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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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과 토르안의 경기의 끝에는 환호성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경기에 잠시 관중들은 넋을 잃고 두 개의 마병을 들고 서 있는 우성을 지켜봤다.
토르안은 머리 정수리부터 허리까지 반으로 쩍 걸라져 몸이 두 개가 되어있었다. 몸속에 있던 뜨끈한 기관들이 밖으로 새어 나왔지만, 눈을 돌리는 사람을 몇 없었다. 있어 봤자 혜정이 정도. 다른 관중들은 이미 이런 잔인한 광경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잠시 토르안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우성은 고개와 함께 몸을 휙 돌렸다. 한 손에는 아포피스를, 한 손에는 옥토퍼스를 든 채.
우성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자, 그 때까지만 해도 넋을 잃고 있던 가장 앞의 관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최고다, 이우성!”
“이우성, 이우성!”
환호소리와 함께 수많은 관중들이 우성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껏 이 투기장 먹이사슬의 정점을 토르안이 차지하고 있었다면, 이제 그 먹이사슬의 꼭대기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우성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관중들을 뒤로하고 선수 창고로 돌아갔다. 중간에 사회자가 자신을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걸 보았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역시나 창고에 도착하자 마찬가지로 엄지를 치켜든 안현수가 보였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다른 선수 플레이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우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쩐다.”
“감상평은 그게 다야?”
“토르안 그 새끼, 그렇게 약했냐?”
궁금하긴 할 것이다. 안현수는 토르안과 우성의 경기인 만큼 당연히도 창문을 통해 경기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창문을 통해 본 경기의 내용은 처음 토르안이 마병을 이용해 옥토퍼스의 힘을 이끌어 내는 것부터 시작했다. 열두 개의 크라켄의 다리는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고, 모두 피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크라켄의 다리가 나타난 순간 안현수는 우성이 질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의외였다. 우성은 마검의 힘을 다 이끌어내지도 않은 채 토르안을 가볍게 제압했다. 배치고사에서 우성과 붙어본 안현수는 토르안이 약한 건지, 우성이 비상식적으로 강해진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아니. 나보다 강할 걸?”
“뭔 소리야? 네가 이겼잖아?”
“이기긴 했지.”
우성은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여주기 위해 오른손에 들고 있는 아포피스를 옥토퍼스를 향해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경기장 위에서 일어났던 현상이 다시 한 번 일어났다.
키에에에에엑-!
소름 끼치는 비명이 창고 안을 뒤흔들었다. 사람의 것도 아니고, 동물의 것도 아닌 울음소리. 창고 안에 있던 신규 플레이어들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우성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 그건 뭐냐? 그러고 보니 경기 중에도 얼핏 들리던데.”
“A등급 마병 옥토퍼스. 그리고 S등급 마검 아포피스.”
안현수는 이미 특전을 함께 부여받으며 S등급 특전이라는 점과 아포피스의 이름을 확인했기에 말하는데 거리낄 게 없었다. 대신, 뒤의 말은 조용히 안현수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상극이라고 말할 것까진 없지만, 완전히 상하관계에 놓여져 있는 거지.”
“그게 왜? 그냥 무기가 더 좋고 덜 좋고 차이 아냐?”
“그렇게 단순히 생각하기는 힘들어. 이것들, 자아를 가지고 있거든.”
“헉!”
안현수는 깜짝 놀라 우성에게서 한 걸을 뒤로 떨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옥토퍼스와 아포피스에게서 멀리 떨어졌다고 보는 게 정답이었다. 자아가 있다는 말이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아, 안녕……?”
“해치지 않아. 해쳐봤자 사용자인 나에게 해를 끼치겠지. 내가 널 공격하지 않는 이상, 이것들도 너나 혜미, 혜정을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래?”
이미 오더에게서 아포피스의 위험성을 들은 후라 안현수는 놀라지 않았다. 아마 혜미나 혜정이었다면 깜짝 놀라 안절부절 못했겠지만 말이다.
