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50화 (35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24화

-르네상스-

6. 보여주는 사람(3)

“수고하셨습니다.”

고훈이 방송을 마치자 성귤 과장이 포도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고생하셨어요. 편집본 나오면 한번 보여주세요.”

“그럼요. 참. 그리고 이력서 들어왔습니다.”

성귤 과장이 비서 채용 이력서 한 뭉치를 고훈에게 넘겼다.

“이렇게 많이 지원했어요?”

“많이 추렸습니다. 일자리가 부족해서 그런지 많이 몰리더라고요.”

비서라고 해도 일정은 방태호가 직접 다룰 예정이었다.

운전이나 잔심부름을 부탁할 사람이 필요한데, 대충 훑어도 대단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지원한 듯했다.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다.”

작업실에서 천천히 살펴보고자 스튜디오를 빠져나오니 앙리 마르소가 대뜸 종이 한 장을 들이밀었다.

“뭐예요?”

“추가 내용.”

고훈이 복도를 걸으며 대꾸했다.

“그럴 거면 같이하지. 무슨 내용인데요?”

“코치닐.”

16세기 에스파냐의 탐험가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테카 왕국으로부터 가져온 붉은 염료였다.1)

“아.”

고훈이 어깨로 작업실 문을 열며 감탄했다.

“깜빡했어요.”

이력서를 내려놓고 앙리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아 살폈다.

당시 유럽에서 사용하던 빨간색보다 채도가 높았던 코치닐은 빨간색 염료 길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카라바조랑 렘브란트가 잘 썼죠.”

고훈이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를 떠올렸다.

그리스도가 입은 흰옷은 창백하기까지 한데, 그에 반대로 도마가 입은 붉은 옷은 너무나 선명했다.

당시에 큰 충격을 준 <의심하는 도마>는 코치닐의 선명함을 가장 잘 활용한 작품으로 유명했다.

색이 쉽게 바래는 단점 때문에 지금은 그 치명적인 색감을 느낄 수 없으나 흔적만은 남아 있었다.

“색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시기야. 당시 화가들에겐 그보다 흥미로운 것도 없었을 테지.”

앙리 마르소의 말대로 미술가들은 기존에 없었던 빨간색을 접함으로써 색채를 과감히 사용하게 되었다.

마침 유화가 발달한 시기라 화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거듭 개량된 유화는 아메리카, 중동, 아시아에서 들어온 수많은 염료, 안료를 통해 더욱 확장되었고 이내 바로크, 고전주의 미술의 토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곰브리치의 The story of Art를 서양미술사라고 하는데 제 생각엔 번역이 잘못된 것 같아요.”

앙리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말 그대로 미술 이야기죠. 미술은 유럽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라 아메리카, 중동, 아시아 여러 문명과 접하면서 변화해 왔잖아요.”

가장 널리 사랑받는 인상주의에도 유럽과 일본의 만남이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유럽은 우키요에의 대담한 색채와 파격적인 구도에 충격받았다.

반대로 일본 역시 유럽 문명에 영향을 받았었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아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야말로 미술의 역사라고 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로 시작했지만.”

앙리의 지적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된 방법으로 만난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노예로 부렸을 수도 있겠어요.”

“무슨 말이야?”

“연지벌레를 으깨서 만들었다고 하잖아요. 그 많은 걸 어디서 다 잡았겠어요.”

연지벌레 수천, 수만 마리를 으깨어 만드는 코치닐을 대량 생산하려면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에스파냐인들이 당시 아스테카인들을 어떻게 다뤘을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

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생각 못 했는데.’

고훈이 쓴입을 다셨다.

<아를의 침실>을 그릴 적에 이불을 코치닐로 표현한 적 있었다.2)

그것이 제국의 침탈과 수탈로 얻어낸 안료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쇼콜라티에 채널에 올릴 땐 빼먹지 마.”

“그러니까 같이하자고요.”

앙리가 잠시 고민했다.

고훈이 장난으로 만든 대본이라면 질색이었으나 방송을 직접 시청하니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뭐 할 건데.”

“녹색? 노란색?”

“녹색이 좋겠어.”

“그럼 하는 거예요?”

“어.”

고훈이 씩 웃었다.

* * *

[장수군청 문화관광사업과에서 연락드립니다]

[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소입니다]3)

[고려일보 박준일 기자입니다]

“아. 돌겠네. 진짜.”

이메일을 확인하던 장미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논개를 어떻게 표현할지 문의하는 연락을 받은 터라 노이로제가 생길 지경이었다.

논개의 고향으로 알려진 장수군은 1987년에 해주 최씨 가문에서 발간한 『의일휴당실기』을 근거로 그녀를 충의공 최경회의 부인이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문화원 향토연구소에서는 『어우야담』,『승전원 일기』 등을 근거로 논개가 기생이었음을 피력했다.

양쪽 주장에서 묘한 압력을 느낀 장미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

“기생이었는지 아닌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

논개가 기생이었는지 여부를 검색해 보니 수십 건의 기사가 등재되어 있었다.

