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48화
-르네상스-
9.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하객이 찾은 결혼식(7)
“앙코르! 앙코르!”
베를린 필하모닉이 운영하는 해상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고 관객들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담아 함성을 질렀다.
미셸 플라티니 역시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들었어? 응?”
박수를 보내던 그녀가 문득 남편을 돌아보았다.
“안 들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손 안 보여?”
앙리가 박수를 보내는 손을 들어 보이자 미셸이 모자를 높이 던졌다.
“이 정도는 해야지.”
미셸이 씩 하고 웃었다.
찰스 브라움과 함께 이 시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나윤희가 독주자로 나서서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는 환상적이었다.
목관악기가 분위기를 고조하는 가운데, 춤추는 독주 바이올린.
붉은 드레스를 휘날리며 감미롭게 노래하는 바이올린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약 38분의 연주가 끝날 때는 차오르는 만족감과 함께 아쉬움마저 느낄 정도였다.
앙리 마르소가 피식 웃고는 떨어지는 모자를 잡아 아내에게 넘겨주었다.
“앙코르 안 해주려나?”
“하겠지.”
“어떻게 알아?”
“모든 공연을 앙코르 무대까지 상정하고 준비한다고 했어.”
“누가?”
“배도빈.”
“와아아아아!”
앙리 마르소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바이올리니스트 나윤희와 피아니스트 가우왕이 무대로 올라온 탓이었다.
“가우왕! 가우왕이잖아!”
미셸이 흥분해서 손을 휘저었고 덕분에 와인을 마시던 앙리는 잔을 급히 내려놔야 했다.
미셸뿐만 아니라 관객 모두가 잔뜩 흥분해 있었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사람 중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가우왕과 나윤희의 듀엣 무대에 기뻐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근데 옷 진짜 독특하게 입는다.”
미셸은 가우왕의 빨간 가죽 재킷을 보며 웃었고, 앙리 마르소는 맨살에 가죽 재킷만 입은 피아니스트를 심각하게 살폈다.
빨간 가죽 재킷과 하얀 가죽 바지, 새빨간 구두 조합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괜찮은데.”
“어?”
타인을 좀처럼 칭찬하는 법이 없던 앙리가 가우왕의 패션을 높이 평가하자 미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녕하세요. 나윤희입니다.”
그녀가 인사하자 객석이 곧 고요해졌다.
곧 있을 무대를 향한 기대와 설렘만이 콘서트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번에 푸르트벵글러호에 탑승하신 분 중에 신혼이신 분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앙코르곡은 그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크라이슬러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입니다.”
나윤희가 자세를 취하고 반주자로 나선 가우왕과 시선을 교환한 뒤 경쾌히 활을 놀렸다.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연인의 들뜬 마음처럼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발걸음은 생기 넘쳤다.
발맞추어 걷던 두 악기가 마침내 마주하고 이어지는 사랑의 속삭임.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듯했다.
“…….”
앙리 마르소는 이 달콤한 연주가 익숙하지 않았다.
밝고 경쾌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대화하는 ‘사랑의 기쁨’은 그가 아는 사랑의 형태가 아니었다.
너무 눈부시고 아름다워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존재하는 감정 같았다.
그의 사랑은 곧 이어지는 ‘사랑의 슬픔’과 비슷했다.
한 걸음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조심스러웠다.
바이올린의 애잔한 선율이 그를 고등학생 시절로 이끌었다.
* * *
“여기에 달아야 한다니까?”
“네가 뭘 알아?”
“너보단 훨씬 잘 알지.”
힘만 센 고릴라 같은 녀석이 또 고집을 부린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중앙이 아니라 외진 곳에 둔다는 말에 기가 찼다.
“이 전시회 기획자는 나야.”
“기획이 아니라 망치고 있잖아.”
고릴라가 또 노려본다.
훅이 들어올 거라 예상하고 피하려던 차 녀석이 입을 열었다.
