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뿜어져 나온다. 살갗을 에는 듯한 한기가 느껴지며 알 수 없는 공포심이 뇌를 자극했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날 도끼에 드러난 누군가의 입은 기다란 혓바닥을 내밀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벌써부터 우성을 잡아먹을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지이잉-.
그 때, 우성의 손 안에 있던 아포피스가 낮게 울었다. 마치 ‘저런 저급한 놈에게 겁먹지 마’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문득 자신 역시 아포피스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성은 애써 불길함을 털어냈다.
쭈왁-.
그 때, 옥토퍼스의 입에서 여러 가닥의 기다란 다리가 튀어나왔다. 손바닥 한 뼘보다 두꺼운 거대한 다리는 마치 문어의 다리처럼 생겼는데, 무려 십여 가닥이 넘어 보였다.
‘하나, 둘 셋 넷… 시발. 무슨 문어 다리가 열두 개나 되냐.’
다리의 수를 세어보던 우성은 눈살을 팍 찡그렸다. 저 많은 다리들이 일제히 자신을 노린다면 과연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보통 문어의 다리는 아닌지 그것들은 토르안이 명령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허공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건 또 무슨 광대놀음이냐?”
“광대놀음이라… 그렇게 보이나?”
토르안은 손을 뻗어 옥토퍼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다리를 손으로 쓸었다. 그의 눈은 어느새 초점이 사라지고 검게 물들어 있었다.
‘자아를 뺏긴 건가?’
아니, 그건 아닌 듯했다. 자아를 빼앗겼다면 진작 우성을 향해 옥토퍼스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마물 크라켄이다. 옥토퍼스에 잠재되어 있는 스킬이지. 200포인트를 지불하면 소환할 수 있다는데, 나도 처음 사용해 보는 스킬이다.”
포인트를 지불하는 대신 소환하는 스킬을 사용한다면 우성 역시 나가(Naga)를 소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가의 소환에 필요한 포인트는 200이 아닌 400포인트였다. 게다가 플레이어의 성장에 비례해 강해지는 소환물인 만큼 지금 당장 소환해서 효율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포인트를 지불하면서까지 이기고 싶나?”
“어차피 널 죽이면 다시 얻을 수 있을 텐데 아낄 필요 없지.”
맞는 말이긴 했다. 현재 우성은 그간 경기를 치르며 포인트가 6000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만약 토르안이 우성을 이기면 그 1/10인 600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자, 너도 어서 다 꺼내 봐. 너도 있을 것 아니야? 마검의 고유 능력이라던가, 스킬이라던가.”
토르안이 주절주절 말을 꺼낸 이유였다. 처음부터 모든 패를 꺼낸 상태에서 시원하게 싸워 보자는 뜻. 자신은 옥토퍼스의 잠재 능력을 꺼내 보였으니 우성 역시도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한다.’
우성에게는 아직 꺼내지 않은 패가 2개가량 남아있었다. 아포피스의 내재 스킬인 나가(Naga)와 고유 능력인 ‘대리인’ 스킬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다량의 포인트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특히 대리인 스킬은 자아를 빼앗길 확률도 있어 사용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일단은…….’
우성은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더 이상 보여줄 건 없다는, 명백한 부정의 표시였다. 토르안의 표정에 잠시 실망이 어렸다가 이내 밝아졌다.
“뭐, 그러겠다면 나야 환영이지.”
우성이 가진 검의 능력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유리해진 쪽은 토르안이었다. 드디어 싸울 마음을 먹었는지 토르안이 불러낸 크라켄의 다리들의 꿈틀거림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엑-.
옥토퍼스의 입에서 괴물의 것으로 들리는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관중들 중에서는 그 목소리를 듣고 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도 있었다. 기존 플레이어들조차도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광경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쉬이이익-.
크라켄의 다리 하나가 우성을 향해 위에서 내려왔다. 우악스러운 다리는 거대한 덩치에 비해 무서울 만큼 빨랐다.
쿠웅-.
육중한 다리가 바닥에 꽂혔다. 우성은 어느새 토르안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고 있었다.
토르안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거대한 도끼, 옥토퍼스가 하늘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남아 있는 크라켄의 다리 11개가 우성을 노렸다.
“흐읍!”
쉬이이익-.
2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도끼가 우성을 위에서부터 내리찍었다. 토르안의 품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던 우성은 아포피스를 들어 옥토퍼스를 막아냈다.
쩌엉-!
두 개의 마병이 부딪히며 주황색으로 빛나는 불똥이 튀었다. 호각, 아니 토르안의 우세일 것이라 생각했던 격돌은 전혀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어라?”
그대로 우성을 내리 찍어 그대로 크라켄의 다리로 공격을 가하려던 토르안은 반대로 자신이 밀리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힘은 토르안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옥토퍼스는 2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도끼로,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는 힘은 보통 무기는 단숨에 박살낼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밀려?’
당황한 건 토르안만이 아니었다.
‘뭐지?’
애초에 우성은 토르안의 공격을 튕겨내려 했던 게 아니었다. 일단 막고, 그대로 검을 버리고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검을 휘두르지 않았음에도 토르안의 옥토퍼스는 마치 자신이 쳐내기라도 한 듯 튕겨져 나갔다. 이상하긴 했지만, 기회가 왔음은 분명했다.
키에에엑-.
옥토퍼스의 입이 비명을 질렀다. 십여 개의 크라켄의 다리가 우성을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이전처럼 빠르고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열 두 개의 다리가 동시에 자신을 노리자 우성은 피할 곳을 찾지 못했다. 급하게 검을 들어 우성은 아포피스를 크게 휘둘렀다.
