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58화 (31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58화

16. 금도끼 은도끼(2)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프랑스 왕립 미술원으로부터 시작된 ‘완벽한 그림’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화가들은 ‘무명협동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권력의 중심이었던 살롱전에 참가하는 대신 평가도, 순위도 나누지 않는 전시회 ‘앙데팡당전’을 열었다.

운영비가 없었기에 작품을 걸려면 돈을 내야 했고, 나는 테오의 도움으로 두 작품을 전시했다.

그 첫 번째 앙데팡당전에서 클로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가 화두에 올랐던 것.1)

루이 르로이라는 비평가는 모네의 작품을 두고 ‘완성하지도 않은 작품을 전시하는 편의주의가 참 인상적이다’라고 했다.

덕분에 앙데팡당전은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고 불렸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근현대 미술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루이 르로이가 살아 있다면 두고두고 그때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을 것이다.

미술사학자들이 말하듯.

클로드 모네는 근현대 미술의 기원이나 다름없다.

“신경 쓰지 않아요.”

“정말?”

“네. 그건 그 사람들이 할 일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절 뭐라고 부르든 제 그림이 달라지는 일은 없어요.”

그들이 나를 쇼콜라티스트라고 부르든 까까주의자라고 부르든 내가 고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없다.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결국에는 내가 ‘빈센트 반 고흐’란 하나의 장르이자 상징으로 여겨지게 된 것을 확인했으니 그저 내 길을 걸을 뿐이다.

“그리고.”

“응?”

“무관심보단 차라리 그런 게 나아요. 욕을 하든 이상한 이름을 붙이든 어쨌든 제 그림을 보러 와 준 거잖아요.”

“흐응.”

김지우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하나 더. 서리 밀밭이 심상치 않아.”

“심상치 않아요?”

“응. 매일 가 봤는데 장난 아니더라고. 앙리 마르소는 나흘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던데?”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 나고 귀찮은 사람이긴 하지만 다나카 히로부미로부터 날 보호하려고 한 것 같기도 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들 사고 싶은 눈치더라고. 영화감독 크리스틴 노먼도 들렀고, 심지어 유장혁 회장도 왔다 갔어.”

“크리스틴 노먼은 누구고 영화감독은 뭐 하는 감독이고 유장혁 회장은 누구예요?”

꼬리 물어서 질문하는 것도 이제는 지쳐서 한 번에 다 물었다.

김지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WH그룹 유장혁 회장 몰라? 배움 미술관도 WH그룹 거잖아!”

“미술관 사업하는 분이에요?”

“네가 어리긴 어린가 보다. 아무튼 세계에서 돈 가장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크리스틴 노먼 감독도 엄청난 사람이야. 블랙 나이트 시리즈랑 덩케르크 철수 작전, 폴 투 윈 같은 영화 못 봤어? 아, 볼 수 있는 나이가 아니구나.”

“일단 영화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히~”

둥근 눈이 몹시 떨린다.

“아니 그건 좀 심하잖아. 영화 한 번도 안 봤어? 만화영화라도.”

“만화영화?”

“왜. 캐릭터들 나와서 막 움직이는 거.”

“스펀지빵 같은 거요?”

“그래! 아네! 만화영화는 만화가 움직이는 거고 영화는 그냥 사람이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연극을 영상으로 찍은 건가 보다.

“세상에. 할아버지한테 영화 좀 보여달라고 해. 아마 도움도 많이 될걸? 문학, 음악, 미술 안 쓰이는 게 없는 종합 예술이니까.”

종합 예술이라.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인가.

“그럴게요.”

이후에 방송 출연을 마치면 할아버지께 영화라는 걸 보여달라고 해야겠다.

“그래서 아무튼. 다들 이번 경매가 엄청 치열하지 않을까 예상해. 손님보다도 높지 않을까 하는 거지.”

내 그림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니 나야 기쁘지만, 그림이 팔릴 때마다 당황스럽긴 하다.

