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46화 (34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부 20화

-르네상스-

5. 세상을 비추다(4)

“참새.”

“짹짹.”

“오리.”

“꽥꽥.”

오늘부터 사흘간 파리시 환경 조성 사업 일환으로 센강 강둑에 그림을 그린다.

당연히 아이들과 함께하는데, 블랑쉬와 비다가 능숙하게 아이들을 이끌고 있다.

억지로 끌고 나온 앙리도 여전히 인기가 좋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보기 좋다.

“참새는 짹짹.”

“병아리는 뺙뺙.”

“뺙뺙?”

“앙리! 앙리는 어떻게 울어?”

호기심 많을 나이다.

“빌어먹을.”

“아항핳핳항 빌어먹을. 빌어먹을 운대.”

“빌어먹을이 뭐야? 빌어먹을. 빌어먹을.”

“얘, 얘들아. 그런 말 쓰면 안 돼.”

이제는 아이들 무리 중에서 나이가 제법 되는 아들리, 올리비에, 지미, 아망, 노엘이 어린 동생들을 챙긴다.

부모들이 함께하긴 하지만 워낙 수가 많아서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참 고맙다.

“껄껄. 다들 신났구나.”

“소풍 나온 것 같나 봐요.”

할아버지가 넘겨주신 간식을 방태호에게 받아넘기며 답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아이들을 본 적은 없네.”

방태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할아버지와 조깅하는 코스라서 자주 오가는데 어린아이를 본 기억이 많지 않다.

도심에 있어 놀기에 적당한 장소인데 말이다.

“워낙 시끄러운 때니까. 애들을 맘 놓고 내보낼 수가 있나.”

“하긴 그러네요. 읏샤.”

요새는 정말 뉴스에서 끔찍한 일만 보도된다.

가슴 아픈 일, 답답한 일, 화나는 일뿐이라 가끔은 귀를 닫고 싶을 지경이다.

“그래서 쇼콜라티에가 더 의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방태호에게 짐을 넘겨받은 성귤 과장이 기분 좋은 말을 꺼냈다.

“네. 더 노력해야죠.”

힘든 세상이니 더더욱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난 빨간색 주세요.”

“난 큰 붓 쓸래.”

“그래. 많이 있으니까 마음껏 써.”

아이들에게 크레용과 붓, 물감을 나눠주고 겨우 허리를 폈다.

할아버지와 둘이서는 엄두도 못 냈을 텐데 쇼콜라티에 회원과 직원들이 있는 덕에 그나마 수월하다.

“물고기 있을까?”

“보고 싶다.”

“나 저번에 여기서 어어엄청 큰 물고기 봤다?”

“에이.”

“진짜야! 우리 아빠보다 훨씬 컸어.”

그림보다는 강을 보며 노는 걸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 강둑에 쪼그려 앉아 수다를 떤다.

저러다 강에 빠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 다가갔다.

“물고기 찾았어?”

고개를 젓는다.

“보여줄까?”

“있어?”

대여섯 살 된 녀석들이 나란히 앉아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심장에 무리가 간다.

“이리 와봐.”

접시와 보드마카를 챙겨서 하나씩 나눠주었다.

“접시에 물고기를 그리면 돼. 이렇게.”

접시 위에 물고기 여럿을 그렸다.

생수병으로 물을 부으니 곧 물고기 그림이 떠올라 꼬물꼬물 헤엄친다.

“어!”

“어떻게! 어떻게 했어?”

“마술?”

물과 기름의 밀도 차이로 보드마카 잉크가 물 위로 뜨는 단순한 원리지만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마술이다.

“한번 해봐.”

“이거 물고기만 돼?”

“다른 거 그려도 돼.”

“그럼 난 배 그릴래.”

“난 엄청 큰 고기 그릴 거야.”

“난 고양이가 좋아.”

“고양이는 물에 빠지잖아.”

어떻게 하나 지켜보자니 물에 사는 동물을 많이 그린다. 스펀지빵과 뚱뚱이를 그리는 녀석도 있다.

“이사님.”

