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6화
-르네상스-
12. 제육볶음과 백설기(1)
세계 곳곳에서 증오의 사슬을 끊어내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조용히 연말을 맞이했다.
결혼 이후 뜸하다가 모처럼 앙리네를 찾았는데 이상한 걸 두고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
“저딴 걸 못 해서 죽는 게 말이 되냐고.”
“어렵겠지. 저기 나온 사람들 어렸을 적에 다 했던 일 같은데.”
“그러니까 더 말이 안 된다고.”
“그러는 넌 얼마나 잘하는데?”
“하.”
앙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조각칼 든 지 20년이 넘었어. 저딴 것 하나 못 할 줄 알아?”
“그럼 해보든가.”
앙리와 미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너, 저거 만들 줄 알아?”
앙리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TV가 점토로 만든 듯한 뭔가를 비추고 있었다.
“몰라요.”
고개를 저으니 앙리가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검색했다.
“뭐 하고 있었어요?”
의자에 앉으며 미셸에게 물었다.
“드라마 보는데 저 인간이 자꾸 궁시렁대잖아.”
자세히 들어보니.
얼마 전 웹플릭스에서 전 세계 시청자 수 1위를 기록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보던 중, 달고나 뽑기란 게임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1)
어렵다, 어렵지 않다고 계속 싸웠던 모양.
볼 때마다 싸우는데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 의문이다.
“아르센.”
앙리가 비서 아르센을 호출했다.
“네, 작가님.”
“주방에 이거 만들라고 전해.”
아르센이 앙리가 보여준 조리법을 확인하고 빙그레 웃었다.
“달고나군요.”
“알아?”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재밌을 것 같아서 키트를 몇 개 사 두었는데 괜찮으시다면 그걸 사용하시죠.”
얼마나 인기가 많으면 한국 드라마 속 게임의 키트가 프랑스에서도 유통될까.
역시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잠시 후 아르센이 달고나 뽑기 키트를 가져다 주어서 나도 하나 얻었다.
“그래서 이게 뭐예요?”
“설탕을 가열해 녹이고 베이킹 소다를 섞어 만든 디저트야. 한국에서는 바늘로 모양을 뽑아내면 하나를 더 준다고 하던데?”
처음 듣고 본다.
할아버지, 방태호, 성귤 과장은 아실지 모르겠다.
“맛있어요?”
“맛 자체는 특별하지 않던데. 허니컴 토피 같아.”
일단 한국 간식이라고 하니 궁금해서 키트를 열었다.
과연 납작한 갈색 사탕에 동그라미가 새겨져 있다.
“이 모양대로 깨면 된다는 거죠?”
“응.”
앙리가 이상하게 느낀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실패하면 죽는 상황이라면 조심할 테고 크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다.
그런 생각으로 바늘을 들어 경계선을 누르자 사탕이 세 조각으로 박살 나 버렸다.
“……생각보다 잘 부서지네요.”
“응. 다들 어려워하더라. 동그라미는 곡선이라 특히 더 어려운가 봐.”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
아쉬움에 조각 하나를 입에 넣으니 약간 쓴 맛이 올라온다.
달짝지근하긴 하지만 맛 자체는 그리 내 취향은 아닌데, 사탕이 부드럽게 바스라지는 식감은 또 재밌다.
“별이다.”
키트를 확인한 미셸이 달고나를 들어 올렸다.
동그라미처럼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나 굴곡이 많아 상당히 어려울 듯싶다.
“넌?”
미셸이 앙리에게 물었다.
또 어떤 모양이 있을지 궁금해 앙리에게 다가가니, 그가 입술을 씰룩였다.
“…….”
“이게 뭐야.”
앙리의 키트는 누군가의 사인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주연 배우의 사인이네요. 만 개 중에 하나가 들어 있다고 하던데 운이 좋으시네요.”
기뻐하는 아르센과 달리 앙리는 몹시 당황스러운 눈치다.
