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11화
Golden Age
2. 햇빛이 드는 창가(1)
델프트에 도착하니 알 수 없는 정겨움이 느껴졌다.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길 양옆에 줄지어 서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멋있다.”
차시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과연 Delven(네덜란드어: 파내다)란 단어에서 이름을 따온 도시답게 운하와 마을이 멋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오래된 건물이 많지?”
“응.”
“2차 세계 대전 때 피해를 입지 않았었대.”
바로 근처에 무역항으로 유명한 로테르담이 있어서 그쪽으로 피해가 집중되었다고 들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로테르담은 독재자에 의해 무참히 폭격당했단 뜻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구나. 자전거다. 저기도.”
차시현이 가로수 사이마다 빽빽이 놓인 자전거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 여기선 많이 타나 봐.”
“근데 왜 여기서 내렸어?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가는 거 아니야?”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은 델프트 바로 위 덴하그에 있다.
“잡화점 들르려고.”
“델프트의 여인 있었다던 거기?”
“응. 어떻게 입수했는지 물어보고 관리 방법도 궁금하고.”
“베르메르 생가도?”
“물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운하를 따라 걷다 보니 도자기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델프트는 18세기부터 도자기로 유명했는데, 당시 유럽에서는 청나라에서 수입해 온 청자가 인기를 끌었다.
해상 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던 네덜란드는 고가에 거래된 청나라 청자를 자체 생산하고자 이탈리아 장인을 데려온다.
그렇게 청나라 청자와 비슷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델프트 도자기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기다.”
루이 갈렌이 <델프트의 여인>을 샀다던 잡화점에 도착했다.
“……확실해?”
“주소는 맞는데.”
차시현만큼이나 당황했다.
허름한 매장이라고 들었지만 유리창이 깨져 있고 문짝이 부서진 것이 꼭 버려진 곳 같다.
나도 시현이도 말문이 막혀 그대로 굳어버렸는데 마침 안에서 소리가 났다.
가까이 가보니 왜소한 남자가 빗자루로 깨진 유리조각을 쓸고 있었다.
“저.”
“힉!”
남자가 어깨를 움츠리곤 벌벌 떨며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고훈?”
사람이 이렇게 밝을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환히 웃더니 빗자루를 내려놓는다.
“고 작가님 맞죠? 쇼콜라티에.”
“네. 안녕하세요.”
“저 진짜 팬이에요. 세상에.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언제 오셨어요? 관광 오신 거예요? 어. 이, 이리로 앉으세요. 어떡하지. 마실 게 없는데. 물! 물이라도 드릴까요?”
남자는 기쁜지 혹은 긴장해서 그런지 말을 뱉어냈다.
어찌나 빠른지 대답도 하기 전에 의자를 꺼내왔고 수건으로 먼지를 털어낸 뒤에 앉기를 권했다.
해맑게 웃는 얼굴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일행분도 드실 거죠?”
말을 전해주자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태풍이 쓸고 간 것 같은 매장 내부와 남자의 정신 없는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이 친구는 괜찮대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자가 매장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문턱에 발이 걸렸다. 놀라서 일어섰는데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이네.”
“나쁜 사람 같진 않아.”
매장을 둘러보니 손때를 탄 물건이 많이 놓여 있어 중고용품점처럼 보인다.
그런 한편 독특한 나무 조각상이라든가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가면 같은 게 있어 정체를 알 수 없다.
일반적인 잡화점은 분명 아니다.
“악.”
물을 가지고 온 남자가 또 한 번 문턱에 걸렸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컵에 있던 물이 절반은 쏟아졌다.
“다시 가져올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거 주세요.”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겨우겨우 물 한 잔을 얻어 마시니 멋쩍은 듯 웃는다.
“원래 이렇게 지저분하진 않은데 일이 좀 있어서요. 아! 혹시 그림 때문에 오신 거예요? 저 뉴스 계속 봤거든요. 작가님이 검증하신다고.”
뉴스를 접했다면 이야기 나누기도 쉬울 것 같다.
“맞아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시간 괜찮아요?”
“그럼요! 어차피 며칠 동안은 장사 못 하는데요 뭘.”
확실히 이 상태로 장사는 힘들 것 같다.
“고마워요. 많이 바빠 보이는데. 그러니까…….”
“아! 요니예요! 요니 크라머르!”
이름을 못 들어서 잠시 망설이니 남자가 냉큼 알려주었다.
“크라머르 씨 시간 너무 뺏지 않을게요.”
“많이 쓰셔도 돼요!”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델프트의 여인. 우선은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갈렌 씨가 사 간 그 작품이요.”
“네.”
“어디서 구하셨는지 궁금해요.”
요니 크라머르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작가님 오시기 전에 여러 사람이 다녀갔거든요. 저도 아버지께 여쭤봤는데 예전부터 집에 있던 거라고 하셨어요.”
“예전이라면.”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것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셨어요.”
집안에서 대대로 보관해 왔다면 비교적 추적하기 쉬울 거다.
문제는 베르메르의 작품 자체가 일부 부유층을 상대로 비밀리에 거래되었다는 점인데.
마우리츠하이스나 드레스덴 미술관에서 이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지 의문이다.
“그럼 보관은 어떻게.”
루이 갈렌은 <델프트의 여인>이 잡화점 입구 쪽 창가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고 말했다.
