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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14화 (14/258)

14화

[띠링-! 75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또 다시 울린 기분 좋은 메시지.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촉에 우성은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네 명 째였다. 방금 전에도 한 명의 플레이어의 목을 베고, 75포인트를 획득했다. 이로소 우성이 지금까지 획득한 포인트는 총 250포인트. 기존 포인트까지 합하면 350포인트였다.

“많이도 모았군.”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우성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많이?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이 정도 포인트를 모은 것이다. 고작 300포인트 정도를 모았다고 ‘많이’라고 생각하다니. 우성은 피식 웃으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한 대 두드렸다.

“반성해라.”

스스로의 정신을 담금질하며 우성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얼굴 가득 피를 묻힌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혜미가 앉아있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를 향해 걸어간 우성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 시체를 발로 밟고 넘어갔다. 그 시체는 바로 혜미가 쓰러뜨린 플레이어였다.

플레이어는 정확하게 왼쪽 가슴, 심장 부위가 단검에 꿰뚫린 상태였다. 노렸는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혜미는 단 일수에 플레이어의 심장을 꿰뚫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정신 차려라.”

“내, 내가…….”

“그래. 네가 죽였어. 근게 뭐? 그럼, 저 돼지새끼 말고 네가 죽었어야 했나?”

우성은 그녀를 달랠 생각이 없었다. 어린애처럼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고, 달콤한 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며 달래기엔 그녀에게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고, 보다 냉정히 사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 그녀를 위해서도, 그리고 우성을 위해서도 더 나은 길이었다.

우성은 이번 일을 무척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우연이건 실력이건 혜미는 한 명의 플레이어를 처치했다. 굳이 심장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향해 검을 찔러 넣을 결심을 했다는 것은 그녀 역시 그렇게 여린 성격은 아니라는 뜻이었고, 동료로서 한 사람 몫을 해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우성은 이번 일을 통해 그녀를 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한 명의 플레이어를 상대하라고 떠넘긴 데에는 만약 플레이어를 상대로 제대로 싸우지 못하면 죽더라도 상관 않겠다는 생각이 밑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다행히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 이상이었다. 잘 버티기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한 명의 플레이어를 쓰러뜨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잘 한 거야.”

턱-.

우성이 혜미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머리 위로 올라간 손길에 눌리기라도 하듯 그녀는 양 다리를 오므려 얼굴을 파묻었다.

첫 살인에 대한 충격. 아직까지도 지금 이곳을 현실과 동일하게 인지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쉽게 헤어 나오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에게 이곳은 아직까지 현실이고, 살인을 밥 먹듯 여기기에 그녀는 너무 착했다.

**

해가 완전히 지자 우성은 더 이상 움직이기란 불가능 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혜미도 정신이 없는 상태인지라 우성은 결국 해가 뜰 때까지 잠시 쉬어가는 선택을 내렸다.

다행히 쉬어갈 만한 장소로는 방금 전까지 세 명의 플레이어들이 쓰던 작은 공터가 있었다. 혹시라도 다른 플레이어나 하프 구울과 같은 몬스터가 들이닥칠지 모르니 우성은 두 시간씩 교대로 혜미와 불침번을 섰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서 불편하게 잠을 청한 두 사람은 새벽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이슬이 맺힌 풀잎을 보며 슬슬 해가 뜰 때가 되자 우성은 찌뿌듯한 몸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갑자기 특성 하나가 생겨났다고?”

“응. 넌 안 생겼어?”

“그래. 어제 싸우는 걸 보면 다른 플레이어도 없을 걸?”

어둠을 조금 더 밝게 볼 수 있다는 특성 심연(深淵)은 언뜻 별 것 아닌 특성이지만 이곳 죽어가는 자의 숲에서는 엄청난 특전이나 다름없었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속은 낮에서도 어둑하다는 느낌을 풍긴다. 노을이 뜰 즈음부터는 벌써 밤인가 싶을 정도고, 밤이 되면 한치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들다.

심연 특성은 말하자면 야시경과 같은 기능이었다. 상대는 나를 볼 수 없는데, 나는 상대를 볼 수 있다는 이점은 어둠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라고 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차이 때문이지?”

“마력 능력치 차이 때문이겠지. 그거 말고 다른 게 더 있어?”

정답은 뻔했다. 혜미, 그녀의 능력치 중 가장 두드러지는 23포인트의 마력 능력치였다.

우성의 마력 능력치는 10포인트. 낮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다른 포인트에 비하면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수치였다. 반면, 혜미는 우성의 24포인트 정신력 스텟과 맞먹는 23포인트의 마력 스텟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신력 스텟이 어디에 영향을 미치는 스텟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건 마력 스텟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갑작스럽게 생겨난 플레이어 특성 심연을 생각해 보면, 선천적으로 높은 마력 스텟 덕분에 나름의 특전이 부여됐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처분을 갈등하던 우성에게 있어서 그것은 큰 희소식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싸운다 하더라도 어둠이라는 환경에서는 그 역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혜미라는 존재는 싸움 실력은 다소 떨어질지언정, 어둠 속을 조금 더 잘 볼 수 있는 심연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낮이면 몰라도 앞이 보이지 않는 밤에서 이만큼 든든한 동료도 없었다.

