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80화 (38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54화

-르네상스-

11. 황금과 노랑(1)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자들이 신성한 그대 힘으로 다시 결합하고.

그대의 온화한 날개가 머무른 곳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리라.

-환희의 송가 中-

2034년 12월 25일.

각 지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아홉 번째 교향곡을 연주하는 가운데.1)

세계는 해바라기로 물들었다.

시민들은 인류애를 목놓아 외쳤던 악성의 목소리를 구호로 삼고.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임하여 몸소 해바라기가 되었던 이를 등불 삼아 거리로 나섰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크리스마스래.”

미셸 플라티니가 읽고 있던 기사 제목을 앙리에게 소개했다.

각국 주요 언론사가 추정한 EIE 운동 참가자는 대략 1,700만 명으로.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토론토, 런던, 파리, 리옹, 암스테르담, 빈, 브뤼셀, 밀라노, 모스크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마드리드, 서울, 인천, 도쿄, 오사카, 홍콩, 싱가포르, 타이페이, 상파울루, 라고스, 요하네스버그 등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신기하지 않아? 뉴스 보면 그렇게 싸우는데 1,700만 명이나 나섰다는 게.”

각국의 경쟁이 나날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화합을 이야기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집단하고 개인은 다르니까.”

미셸의 손톱에 달을 그려 넣던 앙리가 입을 열었다.

집단과 집단 사이에 발생하는 이해관계가 개인과 개인에 그대로 적용될 순 없었다.

프랑스로부터 식민지배를 받고, 독립 전쟁 도중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을 학살당한 알제리가 프랑스를 증오하는 건 당연한 일이나.

그럼에도 프랑스인과 교류하는 알제리인도 있었다.

“다르지.”

미셸이 앙리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서 더 신기해. 그 많은 사람이 전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게.”

EIE 운동에 나선 이들이 모두 같은 나라 출신에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치고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었다.

1,700만 명이란 국가적 단위의 사람이 아무런 구심점이 없이 한 마음으로 모이는 현상.

그 기적 같은 일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결과로 짐작할 뿐이었다.

“훈이가 여러 인종 아이들하고 어울리고, 사랑하자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혼자만의 힘이라고 하기엔 너무 대단하잖아.”

EIE 운동의 중심에 고훈이 서 있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훈이 1,700만 명의 사람을 대동했다고 말할 순 없었다.

첫 집회는 분명 혐오 범죄, 차별에 격노한 LA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이었다.

“신기할 거 없어.”

앙리가 고개를 들었다.

“2년 8개월을 본 사람은 누구나 감탄하지.”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의 영예를 안겨 준 <2년 8개월>은 지금도 앙리 마르소의 대표작이었다.

미셸이 피식 웃었다.

“베토벤의 화성, 반 고흐의 물감, 잭슨의 목소리, 톨스토이의 문장, 웰스의 영상 모두 마찬가지야.”

“계속해 봐.”

“예술 하는 인간은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솔직해져. 본인이 누군지. 무엇을 좋아하고 찾고 말하고 싶은지.”

미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앙리가 눈매를 좁혔다.

“움직이지 마.”

손톱 캔버스가 흔들려 자칫 실수할 뻔했다.

앙리가 다시 아내의 손톱에 시선을 두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가면을 쓰고 다니던 이들도 예술을 볼 때는 가장 개인적이게 되지.”

관계를 나눌 때 개인은 사회적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요구받는 입장을 지켜야 사회생활을 원만히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예술을 대할 때는 달랐다.

문학, 음악, 미술, 영화를 감상할 때는 오직 개인과 예술만이 존재했고, 때문에 개인은 사회적 가면(페르소나)를 벗고 온전한 나(에고)로 존재할 수 있었다.

“하긴. 영화나 그림이나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찾게 되니까.”

주변 사람이 아무리 추천해도 예술은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야 즐기게 된다.

앙리 마르소는 그것을 근거로 예술이 가장 개인적인 행위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예술에는 경계가 없고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과 친밀감이 생겨.”

“맞아.”

“한 사람의 인간임을 인식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상대도 인간적으로 대하지. 고훈의 해바라기는 계기일 뿐이야.”

“흐응.”

