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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13화 (13/258)

13화

“그년 참, 말랑말랑하고 끝내줬는데. 아쉽네. 너무 일찍 죽인 거 아냐?”

“그러게 말이야. 그냥 묶어서 끌고 다니면서 돌려 먹어도 됐을 건데. 낄낄.”

수풀이 베어져 있는 작은 공터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명의 플레이어는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었다. 조금만 대화를 들어 보면 그들이 바로 앞서 여성 플레이어를 윤간한 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쳤냐? 그러다 다른 플레이어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그리고 질질 끌고 다니기도 귀찮아.”

“귀찮은 건 그렇다 치고, 다른 플레이어가 뭐가 겁나? 만나면 죽여 버리면 되지. 우리 쪽수가 셋인데, 설마 미쳤다고 먼저 덤비기라도 하겠냐?”

“큭큭. 그건 그렇지. 됐고, 슬슬 일어나자. 잘만 하면 고년처럼 이쁘장한 년 하나 더 따먹을 수 있을지 누가 알아?”

세 명의 플레이어는 잠시 쉬던 중이었는지 잡담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숲에 몸을 숨긴 덕분인지 그들은 아직까지 혜미를 발견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지?’

분노에 차 입술을 깨물면서도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 플레이어를 윤간한 플레이어들을 용서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정작 그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모하게 정의감에 불타 앞으로 나섰다가는 오히려 그녀가 같은 꼴을 당할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 명의 플레이어는 공교롭게도 혜미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들짝 놀란 혜미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이대로 뛰어서 도망가야 하나? 아니면 계속 몸을 숙이고 숨어 있어야 하나?

어느 쪽이 되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뛰어서 도망가 봤자 남성 플레이어인 그들의 뜀박질로부터 따라잡힐 게 자명했고, 몸을 숨기고 있더라도 들킬 확률이 높았다. 결국엔 어느 쪽도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파삭-.

그 때, 다가오는 플레이어들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바람에 바로 뒤에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벌레 지저귀는 소리조차 없던 숲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거기 누구야?”

“…….”

대답이 들려올 리 없었다.

혜미는 양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혹여나 깜짝 놀라서 소리라도 지를까 덜컥 겁이 났다. 이미 들킨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혹시 모른다. 잘못 들은 거라며 그냥 지나칠지도.

“무슨 소리 났냐?”

“못 들었냐? 저기서 무슨 소리가 났는데…….”

“그래?”

소곤소곤 조용히 말한다고 하지만 이 조용한 숲 속에서 플레이어들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혜미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머리를 숙였다.

“야, 거기! 삼 초 준다. 아까 우리 얘기 들었지? 후딱 안 튀어나오면 아까 그년처럼 돌려먹고 죽여 버린다.”

“큭큭. 남자일지 여자일지 어떻게 알고?”

“킥킥. 설마 남자새끼가 숨어서 저러고 있겠냐?”

“하긴. 아, 기왕이면 이쁘장한 년이면 좋겠네. 똑같이 보x달고 있는 년이어도 못생긴 년들은 좀 그런데.”

대놓고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혜미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겁이 많아 보였던 것일 뿐, 원래 그녀의 성격은 성깔 있고 욱하는 기질이 다분했다.

“계속 지껄여봐 이 강간범 새끼들아-!”

벌떡 일어나며 꽥 소리를 지른 그녀는 씩씩거리며 단검을 빼들었다. 세 명의 플레이어는 수풀 속에서 나타난 그녀를 보며 휘파람을 풀었다.

“휘유. 목소리는 꽤 이쁜데?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꽤 성깔 있어 보이는데?”

“그래봤자 계집이지 뭐. 야야, 뭣들 해?”

세 명의 플레이어는 혜미의 주변을 슬금슬금 둘러쌌다. 한 번 성깔을 드러낸 혜미는 도망갈 생각도, 그렇다고 굳어버린 다리를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근데 내 얼굴이 안 보여?’

혜미와 플레이어들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열 걸음 정도만 움직이면 바로 검이 닿을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면 모를까, 심연이라는 플레이어 특성이 발동한 지금 혜미는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십대 후반, 혹은 삼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플레이어들은 혜미를 보며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전 대화에서 여성 플레이어를 윤간한 경험을 회상하고 있더니, 아무래도 그 여운이 꽤 강했던 모양이었다.

‘이 놈들은 내가 잘 안 보이나?’

엄밀히 말하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심연 특성이 발동되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어둠을 관통하는 시야는 단순히 시력이 좋다고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아포칼립스라는 게임 내에서, 23포인트라는 혜미의 마력 스텟의 영향을 받은 특성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잘만 하면…….’

게임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혜미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아무리 싸움에 무지한 그녀라 해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차이 정도는 안다. 그녀는 자신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이 난관을 헤쳐갈 생각이었다.

또한 그 이면에는 우성이 없더라도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계산도 깔려있었다. 양 손에 잡은 단검을 꽉 움켜쥐며 그녀는 몸을 아래로 푹 숙였다.

“이 썅년이, 어딜 도망가!”

한 플레이어가 혜미를 향해 도끼를 치켜들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탓인지 그는 혜미를 맞추지 못하고 애꿎은 수풀을 베었다.

혜미는 눈앞을 스치는 매서운 도끼질에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녀의 머릿속에 도끼가 박힌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헉.”

“이년이!”

“야, 조심해! 바로 죽이면 안 돼!”

