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72화 (37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46화

-르네상스-

9.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하객이 찾은 결혼식(5)

남루한 차림으로 불한당 면접장을 찾았지만, 다음 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당당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사람이었다.

비엔날레 이후 따로 연락하진 않았어도 잊을 리가 없었다.

백설기가 장미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문자 봤어?

“보긴 했는데. 전시회 일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화이트채플에서 프리미어 전시회 준비하는데 문제가 생겼나 봐.

“화이트채플?”

백설기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화이트채플이라면 영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가장 유명한 갤러리 중 하나였다.

현대미술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예술가 여럿이 전시회를 연 곳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작품 거래 수, 거래액 모두 영국 최고의 갤러리였다.

그곳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건 곧 미술계 주류에 들어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마은찬을 재능 있는 미술가로 보긴 했지만 그만한 일을 준비하고 있으리라곤 상상하기 힘들었다.

-대단하지? 나도 놀랬다니까.

“그, 그래서?”

-고민하다가 네 작품 생각나서 연락했대.

“나?”

-응.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 봐.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알려줄까?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었다.

“좋아. 괜찮아.”

백설기가 냉큼 대답했다.

-아항항핳. 그래. 이야기 끝나면 나도 알려줘.

“응. 그럴게. 아, 언니.”

-어.

“그……. 진짜 말도 안 된다는 거 알지만.”

-응?

“내 작품 때문에 연락하는 거면 축전 같은 느낌으로 하나 정도는 전시할 수 있을까?”

-글쎄? 급하게 찾는 거 보면 그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

“정말?”

-나야 모르지. 잘 이야기해 봐. 체면 차린다고 가만있지 말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너 아니면 안 되는 일인 것 같던데?

“응.”

-그럼 알려준다. 얘기 잘하고!

통화를 마친 백설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이 잘 풀려서 축전이라도 걸 수 있다면 앞으로 활동에 큰 힘이 될 터였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 마땅한 일이 없었던 전시 이력에 탄력이 붙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야기하지. 너무 눈치 없이 구는 거 아닌가.’

백설기는 마은찬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고민하며 화이트채플 갤러리를 검색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미술가들의 전시회가 줄을 이루었다.

4~5년 전만 하더라도 무명이었던 마은찬이 이런 장소에서 개인전을 연다니 믿기지 않았다.

‘하긴. 작품 좋았지.’

백설기가 불한당 전시관에 걸렸던 마은찬의 작품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선한 소재와 방식에 집착하지 않고도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미술가였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 작품을 찾아보니 역시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느껴졌다.

‘대단하네.’

무슨 이야기든 어떤 방식이든.

자신만의 색이 묻어나와 사람을 이끌어 모으는 미술가.

백설기는 마은찬 역시 장미래, 고훈과 같은 천재라고 생각했다.

‘난 이게 뭐냐.’

백설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술관, 갤러리에서 오는 연락이 줄어들수록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 강박관념이 자리 잡은 뒤로는 작품을 만드는 게 무서워졌다.

이를 악물고 작업실을 지켰으나 막상 작업을 마친 뒤에는 본인조차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러면 안 돼.’

백설기가 고개를 저어 부정적인 사고를 멈추고자 했다.

부우웅-

때마침 스마트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백설기 작가님!]

[저 마은찬입니다! 장미래 선생님 통해서 연락처 얻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전화 드려도 될까요?]

백설기가 잠근 목을 풀고는 마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너무나 밝은 목소리에 백설기가 잠시 당황했다.

“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정말! 정말 감사해요. 바쁘실 텐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서.”

-그럴 리가요! 엄청 바쁘신 거 다 아는걸요. 작품 계속 발표하시잖아요.

작은 전시회라도 어떻게든 출품하고는 있었지만 마땅히 내세울 만한 일은 없었다.

백설기는 마은찬의 인사를 의례 건네는 말이겠거니 여기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들었어요. 어떤 일인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아! 전시회 준비하는데 정말 망했다 싶었거든요.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작가님 작품이 생각난 거예요.

“제 작품을요?”

-네! 레진 아트 준비하고 있었어요. 나름 신선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개벽으로 전부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형님, 아, 앙리 형님이요. 형님이랑 형수님 결혼식에서 훈이가 얘기해 주는데 완전 멘붕했지 뭐예요.

백설기가 잠시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격앙된 목소리로 주절주절 말하는 마은찬의 기세가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러다가 작가님 물에다가 물감 푼 작품이 생각났어요. 이거다 싶더라고요.

“아.”

물을 담은 투명한 어항에 물감 묻힌 붓을 찍어서 일시적으로 형태를 보인 바 있었다.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고안해낸 방법이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진짜 너무 멋있어서 저도 해보고 싶거든요. 혹시 괜찮을까요?

가슴이 꾹 조이는 듯했다.

무슨 일인지 작게나마 기대를 걸었거늘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법 문제였다.

표절 시비에 걸릴 수 있으니 허락을 구하는 것인데 이미 몇몇 사람이 활용한 방법을 조금 개량했을 뿐이라 굳이 허락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지.’

혹시나 작품의 연관성 때문에 연락한 거라면 그것을 핑계로 한 점 정도 보내고자 했거늘.

실망과 함께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갔다.

“괜찮지만.”

-정말요?

마은찬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네. 저…… 혹시 괜찮다면 어디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짧게 소개라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름만이라도.”

-어? 왜요?

너무나 천진난만한 질문이라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고 이름 석 자 적어주길 바랐는데 이마저도 거절하니 불쾌하기 이전에 좌절하고 말았다.

