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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44화 (44/258)

44화

처음과는 달리, 정예지를 보는 우성의 눈빛은 썩 곱지 않았다. 그것은 안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계는 했을지언정 적어도 적대시는 하지 않았던 두 사람은 어느새 죽일 놈 보듯 정예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시죠?”

“몰라서 묻습니까?”

이번에도 역시 먼저 나선 사람은 안현수였다. 따로 우성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자신들을 데리고 온 정예지가 순수한 호의만으로 이곳을 소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우성과 안현수의 것보다 더 묵직해 보이는 돈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크기가 족히 두 배는 커보였는데, 아마도 그 안에 들어있는 돈이 우성이나 안현수의 것처럼 동화, 은화가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

“모르겠는데요.”

“정예지씨. 당신 이 투기장과 한통속이죠?”

안현수는 빙 돌리지 않고 바로 직구를 던졌다. 정예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아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것 때문인가요?”

“맞나봅니다?”

“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왜요?”

정예지는 자신의 손에 들린 돈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그러더니 주머니의 입구를 봉하고 있던 줄을 풀어, 그 안을 보여주었다.

고개를 들이밀어 주머니 안을 확인한 안현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금화가 상당수 섞여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의 범위가 너무 좁았던 모양이었다. 정예지의 주머니는 하나도 빠짐없이 금화로 가득 차 있었다.

깜짝 놀란 표정의 우성과 안현수를 잠시 보던 정예지는 이내 씩 웃으며 주머니의 입구를 봉했다. 주머니를 어깨에 들추며 정예지는 손가락으로 우성과 안현수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전 당신들에게 돈을 걸어 이만한 돈을 챙겼어요. 그리고 당신들 역시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포인트와 돈을 벌었죠. 서로서로 이득을 챙겼는데, 뭐가 불만이라는 거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맞아요. 전 석 달에 한 번, 이곳 시작의 마을에서 투기장의 플레이어 스카우터(scouter)역할을 하고 있어요. 당신들 말대로 한통속이라고 할 수 있죠.”

무덤덤하던 정예지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계단을 내려오며 혜미에게 보였던 미소와는 달리, 탐욕에 젖어 보이는 미소였다.

“이 일, 꽤 돈이 되거든요.”

“……실망입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는 당신들이야말로, 내일부터도 계속 이 투기장에 나오실 거잖아요?”

몸을 반쯤 돌리며 정예지가 말을 이었다.

“실력들은 역시 쓸 만해요. 혜미가 하도 대단한 사람들이라기에 한 번 믿어봤는데, 기대 이상이네요.”

“……우리를 통해서 돈놀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네.”

단호한 대답과 함께 정예지는 눈웃음을 지었다. 반쯤 돌렸던 몸을 완전히 뒤로 돌린 그녀가 다시 한 번 금화가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를 흔들었다.

“그럼, 내일도 잘 부탁해요.”

**

우성과 떨어진 정예지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고 투기장의 더 깊숙한 안쪽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는 힐끗힐끗 자신이 매고 있는 돈주머니를 흘겼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투기장 안쪽의 VIP룸이었다. 이미 경기가 끝나 손님이 떠난 VIP룸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예지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내려놓으며 팔을 툭툭 두드렸다.

“무거워 죽겠네.”

“수고했다, 정예지.”

VIP룸 안으로는 몇 명의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곳 투기장에서 정예지와 같은 신규 플레이어 스카우트, 그리고 배당을 통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일을 하고 있었다.

클랜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작지만, 그렇다고 파티라고 하기엔 또 규모가 크다. 그들은 이곳 투기장을 중심으로 아포칼립스 내에서 하나의 ‘사업’을 하고 있었다.

“네가 데리고 온 그 선수, 실력 꽤 괜찮더군.”

동양 계열의 플레이어. 하지만 정예지와 같은 한국인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중국인 국적의 플레이어는 입 안에 넣고 있던 반쯤 피운 담배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덕분에 돈 좀 벌었지.”

“샤오만, 내 덕인 줄 알아. 대어하나를 물어왔으니, 아마 내일 중이면 관중들이 거는 돈도 더 늘어날 거야.”

