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띠링-! 125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수치. 하긴, 배치고사가 끝나면 가진바 포인트의 1/2이 아닌 1/10을 빼앗는다고 했으니 정확한 수치이긴 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들어 우성은 쩝쩝 입맛을 다셨다. 검에 묻은 피는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검붉은 색의 마검에 조금 핏빛이 더해졌다는 느낌에서 그쳤다.
‘변하긴 변했군.’
한 번, 두 번은 어려웠다. 세 번째까지는 어렵긴 했지만 처음보다는 낫다싶었다. 하지만 한 두 번이었던 게 세 번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점점 살인이라는 감각이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특히 방금 전, 마히옹을 죽일 때 우성은 이전과는 다른 거리낌이 사라진 걸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익숙해졌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우성의 눈에 핏빛을 가득 머금고 있는 마검 아포피스가 들어왔다.
‘검 때문인가?’
아포피스의 설명에는 다루는 사용자의 정신을 잠식한다고 되어있었다. 자아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은연중 마검의 영향을 받아 살인에 대한 거리낌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갔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우성은 힐끗 가슴이 쩍 벌어져 숨통이 끊어진 마히옹을 바라봤다. 벌어진 가슴으로는 내장부위가 쏟아져 나오려 하고 있었는데, 곧 경비들이 무대로 나와 마히옹의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끝난 경기에 곧이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대부분 우성에게 돈을 건 사람들이었는데, 반대로 마히옹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그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보니 약해 빠졌다, 같은 프랑스 플레이어라니 쪽팔리다 등, 별의별 욕들이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마히옹에게 집중되었다.
그 중에는 ‘한국 플레이어 따위에게 지다니 프랑스의 수치’라며 동시에 한국을 욕하는 플레이어도 있었는데, 우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관중석을 잠시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우성은 다시 창고로 걸어 들어갔다.
“휘유. 대단한데?”
창고로 들어가자 우성의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안현수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성이 보여준 경기는 그만큼 압도적이었고, 배치고사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우성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차가운 반응에 안현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우성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썩 달갑지 않은 얼굴이 앉아있었다.
“반갑다.”
토르안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우성이 인사했다. 옆자리에 앉은 우성을 보며 토르안이 잠시 표정을 찡그렸지만, 이내 답했다.
“꺼져.”
“야박하긴.”
피식 웃는 우성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무기라면 토르안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투기장에서 지급하는 보급형 무기가 아닌, 밖에서 돈을 주고 구입한 듯 꽤 번쩍거리는 질 좋은 도끼였다.
하지만 투기장 창고 안에서는 선수들끼리의 싸움이 금지되어 있었다. 위험한 쉼터처럼 게임 시스템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기존 플레이어들과 투기장 관리 경비들에 의해 제제가 가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안현수는 우성의 뒤를 따라갔다가 토르안의 얼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전 경기에서 보여준 토르안의 몰상식한 행동은 그 누가 보더라도 좋게 보일 수 없었다.
“야, 가자. 저런 놈 옆에 뭐 하러 앉았어? 재수 없게.”
“재수는 없어도 아는 건 많겠지. 우리보다야 투기장에 오래 있었을 테니.”
비위가 상한다는 듯 의도적으로 토르안을 보며 헛구역질을 해대는 안현수와는 달리 우성은 토르안의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봤다. 한국말이었음에도 토르안의 귀에는 의미가 또렷이 들렸는지 이내 그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미친놈이군.”
“너만 할까.”
“큭. 그것도 그런가? 하지만 너희도 다르지 않을 거다.”
다르지 않을 거다?
그러고 보니 우성과 안현수를 창고로 안내해준 뚱뚱한 남자도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았다. 거의 확신에 가득 찬 말투였는데, 우성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무슨 소리지?”
“여기 들어온 놈들이야 뻔하지. 돈이 필요해서, 혹은 포인트가 필요해서. 안 그래?”
“그렇…지.”
