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49화 (34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23화

-르네상스-

6. 보여주는 사람(2)

“애초에 이딴 건 뭐 하러 기획했어?”

“팬하고 소통할 수 있잖아요.”

“소통은 작품으로도 충분해.”

“제 채널에 미술 더 잘 알고 싶다는 댓글도 많이 올라오고. 미래 이모나 알렉스 채널도 잘되는 거 보면 수요가 있는 거예요.”

“공부하고 싶으면 뉴튜브 보지 말고 도서관 가라고 해.”

고훈이 잠시 망설였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라 잠시 흔들리기도 했으나 앙리와 함께하는 영상 콘텐츠를 포기할 순 없었다.

“흥미가 중요하다고요. 뉴튜브로 편하게 보다가 더 알고 싶으면 책도 찾아보는 거죠. 또 영상 준비하다 보면 몰랐던 것도 배우게 되고.”

7년째 미술 관련 영상을 찍다 보니 기존 지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니 자연스레 관련 정보를 찾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얻는 지식이 상당했다.

“난 알 만큼 알아.”

앙리 마르소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고훈은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이유를 댔다.

“그러면서 돈도 벌잖아요.”

“돈 벌고 싶으면 그림을 팔아.”

“진짜 이렇게 나올 거예요?”

“어.”

거듭된 설득에도 돌아서지 않으니 심통이 난 고훈이 카메라로 시선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쇼콜라티에의 고훈입니다. 너무 딱딱한가요?”

“조금요. 사실 인사 멘트도 좋긴 한데 요새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게 좋더라고요.”

촬영을 돕던 성귤 과장이 나섰다.

“그래요?”

“네. 필요한 정보는 자막이나 그림 넣어서 편집할 거니까 편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고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색에 담긴 재밌는 이야기. 오늘은 빨간색과 파란색에 대해서 알아볼 거예요.”

“큭킇큭큭.”

앙리 마르소의 웃음소리에 고훈이 눈을 흘겼다.

“도와줄 거 아니면 나가요.”

앙리가 고개를 저었다.

구연동화 흉내라도 하듯 어색한 말투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고훈이 불쾌함을 애써 누르고 다시금 이야기를 꺼냈다.

“빛의 삼원색. 색의 삼원색이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하하하하!”

“웃지 마!”

그러지 않아도 쇼콜라티에 채널의 첫 영상이라 신경 쓰는데,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비웃으니 화가 났다.

앙리가 쿡쿡 웃으며 촬영장을 떠나자 성귤 과장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저……. 이사님, 평소랑 조금 다르신데 차라리 라이브 켜서 하시는 게 어떨까요.”

“많이 그래요?”

“조금은?”

고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이 본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평소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영상은 방송 분량 편집해서 쓰면 되니까요.”

“그럴게요.”

고훈이 개인 채널을 열자 순식간에 수천 명이 접속했다.

└갑자기?

└훈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후원 막혀 있음.

“안녕하세요. 강의 영상 찍으려고 틀었어요. 오늘 후원은 안 받을게요. 다른 소리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고훈이 시청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요새 어떻게 지내냐고요? 센강 강둑에서 아이들하고 그림 그렸고. 그제는 불고기 먹었어요. 미래 이모가 가져와서요. 다른 일정이 있는 건 아니고 잠깐 쉬러 왔던 거예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대요.”

근황을 나누다 보니 시청자가 어느덧 2만 명을 넘어섰다.

“그럼 시작할게요. 제목 보셨다시피 오늘은 빨간색이랑 파란색 이야기를 해볼 거예요.”

└네 교수님

└자다가 알림 떠서 일어나니 강의 시작하네.

└출석 체크 안 하세요?

“사람이 자연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색은 하얀색 즉 빛이었어요. 그다음으로 빨간색, 파란색, 녹색을 볼 수 있었죠. 이걸 빛의 삼원색이라고 해요.”

한 시청자가 빨강, 파랑, 노랑 아니냐는 채팅을 남겼다.

“빨강, 파랑, 노랑은 색의 삼원색인데 사실 빨강이 아니라 자홍색이에요. 파랑도 청록이고요. 제가 알기로는 서구권에서 자홍색을 빨강으로 잘못 쓰던 시절에 때마침 한국에서 도입한 거라 잘못 알려졌대요.”1)

고훈이 목을 풀고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튼 비슷한 계열이라고 보면 빛의 삼원색과 색의 삼원색에 빨간색과 파란색은 항상 들어 있잖아요? 그만큼 중요한 색이라서 제일 먼저 풀어보려고 해요.”