“그렇겠지. 그 주머니를 보니 너도 부수입 한번 단단히 챙겼나 보군.”

“삼백골드는 돼. 오늘 정말 대박이야.”

샤오만이라는 중국인 플레이어 역시 자신이 번 돈을 자랑하듯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두 사람이 자신들이 번 돈주머니를 가지고 낄낄거리자, 중앙의 의자에 앉아 있던 플레이어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하나? 정예지, 샤오만?”

우두머리격의 사람인 듯, 그의 말에 정예지와 샤오만은 웃음을 뚝 그쳤다. 돈도 돈이지만 갑작스럽게 그들이 모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마검이 하나 더 출현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 마병도.”

“그렇지. 우린 그거 때문에 모인 거였지.”

아포칼립스 내에서 마검(魔劍)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껏 출현한 마검의 수는 채 열이 되지 않았고, 마검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악마진영에서 유명한 실력자들로 성장했다. 또한 마검은 그 자체로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만약 마검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지금껏 시중에 마검이 나온 적이 없었던 걸 감안하면 얼마만큼의 값을 받을 수 있을지 가히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당연한 것 아닌가?”

중앙의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키는 흡사 곰이라도 보는 듯 거대했다. 야수처럼 붉은색을 띤 눈동자는 흉흉하게 빛났다.

“투기장 경기가 끝나는 날, 플레이어 이우성, 그리고 플레이어 토르안. 두 사람의 무기는 우리가 빼앗는다.”

**

투기장을 나오자 새벽 어스름이 떠오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시간이 지나갔다는 걸 느끼며 우성을 포함한 일행은 다시 원래 묵었던 여관으로 돌아갔다. 정예지의 실체를 확인한 혜미와 혜정은 머리가 멍했고, 우성과 안현수는 분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꼭 내일부터 투기장에 나가야 하냐고 안현수가 물었지만 우성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로 보아 정예지는 앞으로도 계속 우성과 안현수에게 돈을 걸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럼 앞으로 우성과 안현수가 투기장에 나가 승리를 따내면 그만큼 정예지의 배만 불려주는 셈이었다.

안현수는 그 꼴은 못본다며 난리를 쳤지만 우성은 달라지는 건 없다며 그를 설득했다.

그랬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예지가 천하의 썅년이라는 사실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아니,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녀 역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 나쁘다고 욕할 건 없었다. 속은 건 기분이 나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우성과 안현수가 할 일은 여전히 투기장에 참전해 계속해서 승리하는 일뿐이었다. 혜미는 낮시간 동안 마법사로 전직하며 얻은 스킬들을 연습했고, 간간히 혜정에게 마력 스텟에 대한 강의를 겸해 그녀의 훈련을 도와주었다.

하릴없이 낮을 보낸 우성과 안현수는 투기장으로 향하기 전, 혜미와 혜정을 불렀다. 어차피 투기장으로 따라오려던 그녀들은 우성과 안현수의 방을 찾았다.

“이거 가지고 있어라.”

“이건 왜?”

우성은 방으로 들어온 혜미와 혜정에게 각각 어젯밤 투기장에서 번 두 개의 돈주머니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든 돈주머니는 생각보다 꽤 묵직했다.

“이 돈들 전부, 오늘 나랑 현수에게 걸어.”

“뭐?”

“정예지만 배불릴 순 없지. 배당률이야 우리가 훨씬 뒤지겠지만… 그냥 손 빨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

확실히 그건 그랬다. 적어도 우성은 투기장에 모인 그저 그런 신규 플레이어들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 승리를 확신하는 만큼, 자신이 선수로 뛰는 경기에는 올인을 하더라도 돈을 걸어 추가적으로 돈을 챙기는 게 이득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어제 투기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탓에 배당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돈을 건다고 해도 받아낼 수 있는 돈은 1.2배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하더라도 몇 개의 경기를 거치면 무시할 수 없는 돈을 챙길 수 있다.

“알았어.”

“알았어요.”