대충 설명은 들은 안현수는 우성이 어떻게 토르안을 쉽게 제압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무기도 아니고 자아를 가지고 있는 무기라면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에게 겁을 먹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성 역시도 이번 싸움이 순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마병과 마검의 상하관계를 떠나 순수한 실력만으로 싸웠다면? 과연 크라켄의 다리들을 자신이 다 막아낼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절대 ‘아니오’였다. 사실 처음 시작부터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결과가 따라주긴 했으나 과정 자체는 천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상대가 토르안이 아닌 안현수였다면? 솔직히 이 정도로 경기를 쉽게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길지 질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꽤 고전했을 것임은 분명했다.
“일단 이거 받아라.”
“이, 이걸 왜 날 줘?”
“그럼 내가 양 손에 하나씩 들고 있을까?”
우성은 토르안에게서 빼앗은 옥토퍼스를 안현수에게로 건넸다. 기겁하는 안현수에게 우성은 억지로 마병을 떠넘겼다.
거대한 도끼인 옥토퍼스는 창기사인 안현수에게는 썩 맞지 않은 무기였다. 용기사 직업의 주 무기는 창이었고, 아마도 패시브 스킬, 직업 특성들 역시 창이나 폴암 계열의 무기에 특화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직업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 더 성장해 뒤로 가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마병의 힘을 빌리는 게 그에게 더 이득일 수 있었다. 용기사 직업으로 얻은 스텟과 힘, 그리고 마병의 힘을 빌리면 지금 당장은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경기, 언제 끝나지?”
**
우성과 토르안의 경기 이후로는 별다른 빅매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투기장의 에이스였던 토르안이 죽자, 새로운 에이스인 우성과 안현수의 경기를 기다리는 관중들이 있었지만 아쉽지만 다음날을 기약했다.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우성과 안현수는 각각 하나씩의 주머니를 받을 수 있었다. 안현수는 소량의 금화와 은화, 동화가 섞인 주머니였는데, 어제에 비해 금화가 조금 많았다.
우성의 주머니에는 거의 절반 가까이 금화로 섞여있었다. 얼추 잡아도 100골드 이상은 되어보였는데, 안현수의 것까지 합하면 150골드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수고했어 오빠들.”
“수고하셨습니다.”
무사히 돌아온 우성과 안현수를 반갑게 맞는 혜미와 혜정 역시 꽤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미리 말했던 대로 그녀들 역시 우성과 안현수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계속 배팅한 듯,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금화가 꽤 늘어있었다.
대략 모든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은 다 더하면 200골드는 훌쩍 넘을 것 같았다. 포털의 이용 요금이 5골드이니 애초 생각했던 돈에 비해 차고 넘쳤다.
“포털로 가는 길 기억 나?”
“응? 응. 그런데 그건 왜?”
“혹시 이용 제한시간 같은 게 있는지 알아?”
우성의 질문에 혜미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는 뜻이었는데, 이상한 느낌에 혜미가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투기장을 나선 후, 바로 포털로 향해. 아니, 뛰어. 바로 소도시 하멜로 향한다.”
우성은 낮 시간 동안 마을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얻었다. 따로 얻을 정보는 없었고 그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생각에 NPC들이나 기존 플레이어들을 붙잡고 물었던 것인데, 그 중에는 신규 플레이어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한 도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도시 하멜은 포털을 통해 갈 수 있는 악마가 등장하는 첫 번째 도시였다. 근처에 출현하는 몬스터가 비교적 약하고 신전이 세워져 있으며, 치안 유지가 잘 되어 있다고 한다.
몇 군데 도시에 대한 설명도 더 들어보았지만 우성은 하멜만한 곳은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소도시 하멜에서만 받을 수 있다는 하나의 ‘퀘스트’가 우성을 자극했다.
