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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29화 (29/258)

29화

아기자기한 손. 인형같이 보드랍고 작은 손을 꼭 쥐며 나는 눈을 화등잔 만하게 키웠다.

“이 아이가… 내 딸.”

“서현이. 이름은 서현이야.”

눈앞의 그녀가 아이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 순간,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 날개가 솟아오른 것보다 기뻤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혹시라도 건드리면 다치기라도 할까봐, 울음을 터뜨릴까봐. 나는 조심스레 아이의… 서현이의 주위를 맴돌았다. 빙글빙글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내가 우스웠는지 서현이는 잠시 눈으로 날 쫒더니 방긋 웃었다.

“우, 웃었어!”

“애니까. 뭘 그리 호들갑이야?”

언제나처럼 쌀쌀맞게 대하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그런 그녀의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연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내가 아닌, 서현이에게로 향해있었지만 전혀 서운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세를 조금 더 낮춰 서현이와 눈을 마주쳤다. 아기자기한 손만큼이나 작은 눈동자. 어쩜 이리 맑을 수 있을까? 새삼 아기라는 존재에가 신기하게 다가왔다. 아마 나도 예전엔 이런 눈을 가지고 있었겠지.

자그마한 눈망울을 빨려 들어갈 듯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감정이 다시 피어올랐다.

시간이 꽤 흐르자 그녀는 서현이를 안아들었다. 조심스레 안아든다고 안아들었지만, 내 눈에는 그저 위태롭게만 보였다.

“아아, 조심… 조심…….”

“풋.”

나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우스운지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이 꼭 천사같았지만, 이제 내 눈에 보이는 천사는 한 명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새로 내려온 어린 천사. 서현이라는 새로운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축복이요, 일생의 두 번째 큰 선물이었다.

“한 번 안아볼래?”

“그, 그래도 돼?”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에 이번에도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곧 고개를 작게 한 번 끄덕이며 서현이를 건네었다.

“아아….”

신음과도 같은 탄식을 흘리며 내 손이 서현이의 등과 다리를 받쳤다. 혹시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끔찍한 생각이 들었지만, 딸아이가 온전히 내 품에 안기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하하하…….”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내 바로 앞에서 깜박인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씩 지어지던 미소는 이내 부풀어 오르던 풍선처럼 펑 하고 터져버렸다.

“하하하하! 내 딸… 서현아, 서연아……. 하하하하!”

**

<띠링-! 한계치 이상으로 몸에 데미지가 누적되었습니다. 출혈량이 위험 수준입니다. 불굴의 의지 2단계가 발동되며, 잠시 정신이 맑아집니다.>

“서현…아…….”

입 밖으로 간절한 이름을 꺼내며 우성이 핏물을 속으로 삼켰다. 비리고 기분 나쁜 끈적거림이 입안에서 느껴졌다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듯 넘어갔다.

정신을 잃었던 걸까? 문득 잠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잠을 잔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지만, 이내 원래의 상황을 생각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어……?”

우성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억도 나지 않건만, 어느새 혜미가 자신과 두 걸음까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것도 무기를 손에 꽉 끌어 쥔 채 말이다.

자신과 싸우기라도 할 생각인 걸까? 하긴, 그럴 만하다. 지금 우성의 상태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말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불굴의 의지>가 경고를 해 올 정도일까. 사실대로 말하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만만하게 보였겠지. 상처 입은 맹수다. 이빨 빠진 사자는 발톱이라도 있지, 잔뜩 피를 흘려 힘이 빠진 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 만만할 만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속으로 잔뜩 실소를 흘리며 우성이 손에 쥔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 때였다. 가까이 다가오던 혜미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손에 들고 있는 검을 아래로 떨어뜨리더니, 곧 무방비 상태로 양 팔을 활짝 벌렸다.

“죽여.”

앞에서도 분명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우성의 귀에 들린 말은 이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여 달라고?’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무리 우성이라 하더라도 이 몸 상태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반면, 혜미는 처음 입었던 상처 조금을 제외하면 체력적으로 조금 지쳤다 뿐이지 다른 상처는 없었다. 즉,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었다.

혜미도 알 것이다.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우성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그저 검을 잡은 손을 한 번만 더 움직이면 되는 건데,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정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동정?’

닷새 동안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해온 정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해지리라 마음먹었던 우성도 혜미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할 때 내심 갈등했을 정도였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동정이 있었다. 혜미는 우성이 이 게임을 그토록 절실하게 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딸인 서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는, 드라마 같은 애잔한 이유에서 연민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쪽이든 우성에겐 썩 좋은 방향으로 일이 돌아감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까지 좋지는 않다. 결국 혜미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우성의 양 팔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주인의 의지를 거부하듯 끌려 올라간 손은 검을 굳게 쥐고 있었다.

안 된다는 말이 입 밖으로 꺼내어지려던 그 순간이었다.

푸욱-.

말보다 빨리, 우성의 검이 혜미의 배를 쑤시고 들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 또렷이 귓가를 파고든 섬뜩한 소리에 우성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안…….”

“안 되긴.”

혜미의 입가에 선혈이 흘러내리며 피처럼 새빨간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웃는 건지, 고통으로 일그러진 건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혜미는 고통을 이겨내 말을 이었다.

“나보단… 오빠가…… 더… 절실하잖아.”

“그렇다고 왜…….”

“몰…라. 그냥, 이렇게 안하면…….”

뒷말은 대체 뭘까? 그저 감상에 젖어서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라기엔 그녀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꽤 오래 생각해 온 일일 것이다.