“어?”
우성과 토르안의 입에서 동시에 의문의 물음표가 터져 나왔다. 우성이 아포피스를 크게 휘두르자, 다가오던 크라켄의 다리들이 주춤 뒤로 물러난 것이다.
우성은 의아한 표정으로 토르안을 바라봤다. 혹시 자신을 가지고 놀기라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자신과 같이, 아니 자신보다도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토르안을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우우웅-.
우성의 의문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손에 쥐고 있던 아포피스가 울었다. 처음 전직할 때처럼 자아를 드러낸 건 아니었지만 우성은 아포피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런 저급한 문어 따위에게 지지 않는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녀석이었다. 하긴, 태양신 라를 대적하던 대악마가 고작해야 문어 따위에게 진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멋진 녀석.’
아포피스를 꽉 쥐며 우성은 미소를 지었다. A등급의 특전과 S등급의 특전. 한 등급 차이가 나서 어느 정도 아포피스가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토르안은 옥토퍼스의 능력을 모두 끌어낸 상태였다.
그래서 내심 불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우성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너무 얕보았다.
“이, 이게 대체…….”
믿었던 무기가 통하지 않은 토르안의 표정은 볼만했다. 직접 휘두르는 것도, 열두 개의 크라켄의 다리도 통하지 않았다. 아니, 통하지 않은 게 아니라 마치 스스로가 도망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무기에도 급이 있는 거지.”
토르안의 무기는 옥토퍼스였다. 마병으로서 그의 도끼는 충분히 크고, 위력적이었다. 게다가 무기를 통해 사용할 수 있는 크라켄의 다리는 어지간한 기존 플레이어도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나빴다.
반(半) 마검 아포피스.
아포피스는 태양신과 대적하던 대악마. 때로는 태양신 라를 집어삼켜 일식을 일으키는, 악마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악마의 급을 따지자면 마신과 가장 근접해 있는 악마라고 할 수 있었다.
아포피스의 대리자의 직업 특성. ‘절대적인’은 마(魔)계열의 적에게 추가적으로 15%의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이 능력은 단순한 공격력의 상승을 넘어 적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마검 자체의 힘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포피스처럼 옥토퍼스 역시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급이 다른 악마의 존재감에 두려울 만하다.
“오, 옥토퍼스가…….”
“무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냐?”
여유가 생긴 우성은 피식 웃었다. 크라켄의 다리가 등장하면서부터 이어졌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며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다만.”
“대체 그 검은…….”
“이름? 안 알려줘. 그런데 아무래도 네 싸구려 도끼랑은 급이 다른가 봐.”
토르안은 우성의 비아냥거림을 부정할 수 없었다. 손 안의 옥토퍼스가 아까부터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이전에도 무기가 울었던 적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무기를 통해 옥토퍼스의 감정이 전해진다. 경기를 치를 때마다 늘 자신만만했던 옥토퍼스는 지금, 우성의 검을 마주하고부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안됐네. 마지막 패까지 꺼내 들었는데. 무기의 상하관계(上下關係) 때문에 좆 됐네.”
“이런 미친!”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는지 토르안이 옥토퍼스를 높게 치켜들었다. 높게 올라간 옥토퍼스가 반항하듯 울었다.
‘무섭다’고.
꽝-!
다시금 옥토퍼스와 아포피스가 격돌했다. 처음과는 달리, 우성은 다가오는 옥토퍼스를 향해 아포피스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키에에에에엑-!
귀를 찢을 듯한 괴성. 두 개의 입에서 나왔던 열두 개의 다리가 스멀스멀 다시 들어갔다. 위협적으로 벌어졌던 어금니를 드러낸 두 개의 입이 닫히며, 토르안의 옥토퍼스는 허공으로 날아가 무대 바닥에 떨어졌다.
떵-.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멍하니 바라보며 토르안은 넋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크라켄의 열두 다리를 부리며 위협적인 기세를 보였는데, 지금은 도저히 방금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초라했다.
관중들 역시 어느새 처음의 환호성은 사라지고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토르안에게 돈을 건 관중이 대다수인 이유도 있었지만, 우성에게 돈을 건 관중들 역시 황당한 경기 내용에 넋을 잃었다.
“생각보다 너무 시시해졌네. 아쉽게도.”
“인정 못해.”
정신을 찾았는지, 토르안은 이를 악물며 다시 바닥에 떨어진 옥토퍼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차피 다시 옥토퍼스를 주워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걸 두고 볼 이유는 없었다.
사악-.
빠르게 달려간 우성이 옥토퍼스와 토르안의 사이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옥토퍼스를 향해 손을 뻗던 토르안의 팔이 반쯤 잘려나가며, 옥토퍼스의 위로 피가 머금어졌다.
“끄아아아악!”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입을 벌리며 토르안은 비명을 질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움켜잡는 토르안은 더 이상 싸우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우성은 토르안을 내버려 둔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옥토퍼스를 집어 들었다. 오른 손에 들린 아포피스가 강하게 울며 우성을 만류했지만, 우성은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에 우성은 토르안이 어떻게 이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는지 알 수 있었다. 토르안의 힘이 강한 것도 있지만, 옥토퍼스 자체의 무게도 보기와는 달리 그리 무겁지 않았다.
“고맙다.”
“큭. 어차피… 그걸 주워 봤자…….”
“안 뺏길 거다. 절대로.”
우성은 왼 손에 들고 있는 옥토퍼스를 높게 치켜 들었다. 방금 전까지는 토르안의 손에 들려 있던 무기가, 이제는 주인의 머리를 노렸다.
“그럼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퍼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