최근 몇몇 일로 자신감을 잃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겪은 탓이었다.

-저는 작품 내주셨으면 했는데. 제가 진짜 진짜 작가님 작품 좋아하거든요. 혹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눈치가 좀 없는 편이라서. 꼭 부탁드릴게요.

“……네?”

-그런 말 자주 듣는 편이에요. 앙리 형님이랑 형수님 같이 있는데 밥이 너무 맛있어서 계속 같이 있다가 쫓겨 나가기도 하고.

“아니요. 그런 일 말고.”

-말고요? 아, 사실 염치 없다는 말도 가끔 들어요. 하숙하던 집 빵을 혼자 다 먹어서 엄청 혼난 적도 있어요. 그땐 정말 배고팠거든요. 또 주인집 아주머니 솜씨가 정말 좋으셔서.

“그런 얘기는 궁금하지 않아요!”

백설기가 마은찬의 말을 끊었다.

“작품…… 내라고 말씀하셨어요?”

-진짜 염치없죠. 저도 알아요. 제가 생각해도 갑자기 연락드려서 이런 말 꺼내는 게 진짜 무례한 것 같아요. 지금 한국은 시간이……. 히이엑? 11시가 넘은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내일 다시 통화할까요?

“아뇨. 그것도 상관없는데.”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정말 작가님 말고 다른 분이 없거든요. 아니, 작가님이셔야 해요. 이번 전시회 콘셉트가 구상과 우연이라서 작가님 작품이랑 완전 찰떡이거든요.

마은찬이 또 조잘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백설기를 영입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앞뒤 설명 없이 간절하게 마음만을 전하고 있었다.

마은찬의 말을 듣고 있던 백설기가 헛웃음 지었다.

-여보세요?

“네. 듣고 있어요.”

-조건은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 진짜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런데 정말 기분 상하게 해드리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로요.

“알 것 같아요.”

-정말요?

“네. 여쭤보고 싶은 게 많은데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

백설기가 숨을 고르고 차분히 대화를 시도했다.

-네! 얼마든지요!

“우선은…… 작품을 보내달라고 하실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요! 감사합니다!

백설기가 헛웃음 지었다.

밝은 목소리를 듣다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각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그런데 정말 제가 도움이 될까요? 큰 행사잖아요.”

-그럼요! 당연하죠!

마은찬이 단호히 대답했다.

-전 이번 전시회 작가님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궁지에 몰려서 하는 말이라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확실히 설득력은 없었다.

앞뒤 구분 없는 말과 다급한 태도.

만약 일반적인 사업 관계였다면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겼을 터였다.

그러나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 참여 기회를 주는 입장에서도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고마웠다.

“콘셉트는 아까 말씀하셨고.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요?”

-면적은 620㎡ 정도 돼요. 절반 정도는 작가님하고 같이 꾸미고 싶어요.

전시실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그중 절반을 함께하자고 했으니 부지런히 준비해야 할 듯싶었다.

“그럼 전시회는 언제로 예정된 건가요?”

-내년 4월 3일이요!

“4월이요?”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단 말에 백설기가 당황했다.

약 90평 넓이를 함께 채워야 하는데, 화이트채플 갤러리에 걸 만한 작품이 쉽게 나올 리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마은찬의 표현이 납득되었다.

-너무 촉박하죠.

“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어요. 그럼 최대한 빨리 준비해야 할 텐데.”

워낙 갑작스럽게 찾아온 일이고 마은찬이 기존에 전시회를 어떻게 꾸미려 했는지 모르기도 했다.

-그럼 제가 한국으로 갈게요.

“네?”

-최대한 빠른 편 잡아서 갈게요. 내일이라도.

그러지 않아도 시간이 없는데 한국에 왔다가 돌아가면 며칠은 허비할 터.

백설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기왕 하기로 마음먹은 일이고, 놓칠 수도 없는 기회였다.

“제가 갈게요.”

-네?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한데. 바쁘시잖아요.

“맞아요. 바빠요. 반년도 안 남았잖아요.”

백설기의 말에 마은찬이 숨을 들이켰다.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 때문에 바쁘다는 말이 완전히 팀을 이뤘다는 것처럼 들려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마, 맞아요! 엄청 바쁘죠!

“준비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 * *

허리랑 팔이 끊어질 것 같다.

면적이 워낙 넓어서 사다리를 오르고 내리길 반복해야 했고, 사다리에 앉아서 작업하는 시간도 길다 보니 몸이 비명을 지른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6년이나 걸렸다고 하던데, 대체 60세 노인이 무슨 힘이 있어 그런 대작을 완성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앙리 말대로 정말 당시 미술가들은 철인이었던 모양이다.

“…….”

작게 그릴 걸 하고 조금 후회된다.

똑똑-

“훈아, 시간 괜찮아?”

방태호 목소리다.

“네. 들어오세요.”

“작품 하고 있으면 나와주면 싶은데.”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밖으로 나서니 방태호가 앙리의 법정대리인 숌즈와 함께 있다.

법조계에 종사하는 그가 내 작업물을 유출할 리는 없지만, 보안 때문에 나와달라고 한 듯하다.

“무슨 일이세요?”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선물이요?”

“네. 결혼식 증인을 서 주신 것과 그림을 그려주시는 일에 대한 답례입니다. 이걸.”

숌즈가 서류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갈르리 라파예트 근처 화덕 피자집의 부동산과 매장 소유권을 이전하는 계약서입니다.”

“……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피자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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