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안현수의 눈빛은 살벌했다. 단순히 검을 든 손의 위치를 바꿨다기보다는, 우성을 상대하며 마음가짐 자체를 새로 무장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먼저 덤벼든다더니 안현수는 걸음을 한 발짝 내닏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걸음으로 시작한 안현수는 그 길로 우성을 향해 순식간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열 걸음. 그 간소한 차이가 좁혀지는 시간은 찰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짧았다.
‘시작이다’
생각이 떠오른 순간, 우성의 검은 반사적으로 안현수의 검으로 향했다. 우선 시작은 ‘공격’과 ‘방어’의 격돌이었다.
까앙-!
안현수의 검은 왼쪽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우성은 검을 아래로 휘둘러 안현수의 검을 막고, 바로 쳐내려고 마음먹었다.
“아마 현실에서 검도 좀 했나봐?”
뻐억-!
안면을 강타하는 육중한 느낌에 우성의 눈이 빙글 돌았다. 왼 손으로 검을 휘두른 안현수가 남아있는 오른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난 현실에서 싸움 좀 했어.”
쉬익-.
주먹에 이어 안현수의 검이 곧장 우성을 향해 찔러왔다. 주먹과 검의 연계. 예상치 못한 깔끔한 연타에 우성은 눈을 번쩍 떴다.
[띠링-! 플레이어 특성 불굴의 의지가 발동됩니다.]
우성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을 크게 휘두르자, 안현수는 급히 검로를 틀어 우성의 검을 막아냈다. 평소에 자주 사용하지 않던 왼손이라 그런지 그의 검은 부자연스러운 감이 있어, 우성의 검을 깨끗하게 막아내지 못하고 충격을 받아 뒤로 물러났다.
까앙-!
“큭.”
얼얼한 왼손에 힘을 주며 물러난 안현수는 잠시 우성을 응시했다. 아니, 노려봤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의 눈에는 ‘어떻게?’라는 궁금증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죽빵 한 대에 정신 못 차릴 만큼 물렁하진 않거든.”
그래도 꽤 타격은 있어 우성은 얻어맞은 얼굴을 잠시 매만졌다. 학창 시절 싸움 좀 한다는 양아치들과도 몇 번 싸워봤지만, 그들과는 격이 다른 주먹이었다. 묵직하면서도 빠른 주먹. 그저 그런 솜방망이들과 같다고 볼 수 없었다.
“대단한데.”
“내가 말이야. 그 팔, 그렇게 사용해도 괜찮겠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안현수가 쓰게 웃었다. 오래 끌면 안 될 것 같아 순식간에 결판을 지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장기전이 되려는 모양이었다. 보통 얼굴을 맞으면 순간적으로 정신을 못 차리기 마련인데 우성은 맞는 순간에도 반격을 가했다.
우연으로 보이진 않았다. 우성의 높은 정신력과 그의 플레이어 특성 <불굴의 의지>를 생각해 보면, 고작 주먹질 한 방에 정신 못 차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오른쪽 팔의 상처를 매만지며 안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나 계속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서로 불편해질 텐데.”
“그렇다고 죽어줄 순 없잖아.”
“그건 또 그렇고.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서로 불편해질 수밖에.”
아니, 불편해지는 건 안현수 혼자였다. 우성 역시 멀쩡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왼쪽 옆구리 상처가 크게 걸리는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쑤시는 정도. 이미 지혈도 완벽하게 됐고, 그렇다고 덧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특성의 영향을 받아 상처에 구애받는 영향은 안현수에 비해 비교적 덜했다.
장기전으로 가면 유리하다. 맷집과 체력, 정신력 스텟이 높은 우성은 그것을 깨닫고는 수비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다고 실력 차이가 좁혀질 것 같아?”
타닥-.
안현수의 몸은 가벼웠다. 근력뿐만 아니라 민첩 스텟 역시 우성에 비해 몇 포인트는 높을 것이다. 맞서 공격하려 들면 우성이 불리할 수 있었다.
까앙-, 까앙-!