“…….”

하지만 앙리 마르소처럼 나만의 갤러리와 작업실을 짓기 위해서는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어때?”

“좋아요.”

그러니 사 준다고 하는데 굳이 뜯어말릴 필요는 없으리라.

“좋은 거야 당연히 좋지. 남들은 평생 벌어도 못 모을 돈인데. 좀 풀어서 말해봐.”

“아, 시간 됐다. 가봐야 해요.”

“벌써? 자, 잠깐만. 휘트니 비엔날레 가게 되면 꼭 말해줘? 꼭? 내 번호 알지?”

“그럴게요.”

* * *

앙리 마르소는 오늘도 <서리 밀밭>을 찾았다.

구도, 색 활용, 붓 터치, 질감, 양감 모두 하나의 가치를 위해 완벽하게 기능했다.

‘치밀해.’

생략된 부분이 많고 섬세한 묘사는 없었지만 마치 눈앞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밀밭이 펼쳐진 듯했다.

사진보다 사실적인 그림이 탁월한 묘사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얼어붙은 밭을 표현하기 위해 고훈이 어떤 방식을 취했는지 깊게 이해하기에.

앙리 마르소는 <서리 밀밭>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떻게.’

자세히 살필수록 그 의미가 깊게 묻어나왔다.

그렇다고 어려운 그림도 아니었다.

도리어 심상이 너무나 강렬하여 고훈의 목소리가 가슴에 와닿았다.

허영과 허세로 가득하고.

목적과 대상마저 잃은 쓰레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좀 아쉽다.”

함께 있던 미셸 플라티니가 혼잣말했다.

그녀는 <서리 밀밭>이 더 넓고 다양한 지역에서 공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태호 큐레이터가 꾸민 전시실은 나무랄 것 없이 훌륭했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한국 미술관은 해외 전시를 활발하게 하지 않았다.

이번 전시회의 모든 작품이 사실상 기간 독점으로 묶인 건 고훈에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휘트니 비엔날레에 걸리면 훨씬 더 좋은 평가 받을 텐데.”

미셸의 말에 앙리 마르소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앙리 마르소도 휘트니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었다.

신작 한 점과 이미 공개한 작품 중에서도 특히나 마음에 드는 것을 함께 보낼 예정이었다.

그에 반해.

고훈의 그림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앙리 마르소는 <서리 밀밭> 같은 작품을 하나의 미술관이 독차지하는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더욱이 미술 시장이 좁고 접근성도 떨어지는 지역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 할래?”

미셸을 말에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돌아가야 해. 공사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먼저 가.”

앙리의 태도에 미셸은 그가 <서리 밀밭>을 사려고 마음먹었단 사실을 눈치챘다.

가져야 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걸 잘 알기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미셸 플라티니가 고개를 들었다.

이 숭고한 자태를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경매 끝나면 뉴욕부터 들러. 자세한 건 아르센 씨께 말해뒀어. 아, 그리고 모레쯤 배송된다고 하더라.”

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가볍게 뺨을 맞대고 인사했다.

미셸을 보낸 앙리 마르소는 다시금 <서리 밀밭>에 빠졌다.

사실보다 사실적인 그림.

자신을 찾기 위해 방황하던 천재 화가는 고훈의 그림으로부터 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사물로부터 본질을 이끌어내는 방법.

인상주의, 표현주의로 시작하여 수많은 화가가 매달렸던 하나의 목표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서리 밀밭> 앞에서 한참이나 사색에 빠진 앙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앙리는 마침내 인정할 수 있었다.

그조차 완성하지 못했던 <마르소의 보석>에 그려 넣은 눈부터 <서리 밀밭>까지.

고훈은 특별했다.

머저리들만 있던 미술계에 드디어 자신을 뛰어넘는 화가가 나타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구스타프 클림트.

파블로 피카소.

천재 중의 천재라는 이들과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앙리는 자신의 시대에 나타난 규격 외 천재의 그림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넘어선다.’