성귤 과장 목소리다.

“네.”

“인터뷰 요청이 많은데 잠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도착하기 전부터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성귤 과장이 물어볼 정도면 어지간히 귀찮게 군 모양이다.

“그럴게요.”

이대로 두면 직원들을 더 못살게 굴 테니 별수 없다.

아이들이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장소가 늘도록 홍보할 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앙리는요?”

“보시다시피.”

성귤 과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앙리가 아이들 얼굴에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너 이거 지워지면 죽을 줄 알아.”

“아항항항.”

“세수도 하지 마. 알아들어?”

“응!”

“엄마가 매일매일 세수해야 한다고 했는데?”

“내가 그려줬다고 해.”

“앙리가 우리 엄마 이겨?”

“어.”

다정하기도 하지.

얼굴에 그림 그려달라고 줄 선 아이들이 스무 명은 되는 것 같다.

언론 상대로 헛소리할 바에야 저러고 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겠다.

“혼자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 * *

첫날 작업을 마치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노곤하다.

2층 거실로 나섰는데 할아버지도 소파에 축 늘어져 계셨다.

“날이 너무 더울 때 시작했나 봐요.”

“그러게나 말이다.”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선풍기 바람을 맞았다. 손끝 하나도 움직이기 싫다.

“저녁은 시켜 먹을까요?”

“그래. 오늘은 안 되겠다.”

스마트폰으로 주변을 검색하니 이것저것 나오는데,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식당이 없다.

“시원한 물막국수 한 그릇 먹고 싶구나.”

“저도요.”

동해 삼척 부근에서 먹었던 동치미 막국수가 사무치게 그립다.

향긋한 메밀면에 얼음 동동 띄운 동치미를 붓고 갖은 양념장과 김가루를 잔뜩 풀어 먹고 싶다.

“이번 일 끝나면 한국 가서 푹 쉬다 와요.”

“그래. 청국장도 먹고.”

“포테이토 피자도 먹고.”

“피자는 여기도 있잖니.”

“한국하고 조금 달라요. 감자떡도 먹고 싶다.”

“감자떡도 먹어?”

“삼척 갔을 때 먹었잖아요. 쫄깃쫄깃해서 맛있었는데.”

“그치. 삼척 갔을 때 먹었구나. 옹심이 하나 뜨끈하게 먹고 싶네.”

“전 시원한 열무김치에 소면 말아먹고 싶어요.”

“허헣. 삼겹살하고 같이 먹어야지.”

“아. 삼겹살에 열무김치 국수.”

시원한 국수를 대패삼겹살로 감싸서 한 입 크게 먹어도 맛있고 쌈장을 듬뿍 찍어 마늘과 파채로 쌈을 싸 먹어도 맛있다.

“짜장면…….”

“짬뽕도 좋지.”

중국 음식도 먹고 싶다.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뿌려서 잘 비빈 다음 군만두와 번갈아 먹는 걸 상상하니 입안에 군침이 돈다.

한동안 말이 끊겼다.

아마 할아버지도 나처럼 음식 상상을 하고 계시리라.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소파에 앉은 채 물으니 스피커폰이 음성을 인식했다. 몇 년 전만 해도 골프채를 들어야 했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

-야호!

장미래 목소리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할아버지도 놀란 눈치다.

“이모 온다고 했어요?”

“아니.”

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가자 장미래가 짐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우리 훈이 잘 있었어?”

내 뺨을 감싸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어떻게 왔어요?”

“어떻게 오긴 놀러 왔지. 이모 안 보고 싶었어?”

반갑기야 하지만 대학과 조합 일, 개인 일정으로 바쁘다고 알고 있다.

“놀라서요. 바쁘지 않아요?”

“응. 엄청 바빠.”

“미래야.”

“선생니임.”

장미래가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우는 시늉을 했다.

“일은 어쩌고 여기 왔어?”

나도 묻고 싶은 일이다.

한국 예술인 조합이 안정화되고 서인호 화백이 자리를 내려놓으며 조합장 자리에 크게 두 사람이 거론되었는데.