장수군과 역사학자들이 서로 반박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며 장미래는 그들이 왜 다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국운이 위태로운 시기에 왜장을 죽인 위인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사망 당시 논개는 최소 19세에서 최대 23세로 추정되는데 과거 표준영정은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모습이었다.

앳된 나이에 목숨을 바친 논개로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그렸지.’

장미래가 표준영정 제작 과정을 살폈다.4)

7차례의 엄격한 심의를 통과한 표준영정은 가체 수정만 13번이 이루어질 정도로 고증에 철저했다.

얼굴 또한 신안주씨 사람들의 용모를 토대로 유전인자를 추출해 모형을 만들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고증 과정의 문제는 없어 보였다.

기법 또한 배채법과 육리문법, 적선법 등 전통 영정 방식을 완벽히 재현해냈다.

‘……내 고정관념인가.’

너무나도 철저한 고증으로 그려진 예전 영정.

장수군과 역사학자들 사이의 논쟁 사이에서 흔들렸지만, 장미래는 오직 논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집중하려 했다.

똑똑-

고민이 이어지던 차 노크 소리가 났다.

“네.”

고수열이 방으로 들어섰다.

“출발 시간 아니니?”

“아, 네.”

장미래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미리 싸두었던 짐을 챙겼다.

고수열은 그녀를 태워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아직 고민이 많은가 보구나.”

“네.”

장미래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예전 영정이 엄청 신경 써서 만들어졌더라고요. 그만한 고증은 못 할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떻게 해도 비교될 테니.”

“다만. 표준영정에서 그려진 논개가 정말 논개일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말해보렴.”

“사망 당시에 고작 19살이었어요. 근데 표준영정은 너무 이상적이라고 할까. 현모양처처럼 그려졌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장미래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생이었는지, 양반댁 첩이었는지, 현모양처였는지 모르겠지만 다들 논개를 보지 않고 있어요. 기생이라는 신분, 누구의 첩이었다는 점, 유교 사상이 바라는 모습에 대입하잖아요.”

장수군과 역사학자들이 무슨 이유로 주장을 거듭하는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어떠한 가치관도 대입되지 않은 논개를 그리고 싶었다.

“19살이면 젊다고도 못 할 나이에요. 그 어린 나이에 적장을 끌어안고 투신했어요. 전…… 기생으로도 현모양처로도 그리고 싶지 않아요. 나라를 지킨 숭고한 영웅이라고요.”

제자의 말을 가만 듣고 있던 고수열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논쟁이 치열하게 이어지는 골치 아픈 일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 장미래가 자랑스러웠다.

“아주 멋진 영정이 되겠구나. 완성되면 훈이랑 보러 가야겠어.”

존경하는 스승이 기대하니 한시름 덜어낼 수 있었다.

“근데 훈이는요?”

“마르소하고 영상 찍는다고 하더구나. 쇼콜라티에 채널에 올린다던데.”

“그렇게 투닥거리면서도 잘 지내는 거 보면 신기해요.”

“껄껄. 그래. 훈이가 마르소 코피 터뜨렸을 때는 상상도 못 했지.”

장미래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금환이랑 푸른 해. 진짜 멋있더라고요. 그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음.”

“그 둘이 붙어 있으니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구나 생각하니까 답답하기도 해요. 괜히 뒤처지는 것 같고. 학교랑 조합 일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야.”

“네?”

“사실 네가 벌써 어디에 묶여 있을 나이는 아니잖니. 한창 작품 활동 할 때인데 여기저기 신경 쓰느라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더라.”

“그런 말씀 해주시는 거 선생님뿐이에요. 정말.”

장미래가 엉덩이를 쭉 밀어 시트에 걸터앉았다.

“내년 르네상스에는 참가할 거지?”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데 시간이 될지.”

“자리를 내려놓더라도 참여했으면 싶은데. 서로 만나야 발전하는 법인데 지지난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후로 국제무대에 한 번도 안 섰잖니.”

“맞아요.”

장미래가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뛰기를 20년.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무작정 도착한 곳은 캔버스 앞이 아니라 사무실 책상이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

그녀는 이번 일을 해결한 뒤에 거치적거리는 일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 * *

1)아즈텍 문명

2)구조적으로 보면 <아를의 침실>의 중심은 빨간 담요다.

오른쪽 벽에 걸린 액자가 흘러나온 빨간 담요(코치닐로 채색한)를 향해 있으며 중앙과 왼쪽에 놓인 의자와 책상도 빨간 담요를 바라본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도르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아를의 침실>이 평온과 안식을 전해줄 거라 믿었다.

원근법, 기하학적으로 뒤틀린 <아를의 침실>이 안정된 분위기를 주기는 힘들고, 빈센트 반 고흐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러 구조를 뒤틀어 모든 오브제가 빨간 담요를 향하도록 그린 이유는 코치닐로 표현한 담요에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그에게 빨간색은 어떤 의미였을지 감히 추측해 볼 수 있겠다.

3)해당 기관은 명칭을 일부 바꾸어 사실과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4)논개 표준 영정,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종근 기자, 2018.07.17., 새전북신문 기사 참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