그가 이렇게 평정심을 잃는 건 오랜만에 본다.
“설마 조각가 앙리 마르소가 포기하진 않겠지? 뭐, 부탁하면 바꿔줄 수도 있는데.”
미셸이 씩 웃으며 앙리를 놀린다.
조각칼을 든 지 20년이 지났다고 불과 5분 전에 이야기했으니 앙리 성격상 포기할 리 없다.
상황이 조금 재밌어졌다.
“보고나 있어.”
앙리가 바늘을 집어들었다.
과연 신중한 조각가답게 모양과 관계 없는 주변을 눌러보며 달고나가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한다.
“……빌어먹을.”
앙리가 으르렁댔다.
건드는 부위마다 경도가 다른 것 같다. 달고나 속에 공기층이 일정할 리 없으니 이곳과 저곳의 단단함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못할 것 같은데.”
솔직한 감상을 꺼내놓자 앙리가 고개를 훽 하고 돌렸다.
“닥쳐.”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르센이 남은 달고나로 만들어준 라떼를 마셨다.
“아직 안 봤어?”
아직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보지 않았다고 하자 미셸이 놀랐다.
“네. 요즘 바빠서요.”
“하긴. 나중에 시간 나면 꼭 봐. 재밌더라.”
미셸은 앙리 때문에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그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피의 낙인>을 가장 재밌게 봤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네.”
“음. 되게 예민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서 조심스러워.”
“무슨 이야기인데요?”
미셸답지 않게 대단히 소극적으로 말문을 띄운다.
“한국 사람들은 약간 싸움이라고 해야 하나. 언쟁 같은 거 안 좋아하지?”
“사람마다 다르겠죠?”
“그치. 모든 사람이 같을 리 없지.”
시원하게 물어보질 못한다.
“말해 봐요. 궁금하잖아요.”
“인종차별적인 생각 같아서 그래.”
“미셸이 그럴 리 없다는 거 아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면 비다를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을 거다.
미셸이 이마를 짚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왜 화낼 때 냐냐거려?”
“네?”
“뭐랄까. 귀엽게 이야기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눈만 껌뻑이니 미셸이 드라마를 틀어주었다.
-재밌냐? 어?
“여기랑.”
-미쳤냐? 미친 거지?
“여기서도.”
-장난하냐? 제대로 안 해?
“그리고……. 그래. 방금도.”
어이가 없는데 미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니. 그. 어미에요. 물어볼 때 말 끝에 붙이는 거요. 약간. 흐흫흐흫흨.”
“시끄러워!”
너무 웃겨서 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데, 고개를 드니 앙리가 달고나를 핥고 있어서 터지고 말았다.
“아핰핳항핰핰!”
“뭐가 웃겨!”
“히힠힣힣힠끽힉히.”
“웃지 마!”
* * *
모든 미술가가 코앞으로 다가온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가운데, 두 미술가 또한 각자의 꿈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은찬이 고마운 마음에 백설기의 손을 덥썩 잡고 흔들었다.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지만, 런던에서 생활하는 게 쉬운 결정일 리 없었다.
“제 일이기도 하니까요.”
백설기가 슬쩍 손을 빼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거리감 없이 무작정 달려드는 마은찬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작품부터 볼 수 있을까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작업실로 향하는 도중에도 마은찬은 쉬지 않고 조잘댔다.
“정말 한때는 어떻게 되나 걱정했거든요. 작가님이 와주셔서 진짜 진짜 다행이에요.”
“일정이 그렇게 급했어요?”
“네. 준비기간이 1년도 안 됐으니까요. 그런데 도중에 엎게 되어서 진짜 막막했거든요.”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는 4월 초로 예정되어 있었다.
올해가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준비할 시간이 석 달 정도만 남은 것이다.
‘절반은 채웠을 테니 나머지가 문제겠네.’
