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49화
14. 첫 전시회(1)
“너, 네가 여긴 왜.”
저 사람과는 한 번도 정상적으로 인사한 적 없다.
그래도 할아버지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한다.
“액자 찾으러 왔어요.”
“뭐?”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모았다.
“사실입니까?”
“네. 정말 황홀한 작품이라 즐겁게 작업했어요. 작은 반 고흐의 열렬한 팬이 될 정도로요.”
피에르 말로가 웃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 여유로운 미소를 보니 작업이 아주 잘 마무리된 모양이다. 빨리 확인하고 싶다.
“바로 볼 수 있어요?”
“그럼요. 마르소 씨와 플라티니 대표도 함께하시는 건 어떨까요?”
피에르 말로가 이상한 제안을 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서 쳐다보니 어깨를 으쓱인다.
“이런.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한 모양이네요. 당신의 열렬한 팬인.”
“쓸데없는 말을 이어가지 마시오, 피에르 말로.”
저놈은 뭐만 하면 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저런 성격이니 할아버지가 못마땅해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피에르 말로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왜 안 가?’
당장에라도 나갈 것처럼 행동하더니 또 움직이지는 않는다.
“안 가요?”
“……피에르 말로가 권유한 일을 거절할 순 없잖아.”
미셸 플라티니가 물으니 이젠 또 보겠단다.
“아뇨. 부담스럽게 여길 일은 아니에요. 고훈 씨에게도 물어볼 일이고.”
피에르 말로가 나를 보았다.
“상관없는데. 그럼 그것도 보여줘요.”
아까부터 앙리 마르소가 들고 있는 액자가 눈에 띈다. 포장되어 있는데 혹시 피에르 말로의 액자인가 싶다.
그가 작업해 준 그림이라면 분명 멋진 작품일 테니 <서리 밀밭>을 보여주는 대가로 충분할 거다.
피에르 말로와 미셸 플라티니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듯 앙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척 당황한 얼굴이다.
“이건 안 돼.”
치사하게 그림 보여주는 걸로 생색이다.
“그럼 나도 싫어요.”
“누가 보고 싶댔어?”
앙리 마르소가 신경질을 내며 샤똥을 나섰다.
그의 비서가 뒤를 쫓는데 그 와중에 액자를 소중히 가지고 가는 걸 보면 무척 아끼는 작품 같다.
“저, 저 못돼먹은 녀석.”
할아버지가 드물게 험한 말을 꺼냈다. 말로도 이상하게 여기며 콧수염을 매만진다.
미술 하는 사람 중에 특이한 사람이 많긴 하다만 저 인간은 내가 겪은 사람 중에서도 유별나다.
“흫.”
미셸 플라티니가 웃음을 참는다.
의아하게 보고 있으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저래 보여도 너 엄청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요?”
“응.”
“……저렇게 행동하는데요?”
“별나긴 하지?”
“많이요.”
미셸 플라티니가 웃었다.
“전시회 꼭 초대해 줘. 여기.”
명함이다.
“실례했습니다.”
미셸 플라티니가 일어서서 할아버지와 피에르 말로에게 인사했다.
저 사람과 함께하는 미셸 플라티니는 아마 수녀 정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흐음.”
피에르 말로가 콧수염을 길게 잡아당기다가 정신을 차렸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사소한 일이 있었지만 액자에 든 <서리 밀밭>이 기대되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말로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서 기다리자 직원이 콜라와 커피를 내주었다.
잠시 후.
피에르 말로가 직접 <서리 밀밭>을 가져왔다. 일부러 천까지 씌운 걸 보면 이 사람도 주목받길 참 좋아한다.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할아버지를 보니 어서 걷어보라는 시선을 보내고 계셨다.
천을 벗겨내자.
<서리 밀밭>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맙소사.’
피에르 말로가 모든 그림에는 가장 어울리는 액자가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다.
그림과 가장 가까운 부분은 <서리 밀밭>의 가장자리와 이어지게 조각해 두었다.
그림이 조금이나마 더 커 보이고, 깊이감을 느꼈던 이유가 이것이다.
놀랍도록 섬세한 기술이다.
틀 중간은 금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바깥은 무늬는 없지만 <서리 밀밭>의 배경처럼 검푸른 색으로 칠해 두었다.
이 역시 내가 조명하고자 했던 서리 내린 밀밭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는 장치다.
“70년 된 호두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온‧습도 변화에 따른 변형이 적고 충격에도 강하죠.”
피에르 말로가 액자 가장 안쪽을 가리켰다.
“작품이 좀 더 크게 느껴지도록 조각해 놓았습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얼마든지 교체 가능하십니다.”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말로와 시선을 마주하고 웃었다.
“이 부분은 도금했습니다. 액자와의 단절성도 챙기면서 멀리서도 이목을 끌 수 있죠.”
차분한 금빛이 은은하면서도 사람을 혹하게 한다.
