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특전>
우성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단 1점의 포인트도 필요하지 않은 질문이라기에, 다행히 서현이의 병을 고칠 방법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희망을 품던 게 바로 방금이었다.
헌데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도 큰 걸 원하고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자신의 목숨이라니. 연이어진 충격에 이제 머리가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져가.”
우성은 오더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고민은 찰나와 같이 짧았고,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내 몸 하나 바쳐 서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우성은 기꺼운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아니, 아무래도 상관은 있는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앞니가 덜덜 떨리고 호흡은 한층 더 가빠졌다. 그리고 밀려든 감정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슬픔에 더욱 가까웠다.
죽으면… 딸을 볼 수 없을 테니까. 죽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게 가장 슬펐다. 그리고 서현이를 아빠 없는 고아로 둔다는 것도.
“뭔가를 잘못 이해한 모양이군.”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오더가 말을 정정했다.
“표면적인 의미에서는 ‘목숨’이 맞지만, 정확한 의미로는 ‘라이프’가 필요하다.”
“라이프……?”
라이프(Life). 목숨이라는 뜻을 내포한 용어기도 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단어의 억양에 대한 느낌은 전혀 달랐다. 목숨을 내놓는다 하면 현실에서의 목을 의미하는 듯했지만, 라이프라고 하니 게임 속의 목숨을 뜻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아포칼립스 내에서 플레이어의 라이프는 현실에서의 목숨에도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는 일종의 포인트 역할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1개의 라이프는 보통 사람의 수명 반년을 연장시켜 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게임 시작 전에 오더는 그런 말을 했다. 포인트만 충분하다면 불로장생과도 같은 권능도 얻을 수 있다고. 라이프나 포인트를 이용해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니, 어쩌면 그것도 허황된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프 하나당 수명 반 년. 라이프 하나가 어느 정도 값어치를 지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서현이에게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게임 속에 있는 라이프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줄 생각을 했으니, 이 정도면 생각했던 것보다 싸게 먹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의 경우지.”
그 때, 희망적인 우성의 생각을 깨고 오더가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네 딸 서현의 경우, 병으로 인해 몸이 많이 쇄약해진 상태다. 단순환 노화와는 달리, 세포가 병에 잠식되고 있는 만큼 라이프로 얻은 생명력의 소모는 더욱 빠를 테지.”
보통 사람.
그래, 어떤 관점으로 봐도 서현이의 몸은 보통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불치병도 아닌, 아예 학회에조차 보고되지 않은 처음 보는 병이라니 말이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몸이 쇄약해지며 죽어가는 병. 서현이의 병에 대해 의사들이 알아낸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게임식으로 풀어서 설명하면 서서히 생명력이 소모되어 죽어가는 병이었다.
엄연히 말해 서현이는 ‘보통 사람’이 아닌, ‘병든 사람’이다. 그런 만큼 병에게 저항하기 위한 생명력이 따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우성의 마음은 급했다. 길게 이야기하기보다는, 어서 빨리 서현이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이 뭐지?”
“네 딸 서현의 경우 라이프 하나로 얻을 수 있는 생명력의 한계는 61일하고 2시간 17분 55초. 대략 2달가량이다.”
참 자세한 설명이었다. 얄미울 정도로. 반 년으로 늘어났던 수명이 두 달로 줄어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처음 수명이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 것에 비하면 한시름 놓았다고 볼 수 있었다.
현재 우성이 가지고 있는 라이프의 수는 6개였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5개의 포인트를 배치고사에서 살아남으며 유지했고, A등급 퀘스트의 완료 보상으로 또 하나의 라이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배치고사에서 살아남은 게 정말 다행이었다. 마지막 순간, 혜미를 죽였던 것까지 말끔히 잊어버릴 정도였다. 서현이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만 있다면야…….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우성은 고개를 저으며 훌훌 털어냈다. 이런 생각을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서현이와 혜미.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연관도 없는 두 사람이다. 굳이 저울질하자면 비교할 것도 없이 서현이에게로 쏠리겠지만, 비교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튼 우성은 가지고 있는 라이프 6개를 이용해 서현이의 수명을 최대 1년까지 늘릴 수 있었다. 물론 그 끝에는 모든 라이프를 잃은 우성의 죽음이 뒷받침 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렇게라도 할 것이다.
