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소도시 하멜>
살짝 떠진 눈꺼풀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천천히 빛에 눈이 적응하도록 눈을 떴다.
졸린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거기에 더해 우성의 몸은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눈 떴냐?”
안현수의 목소리. 우성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위를 올려다봤다. 가장 먼저 어깨에 들쳐 멘 옥토퍼스가 눈에 들어왔는데, 빼앗기지 않은 걸 보면 다행히 무사하구나 싶었다.
안현수 다음으로는 주위에 있는 시끌벅적한 사람들이 보였다. 번화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꽤 돌아다녔는데, 눈에 익은 곳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설마 대놓고 죽이겠다고 덤비진 않겠지. 게다가 대빵이라는 놈도 죽였으니.”
“아, 맞다. 그랬지.”
마지막 순간, 칼프의 머리를 반으로 베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 직후로는 기억이 흐릿했는데 잠시 찾아온 두통 뒤에 결국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찾았다.
힘없던 눈동자가 번쩍 떠졌다. 그 음성은 누구였을까? 아포피스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 때 우성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너 괜찮냐?”
“기억이 없는 건 아닌가 보네.”
옆에 털썩 앉은 안현수는 꽤 지쳐보였다. 하긴, 투기장에서 경기를 치르느라 밤을 새며 싸우고, 직후에 추격을 받으며 마병까지 사용했다. 그 역시 눈이 빨갛게 충혈된 게, 마병을 사용한 영향인지 아니면 피곤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상처라 몸에서 흐른 피가 온 몸을 축축하게 적신 상태였다. 가까이서 맡아지던 비린내의 정체는 아무래도 피 냄새였던 모양이었다.
쿵-.
심장이 거세게 한 번 뛰었다가 다시 원래의 박동으로 돌아갔다. 정상이라곤 할 수 없지만 처음 <대리인>을 사용했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안정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에는 심장 박동이 끊이지 않고 귀에 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성은 기억을 되짚었다. 마지막 순간, 기억을 잃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정신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자아를 먹힌 게 아니라, 스스로의 자아가 무언가에 의해 광기에 휩싸인 느낌.
다행히 아포피스에게 자아를 먹혔던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린 건 아니었지만, 잠시나마 안현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던 게 떠올랐다.
“……미안하다.”
“뭘. 그 검 때문이지?”
우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안현수의 몸을 더 자세히 살폈다. 혹시 어디 크게 다친 데는 없는지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도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몸에 난 자잘한 상처야 기존 플레이어들과 싸우면서, 그리고 자신과 잠깐 싸우면서 입은 상처였다. 하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정도였다.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겠군.’
우성은 어느새 장갑의 형태로 돌아간 아포피스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대리인>스킬은 분명 기존에 가지고 있던 힘을 몇 배 이상 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스킬이었지만, 그에 따른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패널티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만약 우성에게 <불굴의 의지>가 없었다면? 어쩌면 아포피스에게 완전히 자아를 먹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프를 지불할 틈도 없이 말이다.
게다가 라이프를 지불하고, 잠깐 정신을 차린 직후에도 한 번 피를 보자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자아를 잃었던 건 아니지만, 그 대신 눈앞을 가득 메운 새빨간 시야는 무언가를 죽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는 광기어린 감정을 가져왔다.
라이프를 잃는 것도, 마검의 영향으로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되도록 <대리인>스킬의 사용은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성은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겠다. 이만 가자.”
“움직일 수 있겠어?”
“거뜬히. 그리고 이러고 있는 것도 사실 좀 쪽팔리고.”
주변을 지나가는 NPC나 플레이어들이나, 우성과 안현수를 한 번씩 힐끗거리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들 사이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관심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우성이 먼저 몸을 일으키자 옆에 앉아 있던 안현수 역시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움직였다. 그 역시도 아까부터 이어지던 사람들의 시선이 꽤 부담스러웠다.
우성과 안현수는 지체할 것 없이 곧장 포탈로 향했다. 여관에서 몸에 묻은 피라도 씻을까 싶었지만, 혜미와 혜정이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일단 가고 보자는 생각이 앞섰다.
포탈은 시작의 마을 중앙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 정중앙에 있는 광장의 가장자리 쪽이었는데, 그 근방으로는 신규 플레이어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포탈을 이용하는 플레이어들 역시 하나같이 기존 플레이어들이었다.
역시나 포탈에 도착하자 광장에 모여 있는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우성과 안현수에게로 집중되었다. 멀쩡한 사람들 사이로 피를 떡칠한 사람들은 집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런, 많이들 다치셨군요.”
포탈을 관리하는 NPC는 우성과 안현수를 보자 혀를 끌끌 찼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는데, 꼭 마을의 촌장 같은 느낌이었다.
노인은 우성과 안현수를 위아래로 훑으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해주는 모습이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포탈을 이용하고 싶습니다.”
“어디로 가시겠소?”
“소도시 하멜입니다.”
우성의 대답에 노인의 얼굴이 굳었다. 사근사근하고 안쓰러운 눈길이 의문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긴 왜 가려 하는 거요?”
“네?”
“하여간 요즘 사람들은 멀쩡한 동네를 두고 왜 악마들이 득실대는 도시로 가려는지… 하여간, 아포칼립스의 시작 이후 사람들이 변해도 너무 변했어.”
노인의 한탄어린 중얼거림에 우성과 안현수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NPC인 노인의 입에서 ‘아포칼립스’라는 단어가 들린게 꽤 의외였다.