“그런가?”

“이제 좀 괜찮아 졌나 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더니.”

“그걸 아는 걸 보니 그쪽도 마찬가지 아니야?”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던진 그녀의 물음에 우성은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지금껏 딱딱하고 감정 없어 보였던 우성이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이자 혜미는 깜짝 놀랐다. 하긴, 진짜로 어디 하나 나사가 빠진 정신 이상자가 아니고서야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잠이 제대로 올 리가 있나. 언제 어디서 플레이어가, 몬스터가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감. 따뜻한 이불 속과 기름진 음식이 기다리고 있는 집을 떠올리면 지금 이 상황이 더더욱 처량하고 흐느껴질 뿐이었다.

우성의 담담해 보였던 모습들은 모두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포인트를 모으기 위한 그의 악착같은 집념이 이루어낸 모습들이었다. 처음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문득 우성이 왜 그렇게 포인트에 목숨을 거는지 궁금해졌다.

“당신 소원은 뭐야?”

“그게 왜 궁금하지?”

“그냥. 그냥 살아남으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포인트에 집착하는 걸 보면 뭔가 꼭 바라는 거라도 있나 싶어서.”

그녀의 물음에 우성은 잠시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입술을 곱씹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혜미가 깜짝 놀랄 정도로 수많은 표정들. 이렇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우성의 얼굴엔 행복함과 절망, 따뜻함과 차가움 등의 상반되는 여러 감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결국 마지막에 우성의 얼굴에 담긴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행복함과 절박함이 가득 담긴 복잡한 종류의 그런 감정.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혜미의 가슴이 애잔해질 정도였다.

“딸…….”

“응?”

“서현이라고. 딸이 하나 있다.”

우성이 손바닥을 폈다 오므렸다. 그는 손바닥 안에서 딸아이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쓰다듬었던 기억을 되새겼다. 너무나 행복해서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너무… 사랑스러운 딸이야.”

“…….”

“불치병이래.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아…….”

“그런데, 이 게임은 불치병도 고친다더군. 정말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잠깐이지만 딸아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혜미는 우성이 얼마만큼 딸아이를 사랑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왜 우성이 그토록 포인트에 목숨을 걸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절박함과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그렇구나.”

“차라리 욕해.”

“응? 뭐를?”

“서현이… 딸 하나 살릴 수 있으면 난 백 명이고 천 명이고, 만 명이고 죽일 수 있어. 그럴 수만 있다면 너도 죽일 수 있고.”

마지막 말은 안하는 게 나았을 뻔했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우성이라는 인간의 본성이자 모든 생각의 끝.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딸 하나, 서현이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애잔하네.”

“동정? 많이 받아 봤는데.”

“그럴 거 같아. 네 모습 동정받기 딱 좋은 모습이거든. 어떻게 살았는지도 대충 알 것 같고,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도 알 것 같아.”

우성의 얼굴은 겉보기에는 스물 중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서 그 나이에 딸을 두었다는 것은 십중팔구 속도위반의 경우였다.

하지만 순간의 욕구를 참지 못해 저질렀다고 보기엔 딸을 생각하는 우성의 마음이 대단히 깊었다. 아마도 무언가 사정이 있는 모양. 하지만 거기까지 캐물을 정도로 혜미는 눈치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았고, 슬슬 해도 떠오르는 듯했다. 우성과 혜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띠링-! 배치고사의 2일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하프 구울이 수면 상태에 빠집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의 수는 총 137명입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들 전원에게 5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축하합니다.]

[명령어 ‘랭킹’을 통해 현 배치고사 플레이어 랭킹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 날 아침이 밝았기 때문일까? 우성과 혜미, 그리고 모든 플레이어들의 눈앞에는 동시에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단순히 살아남기만 해도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은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들에게 큰 희소식이었다. 앞으로 하루만 더 살아남는다면 살인을 하지 않아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포인트를 지킬 수 있었다.

“137명이라… 많이도 죽었군.”

“네가 죽인 사람도 꽤 있지.”

“뭐, 그건 그렇지.”

쏘아붙이는 듯한 혜미의 말에 우성은 부정하지 않았다. 당장 어제 그의 손에 죽은 플레이어만 하더라도 무려 넷이나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루 사이 절반 이상의 플레이어가 죽었다는 사실은 무척 의외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조금만 돌려 생각해 보면, 죽을 만한 플레이어는 대부분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마도 앞으로 만날 플레이어들 중에는 혜미나 그 동생 혜정과 같은 무른 플레이어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어제 밤과 같이 살인에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은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는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처럼 말이지.”

“응? 뭐라고?”

“아니. 혼잣말이야. 그나저나 랭킹 시스템이라… 아무리 현실 같아도 게임은 게임이군.”

하루 사이 네 명의 플레이어를 죽였으면 나름대로 성과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우성은 이 배치고사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졌다.

“랭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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