“반대로 나라, 종교, 인종만 인식하는 인간은 상대도 그렇게 생각하게 돼.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나라, 종교, 인종으로 보는 거야. 그러니 갈등이 해결될 리 없지.”

미셸이 눈을 깜빡였다.

아내가 대꾸하지 않자 그를 이상하게 여긴 앙리가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시선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야.”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꽤 깊이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차별과 혐오 문제에 관심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에서 의외로 깊이 고민한 흔적이 묻어나왔다.

“귀족 가문 출신 중엔 특히 그런 놈들이 많아.”

앙리 마르소가 미셸의 손톱에 탑 코트를 바르고는 고개를 들었다.

“자아가 성장하기도 전에 가문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부터 가르치니 세뇌되는 거야. 처음부터 자기가 어느 집안 자식이고, 어느 회사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

“그런 놈들에겐 자아실현처럼 에고에 기반한 일은 무의미해.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고.”

앙리 마르소는 그런 인간을 여럿 만났다.

“그런 놈들이 사회 지배계층에 있으니 달라질 리 없지.”

“그럼 바꿔야겠네?”

“바꿔도 똑같아.”

앙리 마르소가 단호히 말했다.

“그 세대는 다를지 모르지만 한 세대만 지나도 똑같아져.”

“EIE 운동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

앙리 마르소가 네일아트 도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말이야. 쉬지 않고.”

“흐응.”

미셸이 앙리의 생각을 나름대로 이해하고는 침대 틀에 등을 기댔다.

오늘 하루는 남편과 함께 느긋하게 영화를 볼 계획이라 TV를 틀었는데 앙리가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뭐 해? 어디 가?”

“르 제르맹 파라디시오.”

“……갑자기?”

난데없이 영화관에 간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뭐 해. 옷 입어.”

“나도 가?”

“그럼.”

부부가 말없이 한동안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무슨 영화관을 얘기도 없이 가자고 해?”

“영화 보자며.”

미셸이 며칠 전 대화를 떠올렸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 적이 많지 않았고, 결혼하긴 했으나 워낙 유명인인 남편 때문에 바깥 데이트를 즐기기 부담스러워 침대에서 영화나 보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착하기 전에 시트 갈아 놓으라고 했으니까 빨리 준비해.”

“어, 어…….”

미셸이 얼떨결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 * *

크리스마스 특집 방송을 준비했다.

LA에 기부했다가 이제는 G.O의 첫 판매 상품이 된 해바라기 티셔츠를 입고, 인중에 흰 수염도 붙이고 산타클로스 모자를 쓴 채 카메라 앞에 섰다.

크리스마스라 조용한 방송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접속해 깜짝 놀랐다.

└훈하!

└훈하!

└26일까지 자야 하는데 알람이 왔어.

└메리크리스마스!

└수염이랑 모자 뭐얔ㅋㅋㅋㅋ 너무 귀엽잖앜ㅋㅋㅋ

“안녕하세요. 다들 어떻게 된 거예요? 3만 명 넘은 적 많이 없었는데. 약속 없으세요?”

└들어오자마자 뼈 때리네.

└?

└훈이 선 넘네?

└크리스마스가 뭐죠?

└케빈이랑 노는 날임.

└크리스마스 애인 없이 보낸 지 30년째입니다. 시비 걸지 마시죠.

“부모님하고 선물 나누고 맛있는 것도 드셔야죠. 지금이라도 거실 나가서 부모님 꼭 안아주세요. 아, 방송 같이 봐주시면 정말 정말 감사하고요.”

└아…….

└우리가 미안해.

└아니,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쓰레기가 되잖아.

└하고 왔음.

└엄마ㅠ

└우리 아빠는 오늘 외식하자고 하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제발 나가서 친구라도 만나라고 하시던데.

└나 그래서 작년에 거짓말했음. 엄마랑 같이 보내려고 했지~ 하면서. 엄마 아들 친구 없다고 말 못 하겠더라.

└아니 왜 진짜 같이 얘기해.

└진짠데;;

별다른 뜻 없이 건넨 인사에 다들 힘들어한다.

가족과 화목하게 명절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부모님 이야기를 하니, 내 사정을 고려해 사과하는 사람도 보인다.