“학교 강당이든 공원이든 자기 이름 걸고 전시하는 건 똑같다며.”
평소라면 괴팍한 주먹을 날렸을 녀석이 자존심에 상처라도 입은 듯 분해한다.
“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난 아무렇게나 할 것 같아? 너만 잘났어?”
“…….”
“방해하지 말고 꺼져.”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내 그림을 챙겼다.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야 할 텐데, 당장에라도 그림을 뺏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야 녀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여 시야가 좁혀져, 내 그림을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었고 그것으로 화제가 되어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든 것이었다.
이 상황을 예상했냐는 질문에 녀석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당연하지.”
“어떻게.”
“뭐?”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어.”
시야가 차단된 탓에 무심코 지나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러니까 네가 멍청하다는 거야.”
“대답이나 해.”
자리를 피하려는 녀석의 붙잡고 물었다. 다른 사람과 달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그 눈이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다는 증거였다.
“안 좋은 작품이었으면 그랬겠지.”
녀석이 내 손을 뿌리쳤다.
“좋은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고 사람이 몰리면 그 자체로 호기심을 살 수 있어. 적당히 기다리는 행위가 기대감을 높이고 그걸 충족시킬 수 있다면 더 큰 효과를 보겠지. 이제 알겠냐, 멍청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내 작품을.
이 녀석만은 알아보았단 말에 다소 충격받았다.
주먹이나 휘두를 줄 아는 놈이라 생각했건만, 전교생이 제출한 작품 중 내 그림만을 이곳에 걸어두어 사람을 모이게 하다니.
작품을 어디에 어떻게 거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
“뭐?”
“고맙다고.”
녀석은 잠시 놀란 듯 가만히 있다가 씩 하고 웃었다.
“얼마나 고마운데?”
그때부터였다.
그 미소를 본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내 마음을 흩뜨려놓는 그 이상한 미소를 보고 싶지 않아서 볼을 잡아서 늘였고 녀석은 더욱 화를 냈다.
매일 밤 찾아오는 미열에 취해 녀석이 한 번 더 웃길 바랐고.
그 미소를 본 뒤에는 일부러 괴롭혔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아서.
생전 처음 찾아온 간지러운 마음이 무엇인지 몰라서 무서웠던 탓이다.
* * *
앙리는 사랑을 속삭이는 관계를 맺은 적 없었다.
숨기기에 급급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5년간 기존의 관계와 친구, 연인의 경계선에서 번민했다.
비록 달콤하진 않고.
수없이 많이 싸웠지만 앙리는 분명 미셸을 사랑했다.
때문에 ‘사랑의 슬픔’의 가슴 아픈 선율이 더욱 와닿았다.
짧은 연주가 끝나자 앙리 마르소가 천천히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하고 피아노가 같은 멜로디 번갈아서 연주하는 게 너무 좋지 않아? 서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잖아.”
“그러네.”
“굳이 필요성을 못 느껴서 디지털 콘서트홀만 들었는데 확실히 실연이 다르긴 하다. 다음엔 베를린 직접 가서 들을래.”
“어.”
“진짜 좋았지?”
“그래.”
“좋았냐고.”
“좋다고.”
기어이 좋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만족한 미셸이 씩 웃었다.
앙리 마르소는 또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그녀의 양쪽 볼을 잡아 늘였다.
“……놔.”
“싫어.”
“놓으라고 했다.”
* * *
예정보다 일정이 길어져 두 달간의 긴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앙리, 미셸 부부가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찾았다.
“어서 와요.”
고훈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잘 지냈어?”
미셸이 오랜만에 만난 고훈과 볼을 맞대고 쪽 소리를 냈다.
“너무 잘 지냈어요. 피자 맛있더라고요.”
고훈이 웃으며 미셸과 앙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그림은?”
앙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기존 작품이나 소품은 보였지만 고훈이 약속한 200호 캔버스 크기의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벽 한쪽을 완전히 가린 대형 커튼이 의심스러웠다.