“그럼 돈이나 포인트를 주고, 저 무대 위에서 여자를 강간하라면 어쩔 테냐?”
질문의 형식이긴 했지만 토르안의 말은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플레이어, 혹은 NPC를 통해 무대 위에서 여성 플레이어를 강간하는 이벤트를 보여주고 돈이나 포인트를 추가로 챙긴 것이다.
‘나는…….’
우성은 눈을 감고 속으로 갈등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자신은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까?
어느 정도의 포인트를 주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아마도…….
“그래도 난, 너 같은 쓰레기 짓은 안 할 거다.”
우성의 생각이 마무리 될 때쯤, 안현수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직 형사라더니 아무래도 그는 나름대로의 윤리 의식이 투철한 모양이었다.
“그럴까 과연? 글쎄, 말은 쉽지.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어떨까? 게다가 눈앞에 속살을 훤히 드러낸 아리따운 여성이 다리를 벌리고 있는데 말이야.”
“시발, 쓰레기 새끼야. 그 가운데 덜렁거리는 물건을 조절하지 못하면 그건 짐승이지, 사람이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뭐, 그거야 상황이 막상 닥쳐 보면 알겠지.”
“지랄하고 있네. 변태새끼.”
목구멍에서 끄집어낸 가래를 토르안의 앞에 뱉으며 안현수가 우성의 옆에 앉았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닌 듯, 토르안은 무덤덤한 얼굴로 안현수를 바라봤다. 부처가 아닌 이상에야 가래를 뱉은 사람에게 화가 안 날 리가 없는데 말이다.
“화 안 나나?”
“어차피 경기에서 만나면 내게 죽을 놈. 여기서 입만 털어봤자 달라질 것 없지.”
“지랄도 풍년이네 개새끼가. 뒤질라고.”
어지간히도 토르안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안현수는 그답지 않게 거칠게 욕설을 이어갔다.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아니 정확히는 안현수를 보며 우성은 피식 웃었다.
“여기엔 얼마나 있었지?”
“이제 3일 째다. 이 대회가 시작된 지 이제 3일 째니, 첫 날부터 있었던 거지.”
이곳 투기장에서는 석 달마다 신규 플레이어들을 영입해 7일간 진행되는 대회를 열었다. 우승의 조건은 토너먼트식이라기보다는 점수제였는데, 대전 상대의 승리 전적을 점수화 하여 빼앗는 것이었다.
1승을 하면 기본적으로 1점을 획득하며, 상대 선수가 5승을 했을 경우 추가적으로 5점을 획득하는 식. 패하지 않고 계속해서 승리만 이어간다면, 늦게 합류하더라도 우승이 불가능만은 아니었다.
패배는 있을 수 없었다. 패배는 곧 죽음이었으니.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한 번도 패배를 겪어보지 않은 불패의 플레이어들일 것이다.
‘아니, 그건 아닌가?’
어쩌면 마히옹과 같은 플레이어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우성과 안현수만 하더라도 투기장에 발을 들인지는 얼마 안 되지 않은가?
대강의 시스템을 살펴보면 일찍 투기장에 들어온 선수와 뒤늦게 들어온 선수 사이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일찍부터 활동한 선수는 많은 점수를 모을 수 있는데 비해 부상을 안고 다음 경기를 참여할 가능성이 있었고, 뒤늦게 대회에 참여한 선수는 점수는 적지만 비교적 부상이 없는 상태에서 대회에 임할 수 있었다.
“3일 차라… 꽤 오래도 버티는군.”
“오래 버티긴. 7일을 살아남아야 우승할 수 있는데, 이 정도야.”
“그래? 아무튼 이야기는 잘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대부분 일방적으로 토르안의 이야기를 우성이 듣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많았지만 어쨌든 결론은 한 가지, 경기가 시작되면 이기면 장땡인 것이다.