두 사람의 검이 몇 번씩 부딪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안현수는 공격을, 우성은 수비를. 검을 맞대고는 있지만 서로가 목표하는 바가 전혀 달랐다.
만약 검을 버린 육탄전으로 나갔다면 이 싸움은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끝났을 것이다. 고작 한 대였지만 안현수의 주먹은 충분히 빠르고 묵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우성은 안현수와 주먹으로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주먹이 아닌 무기, 검을 들고 하는 싸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최소한 검이라는 도구에 대한 익숙함과 이해도만큼은 우성이 안현수에 비해 훨씬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안현수의 공격을 비교적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처음 날아들었던 주먹은 싸우는 내내 도통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른쪽 주먹을 신경 쓰느라 그만큼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그저 생각보다 오른쪽 팔이 더 좋지 않구나 싶을 뿐.
잠시 오른쪽 주먹을 움찔한 안현수는 이내 우성과 검을 떨어뜨렸다. 쉽게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싸움은 순식간에 끝날 것이다.
“지치게 만드는군.”
“체력이라면 자신 있어서.”
“검거반 형사님의 체력을 무시하지 말지 그래? 나도 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거든.”
확실히 안현수의 체력은 좋았다. 이 정도까지 움직였으면서도 아직까지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현장에서 뛰는 만큼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우성은 지금의 페이스를 바꾸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대로 가면 꽤나 길고 긴 장기전이 될 게 뻔하고 우성 역시 그쯤은 알고 있을 텐데도. 그의 의도를 확인한 안현수는 하하 웃더니 왼팔을 움직였다.
“진흙탕 싸움. 나쁘지 않지.”
**
진흙탕 싸움. 아주 틀리지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썩 어울리는 비유도 아니었다. 우성과 안현수의 싸움은 진흙탕이라기보다는 겉으로 보기엔 지루한 공방의 지속이었다.
장기전. 누구는 한시라도 빨리 승부를 보기 위해 공격을 퍼붓고 다른 한 쪽은 시간을 벌기 위해 방어에 전념했다. 아무리 안현수라도 한 팔밖에, 그것도 평소 사용하지 않던 왼 팔 하나만으로는 우성을 쉬이 이길 순 없었다.
싸움이 길게 이어질수록 숲속의 불길은 점점 더 타올랐고, 그로인한 연기는 짙어졌다. 더군다나 숲 속에서 울리던 구울들의 울음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하악. 하악.”
“하아아아.”
가냘픈 숨소리가 허덕거리며 가늘게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사방은 불구덩이에 피로 가득했지만 그녀들의 지친 모습은 모르는 이가 본다면 넋을 놓고 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개새끼들아! 내가 니들 손에 죽을 줄 알았냐?”
장미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에 들고 있는 샤브르를 거칠게 한 번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며 날카롭게 횡으로 그어진 샤브르는 한 순간 위협적이었다가 이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들의 주위로는 세 구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목이 반쯤 베어진 고명균은 혜미의 작품이었고 머리가 꿰뚫린 라정환은 장미연의, 그리고 머리가 으깨져 쓰러진 김상민은 라정환의 작품이었다.
개싸움에 다섯 명 중 세 명의 플레이어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플레이어 둘이 살아남는 것으로 끝났다.
퉷, 바닥에 쓰러진 라정환을 향해 침을 뱉은 장미연은 이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다리는 크게 다쳐서 피가 터져있었는데, 결국 후들거리던 다리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아직… 안 끝났어.”
혜미 역시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간신히 헐떡거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움직였다. 체력은 물론, 부상까지 입어버린 장미연과는 달리 혜미는 싸우는 내내 비교적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솔직히 말해 장미연의 활약이 가장 큰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그녀에게 좋지 않은 상황으로 돌아왔다.