“테두리는 금빛을 상대적으로 잡기 위해 검게 칠했습니다.”
<서리 밀밭>이 조명하는 금빛 밀밭이 죽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품격이 느껴진다.
액자 안의 <서리 밀밭>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멍하니 지켜보게 된다.
자식은 없지만 만약 아이가 예쁜 옷을 입고 자랑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어떠냐.”
할아버지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너무 좋아요. 서리 밀밭에게 이보다 잘 어울리는 옷은 없을 거예요.”
“오오. 무쉬. 너무나 귀여운 표현이네요. 영광입니다.”
별난 사람이지만 이렇게나 멋진 액자를 만들어 주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말로가 종을 흔들어 사람을 불렀다.
“레오, 서리 밀밭을 포장해 주세요. 장거리 이동을 하니 특별히 신경 써 주세요.”
“네, 대표님.”
말로는 그림을 부를 때 대명사를 쓰지 않고 꼭 제목으로 부른다.
방금 같은 경우도 ‘이걸 포장해’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서리 밀밭을 포장하라고 말했다.
난 이 사람의 이런 태도가 참으로 좋다.
“고훈 씨, 잘 알고 계시겠지만 노파심에 설명 드릴게요. 유리를 따로 포장해 드리지만 반드시 끼울 필요는 없어요. 습도와 온도 조절을 잘한다면요.”
물론이다.
아직 마르지 않기도 했으니 시기상조다.
“또 호두나무는 충격과 온‧습도에는 강하지만 벌레에는 취약합니다. 갉아먹기 아주 좋은 나무거든요. 그러니 청결한 곳에서 보관해 주셨으면 합니다.”
“꼭 그럴게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그가 <서리 밀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군말 않고 들었다.
피에르 말로가 만족스럽게 미소 짓다가 아 하고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작업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서리 밀밭에는 서명이 되어 있더라고요. 한글인 것 같은데.”
“맞아요. 한글로 고훈.”
“해바라기와 손님에는 서명하지 않았잖아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마음을 다잡길 반복했던 때와 달리.
<서리 밀밭>은 내가 나로서 그린 첫 작품이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머물렀던 라부 여관을 둘러본 두 달간의 여행.
반 고흐 미술관을 찾은 방문객들 덕분에 후회와 자책으로 얼룩졌던 과거를 사랑할 수 있었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나를 연구하고 기리는 분들을 만남으로써 과거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찾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밀밭에서 지금의 나를 알게 되었다.
과거, 수확을 앞둔 밀밭에서 절망했던 내가 지금은 얼어붙은 밀밭에서 희망과 용기를 느낀다.
모두 이분 덕이다.
여행 전만 해도 이분이 친할아버지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늘.
지금은 이렇게 행복한 가족을 만났음에 감격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의아해하는 할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떼, 말로에게 말했다.
“화가 고훈의 첫 개인전에 걸릴 그림이니까요.”
“오우.”
피에르 말로가 양쪽 볼을 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감정 표현이 풍성한 사람이다.
“정말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전시회가 열릴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좋을지 걱정되네요.”
피에르 말로가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아 흔들었다.
* * *
두 달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내 생에 이렇게 즐거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림과 조각, 요리 그리고 멋진 사람들과 함께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어때. 재밌었어?”
“정말로요. 이렇게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음?”
“……기억할 수 있는 안에서요.”
“굳이 떠올리려고 안 해도 돼. 기억이 있든 없든 할아버지 손자라는 건 변치 않으니까.”
죄책감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아무리 손자 된 도리를 다함으로써 죽은 고훈과 이분께 양해를 구하고 싶다고 한들 그건 내 입장일 뿐이다.
내가 이분을 얼마나 사랑하든.
이분이 주는 사랑은 내가 ‘고훈’이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할아버지.”
“음?”
진실이 밝혀졌을 때 저 따뜻한 눈빛이 어떻게 변할지 생각하면 두렵다.
당장 내 손자를 내놓으라고.
손자 몸에서 꺼지라고 하실 것이 뻔하다.
“……아니에요.”
내 행복을 포기하는 것도, 이분께 미움받는 것도 두려워서 말을 삼키니 어깨를 끌어안으셨다.
“훈아.”
“……네.”
“할아버지는 말이다. 너랑 함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해.”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다스리기 버겁다.
“네 아빠하고 싸우고 다시는 널 못 볼 줄 알았어. 나도 네 아빠도 쓸데없는 고집이 있거든.”
할아버지가 등을 쓸어내렸다.
“병원에 누워 있는 널 봤을 때, 사실 네가 내 손자라는 것도 사실 믿기지 않았단다. 네 엄마가 보내준 사진으로만 봤으니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훈이 너나, 나나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집착할 필요 없단다. 네가 깨어난 날부터 시작된 거야.”
난 얼마나 이기적이란 말인가.
“즐거운 일, 행복한 일 때론 슬픈 일도 같이 쌓아나가면 돼. 그게 가족이야.”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마치 나를 위로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