한 플레이어가 도끼를 든 플레이어를 돕고자 가세했다. 세 명의 남자가 한 명의 여자를 상대로 다구리를 놓는 상황이었는데, 그들은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혜미는 방금 전 플레이어의 외침에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여성 플레이어를 가지고 놀 생각밖에 없었다. 독하게 마음먹지 못하고 붙잡히면 아까 봤던 여성 플레이어처럼 그들의 노리개가 될 뿐이다.

사악-.

혜미의 단검이 처음으로 플레이어를 향해 휘둘러졌다.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큰 부상을 당할 뻔한 플레이어는 날카로운 느낌에 헛바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큰일 날 뻔했네. 야, 조심들 해. 저년 아까 그년이랑 달리 독한 년이야.”

“아까부터 년년, 듣는년 기분 나쁘게 씨발!”

애써 욕설을 내뱉으며 혜미가 바짝 독기를 키웠다. 하지만 독기 하나만으로 어떻게 하기에 눈앞의 플레이어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년 참 성깔 있네. 크크.”

퍽-!

‘방패?’

그녀의 단검은 플레이어가 갑작스레 꺼내든 방패에 박혔다. 플레이어의 무기는 작은 한손 도끼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과 함께, 철판이 덧대어진 나무 방패가 그의 무기의 전부였다.

당황한 혜미가 힘을 주어 단검을 빼고자 발악했다. 하지만 애초에 방패에 무기가 박힌 이상, 어지간한 힘으로는 그것을 빼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는 짓 한번 귀엽네.”

퍼억-!

사악-!

“꺄악!”

플레이어는 혜미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고자 도끼가 아닌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혜미는 다른 한 손에 들린 단검을 휘둘러 플레이어의 팔을 베어냈다.

“아악! 이런 씨발!”

반쯤 베어져 피가 흐르는 팔뚝을 보며 플레이어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혜미를 보며 눈에 불을 켰다.

“이 개년이!”

“야, 멈춰!”

혜미를 향해 방패를 내려찍으려는 플레이어를 보며 다른 한 플레이어가 그를 말렸다. 다친 팔이야 어떻게든 치료하면 되지만, 한 번 사로잡은 여성 플레이어는 그들 입장에서는 귀한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씨발, 죽여버릴 거야!”

“너 혼자 난리치다 다친 것 가지고 왜 지랄이야? 그렇게 화나면 아까 말한 것처럼 묶어서 계속 데리고 놀면 되지.”

“이 씨발!”

계속해서 욕설을 반복하는 플레이어는 잠시 후 냉정을 되찾았다. 그 역시 이대로 혜미를 죽이는 것보다는, 아까 생각처럼 묶어서 계속해서 괴롭하는 편이 낫겠다 판단한 것이다.

“그냥 죽여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넌 이제부터 우리 장난감이야. 알겠냐, 개년아?”

“이익!”

“어딜 꼬나봐?”

퍼억-!

쓰러져 있는 혜미를 플레이어가 거칠게 발로 걷어찼다. 아무래도 아까 못한 분풀이를 이렇게나마 하는 모양이었다.

그 때, 자세히 혜미의 얼굴을 확인한 플레이어가 휘파람을 불며 미소지었다.

“이년 대박인데? 몸매도 죽이고, 거의 연예인급이야.”

“그러게. 이야, 이런 년도 다 먹어보고. 이 게임 정말 끝내주네. 킥킥.”

“병신들. 먹긴 뭘 먹어?”

서걱-.

그 때, 혜미의 얼굴을 가까이서 확인하던 플레이어의 목이 잘려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차, 하는 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린 플레이어의 모습에 다른 두 명의 플레이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창식아!”

“도망친 건 이따 얘기하고… 이번엔 잘 했어. 미끼 역할 한 번 끝내주네.”

“……우성?”

눈을 동그랗게 뜬 혜미의 눈앞에 익숙한 뒷모습이 나타났다. 자신이 버리고 도망간 동맹을 맺은 플레이어, 우성이었었다.

어떻게 자신의 뒤를 따라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혜미는 그의 등장에 든든함을 느꼈다. 벌써부터 한 명의 플레이어의 목을 베어버린 우성은 다른 두 플레이어를 보며 혜미에게 말했다.

“한 놈만 맡아.”

“응?”

“그럼, 내가 둘 다 상대하라고? 내가 네 보모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우성에게 의지하는 마음은 어디까지나 혜미의 입장이지, 우성에게 있어서 그녀는 보호해야 할 어린애가 아닌 동맹이었다.

말을 마친 우성은 곧장 한 명의 플레이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플레이어 역시 우성과 같이 검을 들고 있었는데, 우성은 재빠르게 자신이 상대할 플레이어를 선택한 것이다.

적 플레이어는 둘. 우성과 혜미 역시 둘로 수적으로는 똑같았다. 우왕좌왕 할 사이 없이 혜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까지나 짐짝 신세일 수는 없었다. 그런 취급은 자존심 강한 혜미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죽어어어!”

“이 썅년이?”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세에 묵직한 둔기를 든 플레이어가 깜짝 놀라 무기를 휘둘렀다. 그의 무기는 크고 무거운 만큼 위력은 강했지만, 그 대신 다른 무기에 비해 속도가 느렸다.

혜미에게는 다른 플레이어에게는 없는 심연(深淵)이 있었다. 앞이 또렷이 보이는 것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싸움에 있어서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어둠 속에서 들어온 혜미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둔기를 든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둔기를 피해낸 혜미는 반사적으로 단검을 깊게 찔렀다.

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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