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우웅, 우우웅-.
아포피스가 반응한다. <대리인>스킬의 후유증을 겪은지 얼마 되지 않은 우성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악마와 첫 대면에 아포피스가 반가워 한다는 것을 느꼈다.
‘악마’라고는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인상은 별 것 없었다. 조금 까무잡잡한 황토인 정도의 피부색. 그리고 약간 검붉인 빛을 띠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지만, 머릿속에 생각했던 뿔이나 어금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성이 눈앞의 남자를 ‘악마’라고 규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포피스와의 교감을 통해 이루어진 감각 덕분이었다. 눈앞의 남자에게서는 아포피스에게서 어렴풋이 느껴지던 느낌과 유사한 기운이 풍겼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방인이라. 이름 한 번 잘 어울리는군.’
이곳 세계에서 악마들은 어디까지나 게임 속 NPC. 그들 입장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꾸벅 인사를 한 번 하곤 우성은 처음 만난 악마의 손짓이 향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희뿌연 안개가 점차 옅어지며, 이내 포탈의 입구로 나올 수 있었다.
“어, 나왔네. 야! 뭐 이리 미적거려?”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안현수가 우성을 타박했다. 그의 뒤로는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혜미와 혜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심 혜미와 혜정이 무사히 도망쳤을까 걱정했었는데,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여 안심이었다.
“여기서 밤을 샌 거야?”
“그럼, 어디 가 있으라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혜미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하긴, 도시라면 보통 넓은 게 아닐 텐데 이 넓은 도시 안에서 두 사람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포탈 앞에서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못 오는 상황이었으면 어쩌려고.”
“그럼 뭐, 닷새 동안 기다리지 뭐.”
“……독하다 너.”
사망 패널티, 5일 간 접속 금지. 혜미는 지금 그 패널티를 기다리고 우성과 안현수가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죽은 우성이나 안현수는 현실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혜미나 혜정은 이 자리에서 닷새를 버텨야 한다. 수중에 돈은 넉넉하니 먹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만, 잠자리가 문제일 텐데.
“일단 어디 좀 들어가자. 어휴, 두 사람 피 좀 봐. 얼마나 다친 거야?”
“아니, 이거 내 피 아닌데…….”
“그럼 더 씻어야지. 현수 오빠는 다친 거 맞지? 일단 약부터 사야겠네.”
두 사람을 보자 그래도 좀 활력을 찾았는지 혜미가 우성과 안현수의 옷자락을 강하게 끌었다.
“일단, 좀 쉬어.”
**
시작의 마을과는 달리 하멜에서의 여관은 당연하게도 돈을 받고 손님을 받고 있었다. 소수의 신규 플레이어들과 다수의 기존 플레이어들로 이루어진 도시인 만큼, 금전 문제에 관해서는 철저했다.
길거리에는 돈이 없어 여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플레이어들이 몇몇 보였다. 흡사 현실에서 노숙자를 보는 기분이었는데, 다행히도 우성과 다른 일행의 수중에는 돈이 꽤 있었다.
이곳 아포칼립스는 ‘포션’이라는 약을 팔고 있었다. 외상과 내상 모두에게 즉효라고 할만큼 탁월한 효과를 가진 마법의 약이 바로 포션이었다. 일반 약초에 비해 가격은 비쌌지만 혜미는 돈을 좀 들이더라도 비싼 게 좋다며 우성과 안현수를 설득해 하급 포션 몇 개를 구입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2골드가 빠져나가고 여관을 잡는 데 나흘에 2골드가 소모되었다. 포션 값 2골드에는 생각보다 골드의 값어치가 비싸지 않구나 싶었는데, 숙식을 포함한 네 명분의 여관비가 2골드라는 사실에는 수중의 돈이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박이긴 대박이네.”
온 몸에 빨간색 포션을 덕지덕지 바른 안현수는 우성과 함께 금화와 은화, 동화를 나누며 입을 떡 벌렸다. 동화와 은화만 해도 거의 100골드에 가까웠고, 금화까지 합하면 400골드가 훌쩍 넘었다. 포탈을 이용하고 남은 돈이었다.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돈만이 아닌, 우성은 가장 큰 수확은 여관 안에 놓아둔 마병 옥토퍼스라고 생각했다. 투기장으로 제법 돈을 만졌던 기존 플레이어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노린 걸 보면 결코 적지 않은 값어치를 가지고 있을 게 뻔했다. 우성은 옥토퍼스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를 가질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투기장을 통해 포탈 이용 요금을 포함해 포인트를 벌겠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아니, 부수적으로 옥토퍼스라는 대박을 건졌으니 오히려 생각 이상의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중한 라이프를 하나 잃어버리긴 했지만.