비록 지금은 인정하지만.

뒤처진 채 있기엔 그는 본인과 자신의 그림을 너무나 사랑했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 자신을 믿었고, 그런 자신을 자부했다.

마음을 뒤흔든 걸작을 만난 화가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의지로 더욱 타올랐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수록 <서리 밀밭>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품마다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법.

<마르소의 보석>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듯 이곳은 <서리 밀밭>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 * *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훈의 ‘달콤한 행복’을 연장 전시하기 위해 김형우 작가를 만났던 방태호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뭐, 배가 안 아프면 거짓말이고.”

“하하.”

“그래도 오랜만에 멋진 후배가 나왔는데 방해하면 쓰나. 그러지 않아도 고수열 선생님께서 혹시 그런 이야기 있을 수 있다고 미리 말씀하시더라고 미안하다면서.”

“아.”

“그러니 방 팀장도 너무 맘 쓰지 말고. 약속한 것만 잘 지켜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래. 어서 들어가.”

김형우 작가와 헤어진 방태호 큐레이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 큰 갈등 없이 고훈의 전시회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나 처리했으니.’

남은 일은 경매.

전시회 6일 차가 된 현재 정가를 매긴 작품들은 이미 구입 의사를 밝힌 이들이 수두룩했다.

고훈의 그림 가격은 최소 5,000만 원에서 최대 3억 원까지 고루 분포했지만 대부분 주인이 정해져 있었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에는 곧장 결제와 이관이 될 테고 남은 일은 제4전시실에 있는 <서리 밀밭>과 세 점의 해바라기 연작이었다.

‘큰 문제 없어야 하는데.’

WH배움 미술관의 보안을 의심하진 않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바라는 작품이라 훼손과 도난이 걱정되었다.

시가총액 합산이 1,700조 원에 달하는 WH그룹의 유장혁 회장까지 전시회에 다녀간 탓에 이목이 쏠려 있었다.

고훈과 이번 전시회에 관련한 기사가 하루에도 수백 건씩 등재되었고 미술관 방문자는 하루 1만 명을 돌파한 지 오래였다.

“하핳.”

방태호는 전시회가 끝나고 남은 그림을 대여해 전시하겠단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품이 하나라도 남을까 싶었다.

‘정말 신기한 애란 말이야.’

모든 것이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미대는커녕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아이가 혜성처럼 등장하더니 한국과 유럽, 그리고 북미까지 뒤흔들었다.

미술계가 워낙 협소하여 움직이는 인원이 크진 않았지만 그 작은 파이가 조금씩 커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잘 키워보고 싶은데.’

방태호는 고훈이 좀 더 작품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돕고 싶었다.

재능 있는 화가가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돕는 시스템이 한국에는 없었다.

전시회를 포함한 대외 활동 및 일정 등을 화가 본인이 처리해야 하다 보니 작품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지금은 고수열이 곁에 있지만 고훈이 그 유명세에 비하여 활동이 적은 것도 사실이었다.

‘휘트니 비엔날레도 준비하는 게 좋았을 텐데.’

이번 전시회도 중요하지만 결국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계 무대를 상대로 해야 했다.

특히나 북미와 유럽에서의 인지도가 중요했고, 고훈이라면 그 가능성이 입증된 사례였다.

휘트니 비엔날레뿐만 아니라 올해 예정된 굵직한 행사에서 서로 초대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고훈은 초대전 이후 이렇다 할 예정이 없었다.

‘아무래도 힘들지.’

고수열이 모든 화가로부터 존경받는 화가이자 교육자, 학자이긴 하나 훌륭한 매니저는 아니었다.

“흠.”

하나 그렇다고 국내에 전문적인 업체가 있어서 믿고 맡길 수도 없었다.

방태호는 아마 고수열도 그 점을 고민하고 있을 거라 판단했다.

‘한번 말씀드려봐야겠어.’

방태호가 차를 몰았다.

* * *

1)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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