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10화
Golden Age
1. 황금시대(10)
차시현과 함께 네덜란드 델프트시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니 점심 즈음에는 도착할 것 같다.
자리를 잡고 앉자 차시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둘만 가? 대학원생도 같이 간다고 안 했어?”
“응. 공식 방문이 아니라서.”
원래는 루브르와 파리 보자르가 함께하는 일이었는데, 검증팀 자체가 무산되어 버렸고 당연히 연구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더라고. 파리에 있으라고 했어.”
앞으로 프랑스 미술계에서 활동할 친구들이니, 셰바송 씨몽처럼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이들의 눈밖에 나고 싶지 않은 거다.
그렇다고 지도 교수인 내게 못 간다는 말도 못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아서 먼저 말을 꺼냈다.
차시현이 나름대로 납득하곤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럼 난?”
“너?”
“응.”
별 생각 없었기에 어깨를 으쓱이자 뺨을 감싸고 몸을 이리저리 비꼰다.
“이제 나 찍힌 거야? 어떡해?”
“널 건들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없을걸?”
이 일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지만 쇼콜라티에 회원을 막대하는 이는 없을 거다.
나나 앙리를 적으로 두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차시현 본인도 집안이 좋으니 엄살을 부리는 것이리라.
다만 이만한 배경이 있어야 소신대로 활동할 수 있다는 건 씁쓸한 일이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웅.”
역시 크게 걱정하지 않은 듯 차시현도 곧 반색했다.
“근데 전부터 궁금했어.”
“뭐가?”
“루이 갈렌이 과장하긴 했지만 실제로도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며. 근데 왜 굳이 네덜란드까지 가려는 거야?”
17세기 무렵에 사용되었던 재료.
지금은 발견하기 힘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속눈썹이 그려져 있던 사실 등 <델프트의 여인>은 베르메르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루브르 박물관도 근거가 충분하다고 판단해서 <델프트의 여인>을 진품으로 발표하려는 거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차시현이 눈을 깜빡였다.
“첫 번째는 보관상태가 너무 좋다는 점이야.”
스마트폰을 펼쳐 <델프트의 여인> 고해상도 사진을 보여주었다.
“정말.”
“갈렌은 허름한 잡화점에서 발견했다고 했어. 문 옆에 방치되어 있었고.”
“햇빛을 받았겠네?”
“응. 세부 묘사가 떨어져 나갔다곤 해도 자외선에 노출되어 있던 작품치곤 상태가 너무 좋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근데 최근에 들인 작품일 수도 있잖아?”
“확인해 봐야겠지.”
<델프트의 여인>을 판매한 잡화점에 직접 들러서 물어볼 생각이다.
“또?”
“두 번째는 베르메르와 소녀의 관계야.”
차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실존했던 인물이라면 두 사람이 밀월관계일 가능성이 높아. 그런데 베르메르와 카테리나 사이는 정말 좋았거든.”
대니얼 스콧과 대화하며 상기하게 된 점이다.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만나 결혼을 약속했고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동거했으며 둘 사이에는 15명의 아이가 있었다.
베르메르는 처남이 아내와 장모에게 흉기를 휘두를 때 몸을 던져 막아낼 정도로 아내 사랑이 지극했다.
“어…….”
설명을 들은 차시현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진짜 이상하긴 한데.”
“응.”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잖아. 부인한테 헌신하는 척하면서 바람 피우는 남편.”
내가 즐겨 보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도 간혹 나오는 인물상이다.
“네 말대로 그런 가능성도 열어둬야 해.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생각에 벗어나는 일이니 의심도 해야지.”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검색했다.
“이번에 조사하면서 알게 됐는데 이 그림 배경에 비밀이 있었어.”
“무슨 비밀?”
“검은색이 아니었어.”
차시현이 또 한 번 고개를 기울였다.
“검은색이라 좋았잖아?”
차시현의 말대로 검은색 배경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매력 중 하나다.
칠흑 같은 배경에서 홀로 빛나기에 소녀는 더욱 입체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이미지를 준다.
“그게 베르메르의 의도는 아니었던 거야.”
“그럼?”
나도 최근까지는 몰랐던 일이니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년 전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주도로 여러 연구 기관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분석했어. 최근에 결과가 나왔고.”1)
“응.”
“베르메르가 층을 만들어 그린 건 알고 있지?”
“모나리자처럼.”
“맞아. 분석할 때도 레이어랑 색상을 나누어서 조사했어. 그랬더니 검은색 위에 파란색과 노란색이 같이 있는 안료층이 발견된 거야.”
“……초록색?”
“맞아. 초록색 커튼.”
“어?”
“자.”
차시현에게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의 조사 자료를 보여주었다.
그림 왼쪽 위에서 베르메르의 서명을 찾아볼 수 있고, 오른쪽에서는 커튼 주름을 찾을 수 있다.
“진짜다.”
“이 조사는 여기서 끝났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하더라고.”
신기한 듯 분석 결과를 살피던 차시현이 고개를 들었다.
“이 초록색 커튼.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글쎄?”
“베르메르가 살았던 집에 있었어.”
“어어?”
“아!”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를 본 차시현이 다소 큰 소리를 냈다.
본인도 놀랐는지 주변 눈치를 보곤 목소리를 낮춘다.
“녹색 커튼.”
“응.”
“뭔데? 나 하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대강 추측해 보면.”
“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이 방을 배경으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싶어.”