“어떻게 할 거지? 라이프를 대가로 딸의 생명을 연장할 건가?”
“그래. 라이프 하나를 지불하지.”
[1라이프(1Point Life)를 소모하였습니다.]
[정당한 대가로 영향력을 얻으셨습니다. 생명을 전해줄 대상을 떠올리십시오.]
알람의 메시지가 시키는 대로 우성은 마음속으로 서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끔씩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어린 나이에 애써 아빠에게 걱정 끼치지 않겠다고 씩씩하고 예쁜 모습만 보이는, 그런 딸이었다.
[비(非) 플레이어 이서현의 수명이 61일 2시간 17분 55초 늘어납니다. 병세가 미약하게 호전됩니다. 라이프를 추가로 지급할 경우, 더 많은 시간을 수명으로 얻게 됩니다.]
기분 좋게 떠오르는 메시지에 우성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른 무엇보다 조금이나마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문구가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지금껏 병이 악화되기만 했는데, 현대 의학이 불가능한 일을 자신이 해낸 것이다.
하지만 서현이의 라이프를 소모해 서현이의 수명을 늘린 건 어디까지나 급약처방에 불과했다. 당장에 2달 뒤면 다시 라이프를 소모해야 할 것이고, 그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이나 서현이나 끝을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중요한 건 포인트였다. 그리고 포인트를 모으기 위해선 당연지사 힘이 필요했다.
“대강 포인트의 사용 방법은 알겠나?”
“그래. 현실에서의 영향력이나 스텟 포인트, 수명까지. 정말 안 되는 게 없네.”
순수한 감탄이었다. 설마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플레이어 정보에서 줄어든 라이프 포인트를 보니 속이 쓰렸지만 서현이를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풀어졌다.
“원래라면 스텟과 포인트에서 모든 설명이 끝이겠지만, 너를 포함한 두 명에겐 다른 절차가 하나 더 남아있다.”
“두 명?”
‘그게 누군데?’라는 물음을 채 꺼내기도 전, 우성의 옆으로 흐릿한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우성은 자신 역시 이곳으로 소환될 때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하며 새로 소환된 플레이어를 살폈다.
새로 소환된 플레이어는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꽤 익숙한, 친근한 얼굴이었다. 어느새 우성처럼 말끔하게 상처가 치료된 안현수였다.
“어…어? 다시 여기로 돌아왔네.”
안현수 역시 이곳 ‘소원의 방’을 거쳤었는지 별로 놀라지 않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오더에게로 시선을 돌렸던 안현수는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우성을 돌아봤다.
“어? 넌 왜 여기 있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오더에게 들은 설명으로는 ‘소원의 방’은 각각 독립된 공간으로 수많은 차원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했다. 즉,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하나의 공간이 주어져 두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이곳에서 마주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우성과 안현수는 물론, 모든 플레이어들이 공통적으로 튜토리얼에서 오더에게 들었던 설명이었다. 안현수가 그냥 당황하는 게 아니었다. 절대로 같이 있어서는 안 될 공간에 두 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들어선 것이다.
“튜토리얼에서 들었던 설명이 있겠지만, 이번은 예외다.”
“이것도 네 마음대로?”
“그렇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의 소원의 방은 나로부터 비롯된 엄연한 ‘나의’ 공간이다. 그 공간 안에 어떤 플레이어를 들이건 그건 내 고유 권한에 해당한다.”
그럼 그렇지. 우성은 이제부터 오더를 평범한 가이드로 보지 않기로 했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혹시나, 하면서 조금 권한이 많은 가이드 정도로 인식했다. 하지만 이 정도 권한이라면 오더는 가이드가 아닌 이 게임의 ‘운영자’로 봐야 마땅했다.