이번 일을 통해 우성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마검을 얻고, 유니크 직업을 얻음으로서 우성은 조금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투기장에서만 해도 너무나도 손쉽게 승리를 연속적으로 거머쥐었으니, 그 착각은 점점 더 깊어졌다.
하지만 ‘강하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신규 플레이어라는 ‘초보자’들 사이에서일 뿐이다.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들 중, 두꺼비가 나왔다고 늑대나 호랑이를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우성은 초보자들 사이에서나 강하다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리인>스킬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아니, 사실 모면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이러나저러나 목숨 하나를 잃어버린 건 다름없으니까.
‘일단은 강해지는 게 먼저다.’
어차피 얼마 안가 있을 ‘퀘스트’를 위해서라도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다른 파티원들도 마찬가지지만, 일단은 자신의 상태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스텟 창.”
[플레이어 정보]
이름 : 우성
직업 : 아포피스의 대리자
국적 : 대한민국
진형 : 악마
성별 : 남자
칭호 : 생존자
클레스 : S
[능력치]
- [근력 : 23] [민첩 : 25] [체력 : 32] [맷집 : 28] [반사능력 : 23] [마력 : 22] [정신력 : 36] [PP : 1807]
: (- 100p)
* 플레이어 특성 : 불굴의 의지 Lv.2 <상세정보>
* 업적 : 죽어가는 숲의 생존자
* 포인트 : 9155p
* Lv. 포인트 : 10011
* Life : ****
눈앞에 떠오른 플레이어 정보 중, 하나 줄어든 라이프(Life)가 뼈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투기장과 기존 플레이어들을 죽여 얻은 다량의 포인트 덕분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 눈에 들어온 부분 말고, 우성이 플레이어 정보를 확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포인트, 그리고 Lv. 포인트.’
포인트의 종류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일반 소원을 행사할 수 있는 일반 포인트였고, 하나는 스킬 숙련도와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레벨 포인트(Level Point)였다.
일반 포인트의 경우에는 원하는 스텟을 올릴 수 있고, 일정량의 포인트를 지불에 라이프를 살 수 있는 등, 여러 방면으로 활용이 가능했다. 사실상 레벨 포인트에 비해 활용도 면에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일반 포인트를 사용해 스텟을 사용하는 건 성급한 감이 있었다.
우선, 우성에게 가장 필요한 건 라이프(Life)였다. 언제 서현이의 수명이 부족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정 개수 이상의 라이프를 가지고 있어야 함은 당연했다. 이번 일로 라이프를 하나 잃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라이프는 절실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스텟 포인트는 게임 초반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따로 포인트를 지불하지 않아도 게임 도중 어떠한 행동을 통해 스텟 포인트가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 스텟의 상승률은 뒤로 성장할수록 더뎌졌다. 마치 다른 게임에서 뒤로 갈수록 레벨 업이 어려워지듯이 말이다.
‘레벨 포인트.’
우성은 1만 포인트의 레벨 포인트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10011포인트로, 이 중 11포인트를 제외한 1만 포인트는 A등급 퀘스트 ‘죽어가는 자의 숲’을 완료한 보상으로 얻은 것이었다.
레벨 포인트는 몬스터를 잡음으로서 획득할 수도 있었는데, 하프 구울을 잡음으로서 우성은 1레벨 포인트씩 총 11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더디게 오르던 레벨 포인트가 A등급 퀘스트를 완료함으로서 순식간에 1만을 넘어선 것이다.
‘이건 아낄 필요가 없지.’
문제는 어디에 투자하느냐다.
현재 우성이 가지고 있는 스킬은 액티브 스킬보다는 패시브 스킬을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포피스에 내제되어 있는 스킬 ‘나가(Naga)’는 사실상 우성의 스킬이라고 볼 수 없어 레벨 포인트로 숙련도를 올리는 게 불가능했다.
‘현재 내 스킬들을 살펴보면…….’
