윤성의 뒤로 돌아간 볼락이 그의 한쪽뿐인 날개를 손으로 뜯어냈다. 새의 날개가 뜯어지면 이런 소리가 날까 싶었는데, 뜯어진 부위로는 이상하게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역시 네 날개가 아니었구나.”
“이, 이, 이, 개새끼가! 죽여 버릴…….”
푸욱-.
“다음은 입을 좀 다물려야겠군.”
볼락의 두 손가락이 박윤성의 입을 꿰뚫었다. 목젖을 꿰뚫려서인지 박윤성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조용해진 박윤성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볼락은 그의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피를 보는 게 겉으로 보는 모습과는 달리 역시 악마는 악마구나 싶었다.
얌전하고 조용해진 박윤성은 고통을 못 이겨서인지 아니면 체력이 다해서인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축 늘어뜨렸다.
“어차피 이방인들은 죽어도 몇 번 정도는 다시 살아난다지? 피를 본 이상 그냥 죽여줄 순 없지. 하하하.”
역시 악마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볼락은 크게 웃었다. ‘어떻게 해야 잘 죽이는 걸까…….’하며 고민하는 볼락의 옆으로 우성이 다가왔다.
“그 녀석, 저한테 주실 수 있습니까?”
“응? 아, 이방인이구나.”
볼락은 우성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이 녀석을 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제가 죽일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죽일 수 있게?”
볼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과 원한 관계라도 있는 것이냐? 가령 네게 중요한 사람이 이 녀석에게…….”
“그런 건 아닙니다만…….”
우성은 말해도 될까 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플… 아니, 당신들이 말하는 이방인들은 천사 진형의 이방인들을 죽일 때 소량의 힘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제겐 그 힘이 필요합니다.”
우성은 천사 진형 플레이어를 죽였을 때 얻을 수 있는 포인트를 ‘힘’이라고 표현했다. 포인트의 개념을 정확하게 말로 풀어 설명하기도 힘들거니와, 포인트가 곧 ‘힘’이 될 수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NPC인 볼락이 박윤성을 죽이면 단순히 죽이는 것에서 끝날 것이다. 박윤성도 라이프 하나를 잃을 뿐, 추가적인 포인트의 손실은 없을 것이고, 우성도 눈앞에 뻔히 보이는 다량의 포인트를 놓치는 셈이었다.
볼락은 우성이 말한 플레이어들간의 관계에 꽤 관심을 보였다.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를 죽였을 때 힘을 빼앗을 수 있다는 설정은 NPC인 볼락에게는 꽤 생소한 이야기였다.
“힘을 빼앗는다라… 재미있는 이야기군. 그거, 나도 가능한가?”
“아니요. 오직 이방인과 이방인들끼리만 가능합니다.”
“그렇군. 아쉽군. 아쉬워…….”
뭐가 그리 아쉬운지 볼락은 연신 안타까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이내 우성과 박윤성을 번갈아보다 조용히 답했다.
“그러거라.”
“……정말입니까?”
“어차피 내가 죽여 봤자 분풀이일 뿐이고, 이것저것 재미있는 짓을 해봤자 결국 저 녀석에게 고통밖에 안 되겠지. 그러느니 차라리 네가 죽이게 해 힘이라도 빼앗는 게 내 기분도 더 나을 것 같다.”
들으면 들을수록 악마답지 않게 노인네 같은 말투였지만 어쨌건 그 성격 덕분에 큰 떡이 떨어졌다. 반색하는 우성은 볼락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빚 하나 졌다고 생각하고 훗날 잊지나 마여라. 하하.”
“…….”
무슨 악마가 저래?
지금껏 보아온 소도시 하멜의 다른 등급 외 악마들, 혹은 하급 악마들과는 사뭇 다른 성격에 우성은 고개를 설레 저었다. 백작 급 악마는 다른 악마들과 아무래도 성격이 다른 모양이었다.
볼락의 허락을 맡은 우성은 이미 지치고 다쳐서 바닥에 뻗어 있는 박윤성에게로 향했다. 박윤성은 이미 처음 우성과 싸울 때의 여유롭고 패기 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너…반드…시…….”
“죽이겠다고?”
박윤성은 성치 않은 성대를 간신히 열어 우성을 노려봤다. 볼락에게로 향해야 할 분노가 엄한 우성에게로 향한 꼴이었다.
전형적으로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우성이 무척 싫어하는 유형이었다. 박윤성의 목 언저리에 검을 들이댄 우성은 아포피스에 마력을 한 가득 담았다.
“다음에 만날 땐, 꼭 내가 이긴다.”
쉬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