“이것 참… 분명 방금 너한테 죽은 것 같은데, 이렇게 보니 어색해 죽겠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안현수처럼 우성 역시 그를 마주하기가 껄끄러운 게 사실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뒷면 모를까, 서로 칼을 겨누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했던 사이였다. 싸움이 끝나고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다시 만나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뭔데?”
어색함 때문일까? 안현수는 그답지 않게 급한 모습을 보였다. 아예 바닥에 철푸덕 앉아버리는 게 얼굴에 철판을 깔겠다는 의지로 보이기도 했다.
따라 앉을까 생각하던 우성은 결국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위에서 아래로 안현수의 조각 형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우성은 이내 오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플레이어 이우성, 플레이어 안현수. 너희 둘은 이번 7회차 신규 플레이어 배치고사에서 1,2위를 차지한 우수 플레이어들이다. 이우성은 A클래스를 배정 받았지만 A등급 퀘스트를 완료하면서 다시금 S클래스를 판정받았고, 플레이어 안현수는 처음 튜토리얼에서부터 S클래스를 판정받는 우수 성적을 거뒀다.”
“S클래스?”
우성은 놀란 눈으로 안현수를 돌아봤다. S클래스라면 모든 능력치가 15이상이라는 소리였는데, 한 명이나 있을까 했던 플레이어가 바로 안현수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군.’
엣헴, 콧방귀를 끼며 거드름을 피우는 안현수의 모습은 얄밉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한다. 그는 체력은 물론이고 정신력, 근력, 민첩, 반사능력, 어느 하나 떨어질 게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능력치 면에서 완벽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었다.
S클래스 플레이어. 우성 역시 A클래스에서 새로이 S클래스 플레이어로 판정을 받긴 했지만, 원래부터 S클래스였던 것과 후에 S클래스가 된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긴 할 것이다.
‘뭐, 이제 와서 싸운다면… 질 것 같진 않지만.’
우성의 능력치는 절대 나쁘지 않았다. 처음 배치고사를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은 한 수 접어주는 스텟을 보유하고 있었다. S클래스가 너무 높은 벽이지, A클래스도 평균 플레이어들의 능력치를 상회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배치고사가 진행되고 끝난 지금, 우성의 능력치는 처음과 비교해 높은 수준으로 상향되어 있었다. S클래스로 판정받으며 얻어낸 모든 능력치 2포인트와 추가적인 반사능력 2포인트, 그리고 2Lv.로 올라간 <불굴의 의지>까지.
이렇게 생각하니 다시 싸운다면 이기는 것까진 몰라도 절대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거의 확신이라고 할 만큼 굳어있었다.
“배치고사의 최종 포인트는 이우성 5525포인트, 안현수 1725포인트로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1위를 차지한 플레이어에게는 A등급 퀘스트 클리어 보상과 추가 라이프, 포인트를 지급하는데 이어 2위를 차지한 플레이어와 함께 한 가지 특전이 주어진다.”
“특전?”
우성과 안현수,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이미 충분한 보상을 얻었다 생각한 우성이었지만 아직까지 보상이 남아있다니 신나서 춤이라도 출 지경이었고, 안현수 역시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특전(特典).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특별한 대우라는 뜻이었다. 앞의 보상과는 느낌부터 다른, 대박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 이름이었다.
우성과 안현수는 쌍둥이처럼 똑같은 표정을 짓고는 오더의 말에 집중했다. 특히 안현수는 귀까지 쫑긋거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기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새로운 보상에 눈을 크게 뜨고 다음 말을 기다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오더는 기가 차는지 잠시 둘을 말없이 바라봤다. 갑옷 속에 감춰진 그의 얼굴이 한숨을 내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안현수와 우성의 속이 뜨끔거렸다.
“먼저, 특전의 종류를 나열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