하긴, 게임 이름이 아닌 단어로만 생각하면 ‘세상의 종말’이라는 뜻도 되니 썩 이상할 건 없었다. 아마도 노인은 아포칼립스를 게임 이름이 아닌, 의미 그대로 단어로 내뱉은 것이리라.
“미안하네. 내 요새 들어 아포칼립스의 시작만 생각하면 자꾸 걱정이 들어서.”
“괜찮습니다.”
“그런가?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것, 노망이라 생각하고 오지랖 하나만 더 떨겠네.”
구부정한 허리를 뒤로 쭉 피던 노인은 부드럽던 눈매를 표독스럽게 세웠다. 그 순간 노인과 눈을 마주한 우성은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나, 천사나 결국은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걸 명심해.”
“……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반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느새 노인의 눈매는 처음의 서글서글한 인자한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 느꼈던 위압감은 간데없고, 다시금 구부정한 허리의 인자한 노인으로 돌아왔다.
악마나 천사나 똑같다.
엄연히 말해 우성의 머릿속에 떠오른 악마는 부정적인, 그리고 천사는 그 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선(善)과 악(惡)의 구분에서 언제나 천사는 선이요, 악마는 악이었다.
그리고 우성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선(善)에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형이 악마로 선택됐을 때 내심 아쉽기도 했는데, 포인트를 모으기 위해서는 차라리 악마 진형이 낫겠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노인은 플레이어가 아닌 NPC였다. 포인트를 모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악인같이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악인이나 악마를 숭배하는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악마와 관련된 좋은 말을 했겠지.
‘무언가 속뜻이 있는 건가?’
궁금증이 동해 막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노인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쯧. 보아하니 새로 들어온 사람들인 모양인데, 돈 버느라 고생하셨나 보오. 내 싸게 드리리다. 두당 4골드씩만 주시오.”
“……?”
피 묻은 몸이 그렇게 불쌍해 보인 걸까? 두당 5골드에서 4골드로 줄어든 금액에 우성과 안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임에서 세일(Sale)을 받아볼 줄이야…….
아무튼 싸게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우성은 주머니에 넣어둔 금화를 8개 세어 노인에게 건넸다. 하나 둘 금화의 개수를 세던 노인이 손안의 돈을 짤랑거리며 손가락으로 포탈 안쪽을 가리켰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돼. 그럼 부디, 자네들이 믿는 신이 자네들을 배신하지 않길 바라네.”
끝까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는 노인이었다. 혹시 초보자 마을을 나서며 남기는 NPC의 으레 적인 말인가 싶었는데, 확인할 만한 길은 없었다.
포탈은 시작의 광장으로 나왔던 푸른 안개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자 눈앞에 몇 개의 메시지 창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시작의 마을 - 포탈이 작동됩니다.]
[알 수 없는 힘이 주위를 감싸고 있습니다. 리셋 포인트가 변경됩니다.]
(두 번째 마을 - 라움)
(숙련자의 마을 - 리듐)
(악마들의 마을 - 데빌람)
(소도시 - 하멜)
(소도시 - ...)
...
(대도시 - 다크듐)
눈앞에 떠오른 몇 개의 마을과 도시의 옆으로는 <상세정보>표시가 되어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우성은 위에서부터 하나씩 마을들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두 번째 마을과 숙련자의 마을은 인간 NPC들로 구성된 소위 ‘인간계’의 마을이었다. 단, 이 마을들은 주로 악마들을 모시는 사람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천사들을 모시는 마을과 구분되었다.
‘천사와 악마, 그리고 천사들의 인간과 악마들의 인간이라.’
천사, 악마, 인간.
삼 세력의 싸움이라 생각하니 또 다시 고대 신화 ‘라그나로크’가 떠올랐다. 어쩌면 천사와 악마뿐만이 아니라 천사 진형의 인간 NPC와도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들의 마을 - 데빌람은 악마가 사는 마을이 아닌, 악마가 처음 출현한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데빌람이 의미 있는 이유는 진짜 아포칼립스의 시작으로 향하는 입구, 즉 하멜로 향하는 입구이기 때문이었다.
하멜부터는 ‘도시’로 규정되어 있었다. 도시 중에서도 소도시와 대도시가 구분되어 있었는데, 대도시는 단 두 곳 밖에 없었다. 그 중 하멜은 신규 플레이어들과 5회 차, 6회 차 플레이어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아포칼립스의 입구였다.
“그리고 바로 그 ‘퀘스트’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
다음 목적지를 하멜로 정한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가 바로 소문으로 들은 ‘퀘스트’의 존재였다. 퀘스트의 난이도 자체는 그리 쉽다고 보기 힘들었지만 완료 보상 하나만큼은 그 무엇보다 우성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안현수는 하멜로 이동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마을이나 도시를 살펴보느라 정신이 팔렸지만 더 지체할 순 없어 우성은 곧장 눈앞에 떠오른 ‘하멜’이라는 글자에 손을 가져갔다.
우우웅-.
공기가 울린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하얀색으로 뿌옇게 변하며 눈앞을 완전히 가렸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어지러움이 들었지만, 정신력 스텟이 올라가서 그런지 예전에 비하면 멀미 수준도 되지 않았다.
서서히 눈앞을 가린 하얀 연기가 맑아지는 걸 느낄 즈음, 우성은 가까이 보이는 새로운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작의 마을과는 전혀 다른, ‘도시’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어?”
“어서 오십시오, 이방인 이우성.”
불쑥 눈앞에 나타난 사람.
아니, 악마의 첫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