차시현이 눈을 크게 떴다. 어찌나 동그란지 컴퍼스로 대고 그린 듯하다.
“그럼 트로니가 아니란 말이야?”
“모르겠어.”
“왜 몰라. 너 아니면 누가 아는데.”
“만약에. 정말 만의 하나에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하고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배경이 같은 방이라면.”
“같은 방이라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실존인물일 가능성이 높아져.”
지금껏 트로니(가상의 인물상을 그리는 장르)라고 알려진 사실과 다르게 말이다.
“어……. 속눈썹도 있었다고 했었지?”
“맞아.”
“그럼 델프트의 여인이 존재하는 것도 설명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어.”
“또?”
“여기 봐 봐.”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의 정면 벽을 가리켰다.
“이게 뭐?”
“벽에 푸르스름한 흔적 안 보여?”
“……보여.”
“이게 마지막 의문이야.”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의 최근 사진을 찾으며 말했다.
“재작년에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에서 이 그림에서 바니시를 제거하려고 했었어.”2)
“왜?”
“덧칠이 되어 있었거든.”
“어?”
차시현이 또 큰 소리를 내곤 황급히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엑스레이로 촬영했더니 벽에 큐피트가 그려져 있었어.”
“큐피트?”
“응. 그 위에 덧칠이 되어 있어서 안 보였던 거야.”
“그래서 바니시를 벗기려고 했구나. 근데 베르메르가 덧칠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일리 있는 말이다.
베르메르가 처음에 큐피트를 그렸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덧칠했다면 바니시를 제거하는 일은 원본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
“맞아. 베르메르의 의도를 무시하는 일이니까.”
“응.”
“원래 수정도 많이 하던 사람이라서 처음에는 다들 베르메르가 수정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아니었어.”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데?”
“드레스덴 미술관 고고학 연구실에서 덧칠된 부분하고 원본 사이에 먼지 층이 있다는 걸 발견했거든.”
“아!”
똑똑한 녀석답게 금방 이해했다.
큐피트가 그려진 층과 덧칠된 층 사이에 먼지 층이 존재한다면 시간이 꽤 오래 흘렀다는 말이 된다.
“잠깐.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가 완성된 시기가 1659년이잖아. 베르메르가 죽은 건 1675년이고. 16년이면 먼지가 쌓여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베르메르가 살아 있었으면 본인 작품에 먼지가 쌓이도록 관리했을까?”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드레스덴은 그 먼지 층이 수십 년이 지나야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어.”
게다가 먼지가 얼마나, 어떻게 쌓여 있는가에 따라 시간을 유추할 수 있다.
“또 덧칠에 사용된 도료의 용해도가 베르메르의 방식과 달랐고.”
“그럼 정말 나중에 수정된 거네?”
“응. 그래서 최근에야 복원할 수 있었는데 이런 그림이 나왔어.”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이 심혈을 기울여 복원한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를 찾아서 보여주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하얀 벽에 섬세하게 표현된 큐피트 그림이 걸려 있었다.
본래 창가에 서서 편지를 읽는 여성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이 이제는 큐피트와 나뉘어 그림이 전체적으로 가득 찬 느낌이 든다.
덧칠되었을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 큐피트 본 적 있어.”
미술학도답게 금방 알아본다.
“맞아. 건반악기 버지널 앞에 서 있는 여인.”
베르메르의 또 다른 작품 <버지널 앞에 서 있는 여인>에서도 등장했던 큐피트다.
“이제 뭐가 이상한지 알 것 같아?”
“……아니.”
눈을 끔뻑끔뻑거리던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베르메르는 잊혔던 사람이야.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는 1742년 렘브란트의 작품인 줄 알고 팔렸고 19세기에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피테르 데 호흐의 그림으로 알고 있었어.”
“응.”
“무명 화가의 작품을 누군가 의도적으로 수정한 거지.”
“왜?”
“이유는 알 수 없어. 다만 베르메르가 죽고 몇 십 년동안 그의 작품을 마음대로 다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게 중요해.”
차시현이 고민에 빠졌다.
인중을 꾹꾹 누르며 생각을 이어가던 끝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를 수정한 사람이 델프트의 여인을 그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델프트의 여인>을 그린 사람이 베르메르 사후 그의 작품을 마음대로 수정했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면 모든 게 설명된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속눈썹의 존재 여부라든가, 17세기에 사용했던 안료를 사용한 점이라든가 말이다.
당시 사람이니까.
“아직은 모두 추측일 뿐이야.”
“그럼 어떻게 확인할 건데?”
“베르메르 연구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하고 같이 알아봐야지.”
그래서 네덜란드로 가야 한다.
기차가 빨리 델프트역에 도착하면 좋겠다.
* * *
1)실제로는 2018년 2월에 작업을 시작해 2020년에 분석 결과가 나왔다.
마우리츠하이스는 주도로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네덜란드 보존 과학 기술 연구소, 델프트 공대, 암스테르담 대학, 네덜란드 문화유산청이 공동으로 엑스레이와 디지털 현미경 기술, 페인트 샘플 분석 기술 등을 적용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분석했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에서는 2030년대에 들어서서 연구가 진행되었고 기술이 발달하여 결과를 빠르게 얻어낼 수 있다는 설정이다.
2)실제로는 2017년 5월에 시작.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은 1979년과 2009년에 적외선 반사분석법을 활용해 <열린 창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에 덧칠이 되어 있단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복원하기로 결정.
2017년에 작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