그런 뜻으로 꺼낸 말이 아니지만 해명해 봐야 더 이상한 쪽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느낀 바인데 내가 무슨 뜻으로 말하든 한 번 잘못 받아들여지면 되돌리기 힘들다.

화제를 돌리고자 다급히 손뼉을 쳤다.

“오늘은 저번에 약속했던 색 이야기를 가져왔어요. 노란색에 대한 이야기인데, 노란색 하면 뭐가 떠올라요?”

시청자들이 여러 의견을 내주었다.

개나리, 달, 바나나, 러버덕, 우비, 해바라기, 택시, 병아리, 리본, 노브랜드, 비타민, 덕도날드 등등 생각지 못한 것도 보인다.

“개나리랑 병아리 이야기가 제일 많은데 잘 말씀해 주셨어요. 개나리는 봄에 피잖아요? 병아리는 갓 태어난 아이고. 그래서 노란색은 희망과 행복, 즐거움, 생명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어요.”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다.

“이건 동양이나 서양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요. 우리나라 말에 땅이라는 뜻의 누리라는 단어가 있어요. 이 누리의 어원이 놀 또는 눌인데 노랑과 누런의 어원이 또 놀과 눌이라고 해요.”

노랑은 놀에서, 누런은 눌에서 나왔다고 한다.

“중국 천자문에서도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이라고 하잖아요? 이때 누를이 땅이라는 뜻이고 중국도 땅을 황색으로 인식한 거예요.”

한자를 적어주었다.

“그런 만큼 중국은 황색을 특별한 색으로 여겼어요. 대지를 뜻하는 색이다 보니 황제나 황족만 입을 수 있는 색이었요. 신성한 색이었던 거예요.”

미리 찾아두었던 중국 황제의 옷을 몇 벌 보여주었다.

“이집트랑 그리스도 마찬가지였어요.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는 노란색은 권력의 상징이었어요. 생명과 행복을 느낄 수 있으니 힘을 가진 사람들이 독점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서는 당대 기득권을 상징하던 노란색을 기피했어요. 또 권력과 결탁한 유다는 노란색 옷을 입은 것으로 표현되었고요.”2)

└맞아. 유다 찾을 때는 노란색 옷이나 손가락 동전 모양으로 한 사람 찾으면 된다고 들었음.

└좋은 색이었다가 유다 때문에 이미지 나락 갔네.

└근데 노란색 좀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되지 않나?

“맞아요. 방금 소개해 드린 일화 때문에 서양에서는 성스러운 노란색을 황금색으로 취급했고 일반적인 노란색은 기독교 윤리에서 벗어난 이단자 취급했어요.”

이미 황금색에 가까운 노란색으로 꾸민 교회나 신전을 허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당시 권력층은 노란색에서 황금색을 축출해냈다.

본래 노란색이 가지고 있던 생명과 행복, 부와 같은 긍정적 이미지를 모두 황금색이 가져가 버린 것이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노란색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노란색 염료는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거든요. 백성들이 옷을 노랗게 염색하니까 특권층이 더욱 빛나는 노란색, 즉, 황금색을 만들어 본인들만 사용한 거예요.”

결국 노란색과 황금색은 권력층이 본인들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 분리된 색이다.

“그리고 노란색에 대한 멸시와 탄압은 무려 1600년 동안 이어지죠.”

* * *

1)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라단조 교향곡, 일명 ‘합창’은 아시아권에서 한 해를 보내는 연말에 주로 연주되었다.

2020년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이해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유럽권에서도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송년 음악회 곡으로 연주하며 이러한 경향이 늘고 있다.

인류애와 희망을 노래했던 베토벤의 소망을 엿볼 수 있는 곡이다.

2)<다시 태어난 반 고흐 르네상스> 026화의 내용을 바로잡습니다.

해당 화 내용 중 ‘이것이 예수를 고발한 유다가 금화를 받았다고 하여 유다, 즉, 이단자의 색이 되기도 했다’는 틀린 내용으로 본문의 과정으로 이단자의 색이 되었음을 알립니다.

실시간으로 자료 조사를 이어나가는 도중에 미숙함이 있었고, 잘못된 정보를 알려 드려 죄송합니다.

해당 026화 내용은 수정하였음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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