장미연의 실력은 과연 대단했다. 주먹 꽤나 쓴다는 조폭인 라정환이었다. 그리고 직업이 직업인만큼 그는 현실에서도 연장을 들고 설쳤던 전적도 몇 번 있었다. 즉, 실전에 대한 경험이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경험 면에서는 몰라도 실력 면에서는 장미연이 라정환보다 몇 수는 위에 있었다. 그녀의 샤브르는 빠르고, 매섭게 라정환을 찔렀다. 처음에는 몇 번 피하던 라정환도 거칠게 저항했지만 이내 끈질긴 장미연의 공격에 결국 머리를 꿰뚫리고 말았다.
하지만 시작과 과정, 이 모든 것은 제치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아무리 시작이 좋고 화려한 과정을 거쳤더라도 진흙탕에 뛰어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장미연의 꼴이 딱 그 꼴이었다.
장미연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며 쌍단검을 꺼내드는 혜미를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래도 방금 전까지 함께 싸웠는데, 곧장 방향을 바꿔 무기를 겨누는 게 조금 섭섭할 따름이었다.
“이러기야?”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잖아.”
혜미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고 습기가 없었다. 있는 말 그대로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듣는 장미연이 다 소름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장미연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한쪽 다리를 이용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와중에도 으깨진 왼쪽 다리가 죽을 만큼 아팠지만 굳이 그걸 티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긴, 그건 그러네.”
“미안해.”
“별 말씀을. 이해할게. 사실, 나도 내 다리가 이러지 않았으면 곧장 너부터 죽이겠다고 했을 거거든.”
어디까지나 입장의 차이. 장미연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인배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죽이겠다고 검을 겨누는 사람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말이다.
차라리 시팔년, 개년 욕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장미연이 이렇게 나오자 혜미는 반대로 난감했다. 방금 전까지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장미연을 죽이기가 싫어졌다. 변덕이라곤 하지만 장미연은 그만큼 멋진 여자였다.
입술을 꾹 깨무는 혜미를 보며 장미연은 호호 웃었다.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곱씹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혜미의 모습이 꽤 귀엽게 보인 것이다.
“정말… 이런 자리만 아니었으면 동생이라도 삼고 싶은데 말이야.”
“동생? 나이가 몇인데 그래?”
“아, 실수. 미안. 하는 짓이 너무 어려 보여서 나도 모르게 동생 같아 보였어. 나 스물 다섯밖에 안 돼.”
스물 초반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장미연의 나이는 꽤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스물 중반으로 생각하고 장미연을 보자 성숙미가 물씬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감이 낮지 않은 혜미도 이 순간 장미연을 보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장미연에게로 향했던 검에 슬며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하아.”
“호호. 왜 그래? 계속하지 않고.”
“됐어요. 아직 시간도 남았고… 어차피 결과는 저쪽에 달렸는데요, 뭐.”
어느새 존대를 하고 있는 혜미의 모습에서 장미연은 피식 웃고 말았다. 나이를 밝혔더니 존대를 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나이가 더 어리다고 밝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 그렇다고 혜미가 아무에게나 존대를 써 주는 여자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혜미의 시선이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는 우성과 안현수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옮겨지자 장미연 역시 그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우성과 안현수. 두 사람의 싸움은 멀리서 지켜보기에 그저 지루할 뿐이었다. 어느 누가 이길 거라고 예상할 수 없는 팽팽함. 그 당겨진 실이 언제 끊어질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적어도 꽤 튼튼한 실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쉽게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저긴 아직 꽤 걸리겠어.”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에요. 벌써 몇 분째 싸우고 있는 건지… 난 죽을 것 같은데.”
엄밀히 말해 장미연은 부상 때문에 쓰러진 것이지, 체력이 다 떨어져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기에 혜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검을 들고 쉬지 않고 이제까지 싸웠다면 진작 탈진해 쓰러졌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섬뜩한 칼날이 눈앞을 오고가는 싸움은 체력도 체력이지만 그만큼 정신력에도 큰 부담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신력의 손상은 곧 심적 부담으로 이어져 체력에까지 손실을 미친다.
장기전.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체력과 정신력의 싸움이 될 것이다.
어느새 혜미와 장미연은 우성과 안현수의 싸움에 빠져들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아마 그 싸움의 승자가 이 길고 길었던 배치고사의 1인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 때,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혜미의 입에서 기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