여차저차 이유도 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혹시 모를 신규 플레이어들의 습격 때문이었다. 토르안의 생각이기도 했지만 질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신규 플레이어는 충분히 노려질 만했다. 아마 우성이 기존 플레이어의 입장이라 해도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시작의 마을은 다른 도시에 비해 치안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도 했으니, 일단 도시로 떠나는 편이 안전했다.
“그럼… 지금 당장 떠나는 거야?”
“그래.”
“그냥 그 무기를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겁을 먹었는지 혜정은 몸을 덜덜 떨었다. 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하긴, 무섭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 도끼는 몰라도 내 검은 종속무기야.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가 없어. 물론 그 덕분에 빼앗길 위험도 없지만.”
“그럼 도끼만 버리면…….”
“그런데 내 검이 종속 무기란 걸 다른 사람들이 알까? 아니, 믿어 주기나 할까? 말한다 해도 무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거짓말로 듣겠지. 그럼 결국 도끼를 버린다고 해도 쫒기는 건 똑같을 거다.”
자신 때문에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우성은 일단 지금 상황을 벗어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위험이 없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괜히 이곳에서 퀘스트 보상으로 500포인트 챙기자고 네 명분의 라이프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알았지? 여길 나가면… 바로 포털로 향해 달려.”
**
“저것들 뭐 하는 거래?”
정예지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갈등 끝에 우성을 믿지 못하고 토르안에게 돈을 걸었는데, 그 돈을 모두 날려버린 탓이었다. 우성에게는 믿겠다며 돈을 모두 그에게 걸겠다고 했지만 정예지는 지금껏 보아온 토르안의 실력을 더 믿었다.
그래도 반신반의해서 가지고 있는 돈의 절반만 걸었던 게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우성이 이길 가능성도 생각해 두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성이 토르안을 이김으로서 돈을 날린 건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정예지는 조용히 작당하는 우성과 다른 세 사람을 보며 표정을 와락 구겼다. 어제처럼 기분 좋게 웃으며 집에나 돌아갈 것이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낄낄낄. 네가 잘못한 것 가지고 왜 저 녀석들에게 화를 내?”
“아니, 잘 봐. 저것들.”
정예지는 수정구에 비친 우성과 다른 일행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세 명의 일행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우성의 표정은 꽤 심각해 보였다.
“도망칠 생각인가?”
“낄낄 그래 봤자 감시가 붙어 있는데 지들이 뭘 어쩌겠어. 신규 플레이어들 주제에.”
우성에게 돈을 걸었던 샤오만은 두둑한 돈주머니를 던졌다 받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반대로 돈을 잃은 정예지는 표독스럽게 표정을 구겼다.
“오늘 경기 보고도 그딴 말이 나와? 넌 아직도 저것들이 보통 신규 플레이어로 보여?”
“뭐, 그건…….”
샤오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뭐했기 때문이었다.
토르안이 불러낸 크라켄의 다리는 확실히 놀라웠다. 신규 플레이어 주제에 그런 소환수를 다룰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마병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라지만 그 덕분에 어지간한 기존 플레이어 못지않은 힘을 낼 수 있었던 토르안이었다.
그런데 우성은 그런 토르안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 모습은 경기를 구경하던 정예지나 샤오만도 경악할 정도였다. 이게 신규 플레이어들끼리의 싸움이 맞나 싶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 신규 플레이어 치고는 대단하다는 건 인정해. 그런데 그게 뭐? 그래 봤자 신규 플레이어, 그리고 혼자인 주제에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정 뭐하면 오늘 당장 잡으면 되지. 마병과 마검, 두 개를 가지고 있는 놈이 도망이라도 치면 큰일이니까.”
샤오만의 제안에 정예지의 귀가 솔깃했다. 낌새를 눈치 챈 만큼 그녀 역시도 괜히 모를 찝찝함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그거 괜찮네.”
“그럼 내가 칼프에게 연락하지.”
콧노래와 함께 돈주머니를 꽉 쥐며 샤오만이 눈을 흉흉하게 빛냈다.
“오늘, 마검이랑 마병을 갈취하러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