한 사람은 당연히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파리에서 머문다는 이유로 거절하셨고 다른 후보였던 장미래가 조합장에 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올해부터는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학장도 맡게 되어 한창 바쁘다고 알고 있는데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의아하다.

“선생님.”

장미래가 바닥을 짚었다.

“그래. 그래.”

“저 다 그만두고 싶어요.”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니 할아버지가 장미래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셨다.

잠시 후.

저녁을 해 먹기 귀찮았던 터라 라면을 끓여 먹으며 사정을 들었다.

딱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껄껄껄. 이제야 철이 좀 드나 보구나.”

“농담 아니에요. 진짜 그림 그릴 시간도 없다니까요?”

장미래가 분통을 터뜨렸다.

“교수진 연구 실적이 저조하다, 취직 많이 시켜라, 입학 지원생이 왜 안 느냐, 예산이 왜 부족하냐, 너희가 적게 주니까 부족하지!”

“흐하하핳하!”

할아버지가 저렇게 크게 웃으시는 건 오랜만에 본다.

“조합원들도 이래서 힘들다. 저래서 힘들다. 자기들 일정 다 맞춰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럴 거면 때려치우든지.”

큰 단체를 맡게 되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활동하는 것도 체력 소모가 심한데, 여러 이권이 얽힌 사람들이 모였으니 머리가 아플 만하다.

“어린 게 싫으면 지들이 하지 왜 뽑아놓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대안도 안 내놓고 그저 훈수, 훈수.”

젊은 나이에 대표직에 앉은 만큼 원로급 인사들로부터 간섭도 많이 받는 것 같다.

“그래. 잘 왔다. 며칠 푹 쉬고 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미래를 위로했다.

한차례 불평을 쏟아낸 장미래가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훈이 이번 작품 반응 좋더라.”

“제가 생각해도 좋아요.”

“그럼 이틀 정도 쇼콜라티에 구경하고. 마르소 미술관도 구경하고. 일주일은 잡아야겠지?”

“마르소 미술관은 좀 더 잡아야 할 거예요.”

루브르 박물관만큼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할 정도로 많은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제대로 구경하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그렇게나 있으려고?”

할아버지가 걱정스레 물으셨다.

“개강 전에 할 일이 많을 텐데. 조합도 단체전 준비한다면서.”

“맞아요.”

장미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신력과 책임감이 강한 그녀가 할 일을 나 몰라라 하고 왔을 리 없다.

다만 부담과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듯하다.

사실 입장상 국내에서는 기댈 곳이 없으니, 할아버지를 찾아서 잠시 투정 부리는 것이리라.

“밥값은 할 테니까 며칠만 있게 해주세요.”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정말 괜찮겠어?”

“……늦진 않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장미래의 손을 쓸어내리셨다.

가장 아끼는 제자가 이렇게 힘들어하니 안쓰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듯하다.

“오늘내일 푹 쉬고 돌아가는 게 어떠니. 9월 되고 하면 좀 나아질 게다.”

시무룩하게 있던 장미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참. 내 정신 좀 봐. 불고기랑 열무김치도 좀 가져왔는데 냉장고 어디 있어요?”1)

“불고기요?”

“응.”

“열무김치?”

“네. 녹지 않았나 모르겠네.”

“빨리 말씀 안 하시고 뭐 하셨어요.”

서둘러 장미래의 짐을 풀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가져왔는지 모를 정도로 양이 많다.

“힘들게 가져왔는데 도로 가져가야겠네.”

“네?”

“여기 있으면서 천천히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가져가서 혼자 먹어야겠다.”

할아버지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나와 같은 생각이신 듯하다.

“크흠. 그. 너무 힘들 땐 쉬는 것도 중요하지. 큰일이야 있겠나.”

“맞아요. 쉴 땐 쉬어야 해요.”

“그렇죠?”

장미래가 씩 웃었다.

* * *

1)실제로는 전염병 등을 이유로 검역증명서 없이 반입하긴 힘드나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세계관에서는 가능하다는 편리한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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