└다들 빨리 밑줄 그어

└나 이해했어. 그러니까 빨간색이랑 파란색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씀이죠?

└아니야.

└교수님 열받게 하는 채팅 치지 마.

“빨간색부터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이름이 붙여진 색이라고 해요. 역사 교과서 같은데 고대 벽화 나오잖아요? 잘 생각해 보면 그 그림이 대부분 빨간색으로 그려진 거 기억나실 거예요.”

시청자들이 긍정의 의미로 채팅창에 이응 두 개를 남겼다.

“그렇게 오래 사용한 만큼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데. 서양에서는 생명이나 건강, 힘의 상징이었어요. 사람 피가 빨간색이라서 그랬단 설이 가장 유력해요.”

“지금 보시는 그림은 칼 폰 필로티가 그린 카이사르의 최후란 작품이에요.”2)

고훈이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여 가운데 빨간 옷을 입고 있는 카이사르를 가리켰다.

“이 사람이 카이사르인데 보시다시피 빨간 옷은 황제만 입었어요. 로마 대군단에서도 붉은 망토를 두른 사람은 카이사르뿐이었대요. 당시에는 엄청나게 고가이기도 했고 그만큼 힘, 권위의 상징이었던 거죠.”

고훈이 화면을 넘겼다.

“동양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어요. 조선의 왕 어진을 보면 붉은 곤룡포를 입고 있잖아요? 양기와 생명이 충만해서 왕을 상징하는 데 쓰이기도 했어요. 신기하게도 유럽이나 동아시아 말고도 몸에 붉은 황토를 발라 적에게 위협적으로 보이려는 부족이 많았대요.”

└문명이 이어지지 않았는데 비슷하게 쓴 게 신기하네.

└공통되는 점이 있긴 한 듯.

└힘 말고도 다른 의미로도 많이 쓰이지 않나?

“맞아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혹시 여자아이는 분홍, 남자아이는 파란색이 어울린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ㅇㅇ

└지금은 차별적이라고 잘 안 하는데 21세기 초만 해도 그런 인식 있었지.

└꼭 여자애 방은 핑크, 남자애 방은 하늘색으로 꾸미는 사람 있었지.

“근데 예전에는 반대였어요. 신문 기사를 가져왔는데 잠시만요.”

고훈이 미리 준비했던 기사 캡처 사진을 화면에 비추었다.

[분홍은 대개 남자아이 색으로, 파랑은 여자아이 색으로 간주된다.]

-뉴욕타임스(1897년)

[일반적인 통념에 따르면 남자아이에게는 분홍이, 여자아이에게는 파랑이 좋다.]

-브리티시 레이디즈 홈 저널(1918년)3)

“이렇게 100년 전에는 빨간색 계열은 힘, 파란색 계열은 감성적인 이미지를 부여해서 남자는 빨강, 여자는 파랑으로 인식했어요. 그럼 파랑이 왜 감성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100년 만에 왜 바뀌었는지가 더 궁금한데.

└눈치 챙겨

└빨리 궁금하다고 해

└궁금해요!

└가르쳐 주세요!

채팅창을 확인한 고훈이 잠시 웃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라는 작가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을 썼는데 주인공 베르테르가 항상 파란색 연미복을 입고 다녀요.”

└우울한 걸 상징하나?

└맞네. 영어에서 블루가 우울하단 뜻으로도 쓰이잖아.

“맞아요. 블루스 음악도 블루에서 따온 말이고, 메리지 블루 같은 말도 있죠. 피카소도 우울한 그림을 파랗게 그려서 그 시기를 청색시대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근데 이게 우울함만을 말하는 건 아니고 빨간색이 지배하던 시대에 반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고훈이 디자인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빨간색은 힘과 권위를 상징하면서도 순수하고 분명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었어요.”

하얀 화면에 적나라하다는 단어가 한글과 한자로 적혔다.

“적나라하다는 말의 적은 한자로 붉다는 뜻이고, 나는 발가벗다는 뜻이에요. 발가벗은 상태가 붉다는 말이죠. 합리적이고 진실되었단 뜻이에요.”

└훈아 너 몇 개 국어 하는 거야……?

└한국어, 영어, 불어, 독어, 네덜란드어, 한자까지.

└라틴어도 잘함.

“쉿. 집중하세요.”

고훈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성귤 과장이 작게 웃었다.