그녀는 대체 자신과 함께 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혜미의 복부에 쑤셔 박힌 우성의 칼은 그녀의 뒷말을 집어삼켰다.

“컥컥!”

“아아…….”

“그러지… 마. 이게… 끝이 아니라며.”

이제 더 이상은 말을 잇는 게 힘든지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많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힘들게 일어서 있던 그녀는 이내 휘청거리더니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쓰러지는 혜미를 받아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미 혜미 못지않게 피를 흘린 우성의 몸은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이미 우성의 몸은 서 있는 게 용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대체 왜…….”

울먹임에 가까운 음성은 메아리처럼 한 자리에 맴돌았다. 그리고 메아리는 당연하게도 대답을 동반하고 오지 않았다.

아직 죽은 건 아니다. 우성의 눈앞에는 포인트를 획득했다는, 그 즐거운 알람이 아직 뜨지 않았다. 즉, 혜미의 숨은 아직 붙어 있다는 뜻이었다. 심장도 아니고 배를 찔렸다고 금방 죽을 만큼 사람은 약하지 않았다.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자,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우성은 힘겹게 검을 들었다. 이대로 방치해 두느니, 일찍이라도 보내주는 게 나았다. 말은 못하지만 아마 그녀는 살아서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눈을 꼭 감고,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몸이 지쳐서일까 마음이 무거워서일까? 오늘따라 검이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졌다.

푸욱-.

익숙한 감촉이지만 익숙하지가 않았다. 차마 혜미의 머리를 꿰뚫는 검을 지켜볼 수 없어, 우성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띠링-! 1150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숲에 존재하는 생존 플레이어의 수가 1명이 되었습니다. 남은 시간이 자동적으로 소멸되고, 배치고사가 종결됩니다.]

[죽어가는 자의 숲에 존재하던 구울들이 사라집니다.]

[플레이어의 랭크를 확인합니다. 플레이어 이우성의 랭크는 A랭크입니다. 배치고사의 유일한 생존자임을 확인했습니다.]

[A등급 퀘스트 ‘죽어가는 자의 숲’을 완료했습니다. 경험치 포인트 100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1000포인트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클레스 A랭크가 S랭크로 상향됩니다. 이후 2단계 밑의 클레스를 가진 플레이어의 상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칭호 ‘생존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정신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다 확인할 정도로 우성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그는 곧 닷새 전에 경험했던 어지럼증을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었다.

우우웅-.

눈앞이 어지럽다. 하지만 정신은 굳을 대로 굳어, 변함이 없었다. 죽어가는 자의 숲이 사라지는 건지, 아니면 우성의 몸이 다른 곳으로 움직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우성은 다시금 오더가 있던 하얀 백(白)의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전하게 서 있는 덩치 큰 갑옷 남성이 서 있었다. 우성을 게임 속으로 이끌고, 이 자리까지 있게 만든 장본인. 오더(Oder)였다.

“축하한다, 플레이어 우성.”

“…….”

“영 기쁘지만은 않은 모양이군.”

으득-.

어금니가 갈리며 우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는 기쁨과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책감과 지독한 회의감은 꽤 깊숙이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시발…….”

“원한다면 시간을 줄 순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한다. 이곳, 소원의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은 한 달 중 하루. 그것도 한 번에 한한다.”

욕설과 함께 기분을 날려버리던 우성에게 오더의 나지막한 말이 정곡을 질렀다. 우성에게 가장 예민한 ‘소원’에 관련된 이야기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소원의 방……?”

“튜토리얼과 배치고사가 끝난 지금, 각 플레이어는 기존에 지급한 포인트와 배치고사에서 획득한 포인트를 합산해 이곳 소원의 방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다시 나를 만나, 게임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거친다.”

힘없이 풀려있던 우성의 눈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소원’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있어서 잃어가던 정신이 번쩍 들게 할 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자세히… 말해 봐.”

“정신이 들었나 보군.”

“언제까지 짜고 있을 순 없잖아.”

혜미를 죽이려 했던 건 애초부터 각오한 일. 비록 정신이 없는 틈에 얼떨결에 검이 나간 것이지만, 그래도 미리 각오했던 일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으려 검을 들지 않은 왼 팔을 들었을 때, 우성은 방금 전과는 다른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이질감이 사라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칼로 쑤실 듯 아프던 왼쪽 옆구리가 깔끔히 나아 있었으니 말이다.

신기한 듯 자신의 왼쪽 옆구리를 매만지는 우성을 보며 오더가 입을 열었다.

“신기할 것 없다. 이 자리에 온 모든 플레이어들이 너와 같은 현상을 겪었으니. 목이 잘린 플레이어도 이곳에 도착한 순간, 완벽한 몸 상태로 돌아왔다.”

“그렇군.”

이젠 더 놀랄 것도 없었다.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우성은 잠시 호흡을 고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오더는 그런 우성을 잠시 지켜보며 기다렸다.

몇 분 정도가 흘렀을까.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던 우성이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상처는 나았지만, 검에 묻어 있는 피는 그대로였다. 적어도 혜미의 피가 묻어 있는 검을 더 이상 들고 있기는 싫었다.

“준비 됐나?”

“그래.”

“역시. 좋은 정신력이다.”

오더의 입매가 틀어진다는 착각이 들 때쯤, 그의 설명이 다시금 뒤를 이었다.

“그럼 우선 아포칼립스의 근간이 되는 ‘포인트(Point)’에 대해 설명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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