“창고에 있었어요.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저번 달부터 제가 대신 나오고 있거든요.”
“네.”
“보시다시피 물건이 너무 많아서 정리하고 싶었고. 어…… 창고에 있는 물건도 팔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다가 발견했어요. 자리가 없어서 그렇게 두었지만요.”
“처음 발견하셨을 때 상태는요?”
“그대로였어요. 딱히 특별한 건.”
“실례지만 혹시 창고를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요니 크라머르가 흔쾌히 창고를 보여주었다.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상당히 쾌적한 환경이었다. 창고 문 옆에 습도계와 온도계가 있고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으니 이런 조건이라면 <델프트의 여인>이 오래 보관되었어도 큰 문제 없었을 거다.
“전기 요금이 많이 나와서 제습기를 끈 적 있는데 아버지께 엄청 혼났어요.”
“작품 상태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아버님께서 잘 관리하셨네요.”
“맞아요.”
요니 크라머르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모든 게 지나고 나서야 알게 돼요. 제습기도 그랬고. 델프트의 여인도 전 그게 뭔지 전혀 몰랐거든요.”
베르메르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으면 결코 500유로에 판매하진 않았을 거다.
“전 아버지가 하는 일이 항상 마음에 안 들었어요.”
뭔가 마음에 담아둔 게 많은 듯하다.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시선을 마주했다.
“사정도 안 좋은데 자꾸 뭘 사들이셨거든요. 뭐가 멋있다느니, 언젠가는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느니 그런 말을 하시면서요.”
“네.”
“손님이 와도 본인이 정한 가격이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으셨어요. 전 하나라도 더 팔고 싶었고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요니 크라머르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그림만 해도 그랬어요.”
<델프트의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아버진 적어도 100만 유로는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실제로 갈렌 씨가 오기 전에도 사고 싶단 사람이 꽤 많았어요. 100만 유로란 말을 듣고 욕만 했지만.”
“네.”
“그렇게 계속 가격을 낮추다 보니 거기까지 이른 거예요. 그리고 이 꼴이 났죠.”
요니 크라머르가 어질러진 매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꼴이 나다니, 그건.”
“몇 사람이 찾아왔어요. 국보급 작품을 프랑스로 넘기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고.”
“말도 안 돼. 경찰은요? 신고는 했어요?”
“경찰을 불렀다면 이 거리에서 장사 못 할 거예요. 참아야죠.”
“…….”
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
일부 프랑스인이 잘못된 방향으로 욕심을 내는 것처럼 이곳의 몇몇도 정상이 아니다.
“죄송해요. 별 도움이 안 된 것 같은데.”
“아니에요.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아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보답하는 의미로 물건이라도 사고자 고개를 돌리니 차시현이 독특한 가면을 살피고 있었다.
네덜란드말을 몰라서 심심했던 모양.
거울 앞에 가서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게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무로 만든 가면인데 코가 길고 길쭉한 게 꼭 발리의 지신가면과 유사해 보인다.
“저거 얼마예요?”
“10유로예요. 끈도 드릴게요.”
100유로 지폐를 꺼내서 주었다.
“어, 거스름돈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괜찮아요. 인터뷰 해주셔서 고마워요. 또 들를지도 모르는데 그때도 잘 부탁드릴게요.”
“네, 네! 얼마든지요!”
* * *
잡화점을 나서서 베르메르 생가를 향해 걷던 중 사람들이 묘하게 우리를 피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리니 차시현이 조금 전에 산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응. 귀엽지?”
“어디가?”
“턱이 목을 가리는 점?”
아무 말이나 내뱉는 느낌이다.
“근데 좀 알아냈어?”
“응. 크라머르 씨 집안에서 계속 보관해 왔던 모양이야.”
“그것뿐?”
“충분해. 거래가 많이 된 작품은 추적하기 힘들거든. 게다가 베르메르는 사후 200년 정도는 무명이었으니 거래가 더 없겠지.”
“기록도 없잖아?”
“그걸 알아봐야지.”
“어떻게?”
“베르메르 작품을 보유했던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윌리엄 1세였어. 미술품을 수집하던 사람인데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에 본인이 소장했던 작품을 옮기기도 했거든.”
“응.”
“그쪽이라면 미술관 기록도 남아 있을 테니 뭔가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베르메르 생가에 가서 델프트의 여인이 실존인물이었는지 확인할 거고.”
“어딘지 알아?”
“여기야.”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가 알기로는 여기인데 집은 보이지 않고 교회와 그 옆에 거대한 하트 모양 조형물만 있다.
“와. 베르메르 가난했다고 안 했어? 아니지. 장모가 부자였다고 했지? 엄청 큰 부자였나 봐. 집 되게 특이하다.”
“아니야. 이건 교회야.”
당황해서 멍하니 있다가 검색해 보니 베르메르 가족이 살았던 장모의 집이 재개발로 인해 허물어지고.
그곳에 교회가 들어섰단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
“찾아보지도 않고 온 거야?”
할 말이 없다.
다른 일이 워낙 많기도 했고, 베르메르 정도 되는 인물의 생가가 허물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어떡해?”
파란 하트 모양 오브제를 보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치, 침착해.”
“망했어?”
“아니야. 방법은 많아.”
“많아?”
“아니.”
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