볼 일을 끝마친 우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앞에서 나갔던 선수들의 경기가 끝난 듯, 밖에서 들리던 환호성 소리가 커졌다.
“꼭 경기에서 만났으면 좋겠군. 너희 둘 다.”
“……그래. 꼭 만나면 좋겠다, 나도.”
**
우성의 경기가 끝나고 2경기가 지난 뒤, 안현수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안현수는 투기장에서 지급한 보급형 창을 들고 나가 몇 번의 격돌 끝에 손쉽게 상대 플레이어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대 플레이어 역시 소개로는 이곳 투기장에서 이틀을 넘게 버틴 꽤 실력 있는 플레이어라던데, 역시나 안현수의 상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일반 클래스의 직업과 유니크(Unique) 클래스의 직업 간에는 매우기 힘든 격의 차이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우성과 안현수는 새삼스레 특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 같은 특전이라 하더라도 두 사람이 획득한 특전은 각각 S등급과 A등급의 고위급 특전이었다. 똑같이 특전을 부여받은 타국의 플레이어라면 모를까, 적어도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우성과 안현수를 이길 수 있는 플레이어를 찾기란 힘들 것이다.
“고생했어.”
“고생하셨어요.”
우성과 안현수는 각각 두 경기씩을 끝내고 돌아왔다.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혜미와 혜정은 돌아온 우성과 안현수를 반겼다.
“오빠가 돈 벌어 온댔지?”
안현수는 손에서 짤랑거리는 돈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동화와 은화가 가득 섞여 있었는데, 묵직한 것이 금액이 만만치 않아보였다.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우성의 손에도 묵직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슬며시 안을 열어서 확인해 보자,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금화가 몇 개 보였다. 고작 2경기를 이겼을 뿐인데도 이 정도 배당이 떨어지다니. 이곳 물가가 비싼 건지, 아니면 투기장이 생각 이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장소인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이 정도만 해도 포탈 이용요금 정도는 되겠군.”
포탈 이용에 필요한 금액이 한 사람당 5골드였다. 몇 개씩 섞여 있는 금화나 묵직한 은화와 동화를 보면, 우성과 안현수의 것을 합쳐 대충 20골드는 될 것 같았다. 소기의 목적 정도는 달성한 것이다.
혜미와 혜정은 돈을 마련했으니 어서 투기장을 뜨자고 재촉했다. 안현수는 망설이며 우성을 돌아봤고, 우성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나흘. 여기에 머물 거다.”
“왜?”
“돈, 그리고 포인트. 포인트야 지금 많을수록 좋지만 지금 당장 급한 건 아니야. 하지만 돈은? 포털 이용비만 있으면 끝일까?”
지금 당장 손에 꽤 많은 돈이 들어왔다지만 포탈을 한 번씩 이용하면 모두 날아갈 돈이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앞으로 투기장은 나흘 동안 계속 열릴 거다. 우승 상금은 100골드와 500포인트. 퀘스트 보상을 챙기기 전까진 여기에 머물러야해.”
“……오빠 말도 일리가 있네. 하아.”
경기가 끝났음에도 아직 여운이 남아있는지 꽤 많은 수의 관중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혜미와 혜정은 경기를 지켜보는 내내 머리가 아프고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 힘들면 내일부터는 여기 오지 마라. 선수로 뛰는 건 나와 현수 둘뿐이니까.”
“아니. 염치가 있지, 내가 오빠 마누라도 아니고 안방에 앉아서 돈 벌어오는 거나 기다리라고?”
“저도… 싫어요.”
혜미야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의외로 혜정이까지 고집을 피우자 우성은 푹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극구 말릴 생각은 없었다. 언제고 이 일보다 더 잔인한 일을 보게 될지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부터 천천히 익숙해 지는 것도 두 사람을 위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수고했어요. 플레이어 이우성, 플레이어 안현수.”
그 때, 투기장을 나서는 인파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그녀는 바로 우성과 안현수를 이곳 투기장까지 안내한 정예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