<특성 : 불굴의 의지 - Lv. 2>
*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가진 플레이어는 일정 이상의 출혈에 내성을 가지게 되며, 혼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정 수치 이상의 물리데미지로부터 소량의 면역력을 얻습니다.
* 체력 +4
* 맷집 +4
* 정신력 +2
[패시브 - 마검술 : E. rank]
* 수비를 도외시한 공격적인 검술. 일반 검술보다 훨씬 위력적이지만 그 대신 검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마검의 등급에 따라 위력이 배가된다.
+ 마검 사용 시 근력 1포인트 상승+ 마검 사용 시 민첩 1포인트 상승+ 마검 사용 시 절단력(공격력) 20% 상승
[고유 능력1 - 대리인 : E. rank]
* 반(半) 마검 아포피스의 자아와 힘을 끌어내 몸을 내어준다. 아포피스는 태양신 라와 대적했던 악마로서, 무한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다. 스킬 랭크가 올라갈수록 아포피스의 힘을 더욱 많이 끌어낼 수 있으며, 정신력 스텟과 랭크의 등급에 따라 자아가 아닌 힘만을 끌어낼 수도 있다.
+ 스킬 사용 시, 마검에게 자아를 먹힐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 스킬 사용 시, 500포인트를 필요로 합니다.
[직업 특성 - 절대적인 : E. rank]
* 마(魔)계열의 생명체에게 추가적으로 15%의 피해를, 선(善)계열의 생명체에게 추가적으로 10%의 피해를 입힙니다. 중립(中立)계열의 생명체에게는 5%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 이 특성은 경험치 포인트(Level point)로 올릴 수 없습니다. 마검이 성장했을 때 스킬 레벨이 함께 상승합니다.
[아포피스 - 나가(Naga) - Lv. 1]
* 아포피스는 거대한 뱀의 형상을 지닌 대악마(大惡魔)로 그 휘하에는 수많은 악마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 가장 충실한 심복은 바로 아포피스의 힘을 직접 이어받은 나가(Naga)들이다. 반(半) 마검 아포피스는 주인의 힘(Point)을 사용해 휘하의 나가를 소환할 수 있다.
+ 스킬 사용 시, 400포인트를 소모합니다.
+ 나가(Naga)의 힘은 플레이어의 스텟의 40%를 이어받습니다.
+ 이 스킬은 직업 스킬이 아니기에 레벨 포인트(Level Point)로 올릴 수 없습니다. 마검이 성장했을 때 스킬 레벨이 함께 상승합니다.
‘애매하군.’
몇 가지 스킬들을 나열해 보자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제법 늘은 게 보였다. 하지만 하나하나 확인해 보면,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으면서도 어느 하나 레벨 포인트를 투자할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띠는 스킬은 역시 <불굴의 의지>였다. 우성이 가장 처음 획득한 스킬이자, 플레이어 특성으로 정신력의 근간이 되는 스킬. 어쩌면 마검을 다루는 우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스킬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력은 지금 당장 올린다고 해서 득을 볼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맷집이나 정신력은 어디까지나 마검을 컨트롤 하는 데 가장 필요한 스텟이었는데, <대리인>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아직까지 정신력 스텟이 부족하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를 제외하면 남는 스킬은 <마검술>과 <대리인> 정도인가?’
‘나가(Naga)’와 ‘절대적인’은 레벨 포인트로 올릴 수 없는 스킬이니 결국 선택지는 세 개뿐이었다. <대리인>의 효과를 직접 체험한 우성은 위험이 따르는 만큼 얼마만큼의 효과를 가져 오는지 알기에 <대리인>에도 무게가 기울어졌다.
만약, <대리인>스킬을 아무런 부작용 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포인트가 조금 아깝긴 하지만, 그 한 번으로 얻을 수 있는 힘과 이득은 막대할 것이다.
‘문제는 스킬 레벨업 후의 패널티가 줄어드느냐, 늘어나느냐인데.’
가장 무난한 선택은 <마검술>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공격력과 스텟을 올릴 수 있는 패시브 스킬. 공격력을 올리는 데에는 이만한 스킬도 없었다.
안정이냐, 도박이냐.
아니면 세 개의 스킬을 고루 올릴까?
<불굴의 의지>, <대리인>, <마검술> 사이에서 우성은 한참을 고민했다.
“……역시.”
고민 끝에 우성의 손이 눈앞에 떠오른 스킬들 중, 한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