“아무튼 그래서 고전주의 시대에는 권위와 이성의 상징으로 빨간색이 자주 사용되었는데, 낭만주의가 도래하며 기존 권위와 이성에 저항하는 의미로 파란색이 쓰였어요. 딱 보기에 반대되는 느낌이잖아요.”

└진도가 너무 빨라요 ㅠㅠ

└신기하네. 불하고 물 같은 느낌으로 반대 이미지니까 빨간색으로 상징되는 시대에 저항하는 게 파란색이 되어버리네.

“이 분위기가 프랑스 대혁명에도 이어져요. 당시 공화정을 상징하는 색이 파란색이죠? 그래서 지금 프랑스 국기에도 파란색이 있잖아요.”

└맞네.

└오 신기하다.

└앙리 오늘은 조용하네. 채팅방에 아이디 보이는데.

└근데 이상하네. 지금은 파란색이 약간 보수적인 이미지 아닌가?

“좋은 지적이에요. 프랑스 대혁명 부근에는 진보의 상징이었는데, 이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나서면서 그들이 투쟁의 의미로 빨간색을 사용하게 돼요. 빨간색에 저항했던 파란색이 다시 빨간색의 도전을 받게 된 거죠. 이게 실제로도 있었던 일인데 여러분 혹시 빨간색하고 파란색이 싸웠던 거 알고 계세요?”

└??

└어태 싸워?

“예전 염색하는 사람들은 빨간색 하는 사람은 빨간색끼리, 파란색 염색하는 사람은 파란색끼리만 모였어요.”

채팅창에 물음표가 반복되어 올라왔다.

“지금처럼 분리할 기술이 없었거든요. 강가에서 염료를 풀어서 옷을 물들이곤 했는데, 같은 곳에서 하면 빨간색이랑 파란색이 섞이잖아요? 그래서 작업하는 지역도 분리했었어요. 빨간색 염료 길드, 파란색 염료 길드도 만들어지고요.”

“아.”

성귤 과장이 감탄했다가 흠칫 놀라며 입을 막았다.

“그래서 서로 알력 싸움을 많이 했대요. 원래 파란색은 중세까지 계속 소외받은 색이었는데 12세기에 들어서 잠깐 인기가 생겼어요. 성모 마리아의 옷을 파란색으로 그리기 시작했거든요. 이 그림처럼요.”

고훈이 피에르 미냐르가 그린 <포도송이를 든 성모>라는 작품을 보여주었다.4)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파란색 옷을 걸친 성모 마리아의 자애로운 품에 어린 예수가 사랑스레 안겨 있었다.

“이 그림은 나중에 그려진 건데. 아무튼 파란색이 너무 아름다워서 왕과 귀족도 파란색 옷을 입기 시작했대요. 당연히 파란색 염료 길드는 호황이었고, 빨간색 염료 길드는 전에 없던 불황을 맞이했죠.”

└예쁘긴 예쁘네.

└무슨 파란색임?

└울트라 마린 아님?

“그렇게 한 세기가 흐르니까 빨간색 염색업자들이 더는 못 참고 일을 벌려요. 13세기에 빨간색을 다루는 사람들이 스테인드글라스 도공에게 로비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악마를 만들 때 파란색을 써 달라고.”

└왜?

└파란색 쓰게 하면 손해 아닌가?

└악마랑 파란색을 연결시킨 거네. 불길한 색으로.

└헐.

“정말이에요. 파란색이 인기를 끄니까 빨간색 길드에서 파란색의 인기를 떨어뜨리려고 사주한 거죠. 그 결과 파란색의 인기가 사그라들고 다시 빨간색의 시대가 온 거예요. 낭만주의가 오기 전까지요.”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강 마친 고훈이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았다.

색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신기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니 잘 준비했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방송 봐주셔서 감사하고. 다음에도 재밌는 이야기 준비해 볼게요. 아, 쇼콜라티에 채널 개설했는데 그쪽도 많이 찾아와 주세요. 다음에는 앙리도 꼭 데리고 올게요.”

└벌써 끝?

└아니 교수님 주말 보강한다고 불러 놓고 30분만 하시면 어떡해요.

└누구 마음대로.

└쫌만 더해줘 ㅠ 조금만 더 들으면 잘 것 같았단 말이야

└앙리 채팅 쳤다.

* * *

1)색의 삼원색: Magenta(자홍), Cyan(청록), Yellow(노랑)

2), 칼 폰 필로티, 1865, 캔버스에 오일.

3)‘분홍색과 양산’, 김영희 논설위원, 한겨례, 2018.07.23. 참조

4), 피에르 미냐르, 1640, 캔버스에 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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