백설기는 마은찬이 마련해 준 기회를 최대한 살리고자 진지하게 일정을 계획했다.
남은 기간 동안 최소 나흘에 한 작품을 만들어야 하기에 한시도 낭비할 수 없었다.
“여기예요.”
마은찬이 작업실 문을 열었다.
마은찬의 작업실에 들어선 백설기는 말문이 막혔다. 작품들이 장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걸 반년만에 다 만드셨다고요?”
“네. 이중에 반도 못 건질 것 같지만요. 아, 커피 드실래요?”
장식장 하나에 작품에 9점에서 11점 정도가 있었고 그런 장식장이 양쪽 벽에 4개씩 있었다.
눈으로 대강 짐작해도 80여 점인데 반년만에 만들었다고 하니 평소 마은찬의 작업량이 의심스러웠다.
‘사람이야?’
나흘에 한 작품을 만드는 것조차 말이 안 되는 일이라, 각오하고 있었거늘.
이미 반년이상 이러한 작업량을 유지해 왔다는 걸 믿기 힘들었다.
“별로죠?”
마은찬이 넋을 놓고 장식장을 둘러보던 백설기에게 물었다.
“네?”
“사실 저 재능이 없는 편이라 남들보다 많이 만들고 그중에 그나마 괜찮은 거 발표하거든요. 지금까지는 어떻게 버텼는데 이번에는 좀 힘들더라고요.”
“아니.”
백설기는 기가 찼다.
다작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반 고흐가 화가로 생활한 10년 동안 900여 점의 작품과 1,100여 점의 습작을 그렸지만 그중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은 10점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다.
그조차도 다른 화가에 비하면 작품 수가 적은 편이었고 파블로 피카소는 평생 30,00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 역시 알려진 작품은 손에 꼽혔다.
걸작은 한 화가가 평생을 바쳐 한 점 그릴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그런 건 누구나 그래요. 이걸 정말 반년 만에 만들었다고요?”
“네? 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느냐였다.
백설기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이라고 생각했고, 마은찬은 그녀가 생각하는 천재의 부류였다.
‘이러니까.’
백설기는 이제야 마은찬의 성공 비결을 알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 세계 무대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그의 끝을 모르는 창작욕 때문이었다.
“……천재는 천재네요.”
백설기가 솔직한 감상을 내놓자 마은찬이 해맑게 웃었다.
“에이. 저 그런 말 잘 믿는 편이에요.”
“진심이에요.”
“작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진짜 믿고 싶잖아요.”
칭찬을 들은 마은찬이 어쩔 줄 몰라 좌우 어깨를 흔들었다.
“전 작가님이야말로 진짜 천재신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뭘요?”
백설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물에 물감 풀어서 작품 만드는 거요. 조명이랑 촬영은 그렇다 쳐도 물감마다 번지는 속도도 계산하셨다면서요?”
“그거야 당연히.”
“당연한 게 아니죠! 하나도 당연하지 않아요. 누가 그런 걸 계산하면서 할 수 있어요. 진짜, 진짜 작가님밖에 못 하는 일이에요.”
마은찬이 백설기의 작품에 대해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 순진무구한 태도가 백설기를 또 한 번 당황하게 했다.
런던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정말 본인이 이 일에 참여해도 되는 건지 계속해서 의문을 가졌던 그녀는, 마은찬이 자신을 정말 대단한 작가로 여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 이렇다 할 일이 없었는데도.
눈앞의 천재는 오직 작품으로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게 여기에 붓을 찍으면 물감이 들어간 그대로 고정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죠?”
“알겠어요.”
“그쵸? 무슨 느낌인지 바로 필이 딱 오시죠?”
“아니요. 작가님이 설명을 못 한다는 걸 알겠다고요. 천천히 처음부터 얘기해 보세요.”
“아.”
신나게 떠들던 마은찬이 굳어버렸다.
* * *
1)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모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