“저기야?”
“왜 이렇게 급해요. 앉아서 얘기 좀 해요. 어땠어요?”
“너무 재밌었어. 파타야 가봤어?”
“아니요. 어디에요?”
“태국. 헬멧 쓰고 바다로 들어가는 거 있거든. 눈앞에서 열대어가 막 돌아다니는데 진짜 너무 예쁜 거야. 아, 사진 볼래?”
“볼래요.”
미셸이 스마트폰을 펼쳐 태국 여행 사진을 보여주었다.
열대어들과 함께 있는 미셸과 앙리 모습에 고훈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픽 같아요.”
“정말.”
“근데 앙리는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어요?”
“헬멧 하나만 쓰고 어떻게 바다 밑에 들어가냐고 1시간을 버티더라.”
“언제 만들어졌는지, 보수 작업은 하는지도 모르는데 뭘 믿고 들어가?”
“별일 없었잖아.”
“유리에 흠집 나 있는 거 못 봤어?”
“강화 유리라고 했잖아.”
“접합부는 어쩌고.”
투닥거리는 부부를 두고 여행 사진을 둘러보던 고훈이 고개를 들었다.
“강화란 말 붙은 거 믿을 게 안 되더라고요.”
“거봐. 저놈도 그러잖아.”
“왜? 무슨 일 있었어?”
“실은 결혼식 그림을 거울에 그렸거든요.”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설마.”
“네. 깨졌어요.”
“뭐?”
“어떡해. 안 다쳤어?”
미셸이 놀라 고훈을 살폈다.
다행히 얼굴과 양손 등 드러난 곳은 멀쩡해 보였다.
“안 다쳤어요. 원래 큰 거울은 강화되고 비산 방지 처리가 되어 있대요. 강화는 믿을 게 못 되었지만.”
앙리가 고훈에게 다가가 볼을 잡고 얼굴을 돌렸다. 그것으로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셔츠를 벗기려고 하다가 미셸과 고훈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런 놈이라 미안해.”
“괜찮아요. 저런 놈이랑 계셔서 고생이 많겠어요.”
고훈과 미셸이 작게 웃었다.
“안 다쳐서 천만다행이다.”
“그리다가 깨진 게 아니라 그려두고 다음 날 작업실에 오니까 넘어져 있더라고요. 고정이 잘 안 됐나 봐요.”
“진짜 다행이다.”
“거울 어떤 놈이 옮겼어.”
앙리가 끼어들자 고훈과 미셸이 잠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대화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다시 그리지 싶었는데, 하다 보니까 어떻게 되더라고요. 한 작품 이렇게 오래 그린 적은 처음이었어요.”
“아, 그럼 완성한 거야?”
“네.”
고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가운데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앙리는 여기 앉아 봐요. 미셸은 여기.”
“응?”
“관람석이에요.”
“쓸데없는 짓 말고 빨리 내놔.”
“쓸데없는 짓 아니니까 앉아 봐요.”
고훈이 앙리를 앉히고 맞은편 벽으로 향했다.
벽 한쪽을 모두 가린 커튼이 걷히자, 그곳에 결혼식 그림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음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달 전 결혼식장이 펼쳐져 있었다.
미셸은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렸고 앙리 마르소는 눈썹을 잔뜩 모았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축하해주는 결혼식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거울에 비쳐서.
본인들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한 두 사람이 감격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셰리.
사회를 보는 아르센.
하객석 앞에 나란히 엎드려 있는 아홉 마리의 강아지.
아몬드를 나눠 먹는 마은찬과 고훈, 흐뭇하게 지켜보는 고수열과 방태호, 이한나.
결혼식 당일로 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특히나 그날 자신을 바라보던 앙리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던 미셸은 그림 속에서 재현된 남편의 은은한 미소에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정말. 정말 최고야. 고마워.”
미셸이 고훈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