혜미와 혜정 역시 두 사람의 말을 이해한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그녀들 역시 투기장을 방문하는 이유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혜미와 혜정은 한결 무겁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네 사람은 어젯밤 정예지가 안내했던 길로 투기장을 찾아갔다. 비교적 일찍 마을 구석에 있는 비밀 통로로 향하자, 몇몇 플레이어들이 찾아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을 밝힌 사람은 혜미였다. 그녀의 라이트(Light)마법은 정예지에 비해 보잘 것 없었지만, 그래도 좁은 계단을 밝히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웅성웅성-.

어제와는 달리, 환호성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아서인지 경기가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배당이 한창인 투기장을 둘러보던 우성은 안현수를 끌고 선수 창고로 향했다. 어제 받았던 목걸이를 내밀자, 경비병은 우성과 안현수를 창고로 들여보냈다.

“일찍 왔군.”

“처음 보는 얼굴이 너라니, 재수가 없어서.”

토르안이 손을 흔들자, 안현수가 과장된 몸짓으로 토를 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르안은 우성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오늘은 뭐 물어볼 것 없나?”

“없어.”

“아쉽군. 그래도 옆에 좀 앉지? 어차피 경기가 돌아올 때까지 할 일도 없는데.”

안현수는 슬며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지만, 우성은 조금 생각하더니 그의 옆으로 앉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토르안의 눈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토르안 역시 같은 느낌 때문에 우성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네 검인가? 멋지군.”

우성이 옆에 앉자, 토르안은 우성의 검에 관심을 보였다. 우성은 이미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아포피스를 검의 형태로 변화시킨 상태였다. 바로 옆에서 우성의 검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그는 우성의 검에 꽤 관심을 보였다.

“어제가 첫 접속이라던데. 그런 좋은 검을 어디서 구했지?”

“그러는 넌?”

우성은 역으로 토르안의 옆에 놓여져 있는 도끼를 가리며 물었다. 아포피스와 마찬가지로 흉흉한 빛을 감돌고 있는 도끼는 한 눈에 투기장에서 제공하는 보급형 무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잠시 말을 아끼던 토르안이 옆에 놓아둔 도끼를 집어 들었다. 눕혀 있던 도끼가 세워지자, 그 크기가 어지간한 성인 남성과 맞먹었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우성은 토르안에게 느낄 수 있었던 묘한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병 옥토퍼스다. 근사하지 않나?”

“프랑스 국가 배치고사 우승자였나?”

“그래. 그 덕분에 A급 특전을 고를 수 있었지. 그래서 그런지, 네 검이 한 눈에 들어오더군.”

예상은 했던 바였다. 배치고사의 우승자와 준 우승자에게 특전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필시 다른 국가에서 치러진 배치고사에서도 특전을 부여받은 플레이어들이 있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눈앞에 있는 토르안이었다.

우성이 토르안을 보고 받은 묘한 느낌. 그것은 우성이 마검을 다룸으로서 같은 마(魔)계열 무기를 가지고 있는 토르안과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어떤 종류의 느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같은 무기를 다루는 사용자끼리만 알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나저나 A급 특전이라… S급이 아니고?’

A급이라는데 의외이긴 했지만 같은 종류의 무기라도 등급이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아포피스의 특전 등급을 알려줄 생각은 없다고 생각해 우성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조심해라.”

뜬금없는 말에 우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지?”

“나도 눈치 챘는데 여기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우리 무기를 눈치 못 챘을 것 같아? 너랑 내 무기가 어떤 건지 말이야.”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아마도 대강 눈치를 챈 플레이어들이 몇 명, 아니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성은 거리낄 게 없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

“당연한 것 아닌가? 무려 특전으로 얻은 무기다. 허접한 신규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빼앗으려 들게 당연하지 않나?”

“그래 봤자…….”

‘종속 무기라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하려던 우성은 눈을 크게 뜨며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자신뿐, 다른 플레이어들이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상황 파악이 되나?”

토르안은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도끼, 옥토퍼스를 바라봤다.

“대회가 끝난 순간, 이 무기와도 안녕이라는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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