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1화
8. 화룡점정(3)
개인전을 하루 앞두고.
앙리 마르소는 여전히 조각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은 문제는 단 하나, 앙리 마르소의 에메랄드빛 눈이었다.
몇 주에 걸쳐 고민했지만 <마르소의 보석>은 아무런 답을 내주지 않았다.
콜롬비아에서 공수해 온 에메랄드도 성에 차지 않았다.
조금 더 투명하고 푸른빛이 섞인 보석을 찾다가 3캐럿의 그란디디어라이트 두 개를 16만 유로에 구입했지만 그조차 흡족하지 않았다.
눈부신 발상과 탁월한 감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앙리 마르소는 아름다움의 저 끝에 한없이 무기력한 자신을 마주할 뿐이었다.
‘여기까진가.’
앙리 마르소는 지난 1년간 단 한 번도 <마르소의 보석>의 완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넘치는 기교와 숭고한 미학을 온 세상에 알릴 걸작을 만드는 일이었기에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최근 한 달.
조금도 진전되지 않는 <마르소의 보석>을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타협해야 함을 느꼈다.
자신의 아름다운 눈을 표현하는 것은 무리라고.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조각상에 굳이 보석을 박아넣어야 하겠냐고.
이 상태로 공개해도 대중은 절정에 이른 자신의 표현력에 넋을 놓을 거라고.
대중과 수집가들은 ‘누가’ 만든 작품인지에 집중했고, ‘작품’은 가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미완성의 <마르소의 보석>을 내보여도 그들은 ‘앙리 마르소’란 이름에 기대어 환호할 것이었다.
그렇게 포기할 이유와 명분은 한도 끝도 없이 많았지만.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 없었다.
앞으로 미술사가 기억하고, 만인이 우러러보게 될 자신이 겨우 이런 일에 가로막힐 순 없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에 타협이란 있을 수 없었다.
까득-
벌써 이틀째 식음을 전폐하고 잠조차 이루지 않으며 <마르소의 보석>을 노려보던 앙리 마르소가 이를 갈았다.
세상 어떤 보석이라도.
그것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비싸든 상관없었다.
찾아서 저곳에 박아넣어야 했다.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려 작업대를 가득 채운 보석들을 살폈다.
<마르소의 보석>에 넣기 위해 구한 보석들은 저마다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품질이 좋다는 에메랄드, 페리도트, 배리사이트, 비취, 지르콘, 그린 다이아몬드, 토르말린, 차보라이트, 데만토이드, 그란디디어라이트는 눈에 보이는 족족 사들였다.
그러나 백여 개가 넘는 보석이 줄지어 있어도 그의 마음에 드는 물건은 없었다.
직접 세공해 보기도 했지만 조각과 보석 세공 기술은 전혀 다른 분야였다.
그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올 리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문득 시선을 옮긴 곳에 고훈의 <손님>이 걸려 있었다.
취급도 하지 않았던 색연필화였다.
제법 자세히 묘사하려고 했으나 흔하디흔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옅게 덧그려진 해바라기와 그 해바라기 때문에 은은하게 빛나는 두 사람의 얼굴이 마치 반 고흐의 시선을 연상케 하여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앙리 마르소가 주먹을 꽉 쥐었다.
미완성의 <마르소의 보석>이 저것과 함께 걸리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제작 기간 일 년과 하루.
최고급 대리석과 싸구려 종이에 그런대로 쓸만한 색연필.
유럽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젊은 거장과 만 아홉 살 소년.
대부분이 <마르소의 보석>에 관심을 두겠지만 미술을 아는 사람들은 <손님>을 알아볼 터였다.
그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앙리 마르소는 한숨과 함께 고민을 거듭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갈 무렵.
젊은 거장이 사흘 만에 입을 열었다. 잠긴 목에서 혼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셸에게 전화해.”
-미셸 플라티니 님께 통화를 시도하겠습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갤러리에 발신음이 울리고, 마르소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 미셸 플라티니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으허?
“전시회 연기해.”
미셸 플라티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간격을 길게 두고 잠에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앙리 마르소 대표님?
“전시회 연기하라고.”
-오밤중에 무슨 헛소리야?
“…….”
-정신 차려. 다음 주도 아니고 당장 오늘이야.
앙리 마르소가 답하지 않자 미셸 플라티니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설득했다.
-이번에 연기하면 세 번째야. 내일 방문하기로 연락한 사람만 오백 명이 넘어.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래. 그거 내가 한다고 치자. 그 사람들이 누굴 욕하겠어?
“그러든지.”
미셸 플라티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학 동창으로, 사업 파트너로, 연인으로 십 년 넘게 봐 왔지만 더는 그의 철없는 행동을 받아줄 수 없었다.
-큐레이터는 나야. 당신이 하고 싶지 않으면 고소를 하든 맘대로 해. 난 해야겠어.
“미셸.”
-정신 차려. 당신 작품 보려고 바다를 건너오는 사람도 있어. 그따위 책임감으로 대체 뭘 하겠단 거야?
미셸 플라티니가 통화를 끊었다.
앙리 마르소는 끊어진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덮어두고 다시금 <마르소의 보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 * *
2027년 12월 11일.
앙리 마르소의 개인전을 구경하고자 세계 각지의 유명인사들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
반년 전부터 이어온 대대적인 홍보 덕분에 미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 이들도 줄을 이루어, 갤러리 개관 시각 오전 10시가 되었을 땐 일대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히~”
취재를 위해 나선 김지우가 질렸다는 듯 입술을 내리며 신음했다.
한편 고훈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나선 고수열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훈아, 꼭 봐야겠어?”
“네.”
“저 봐라. 차례 오려면 한참 걸릴 텐데?”
“그래서 더 보고 싶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는 이유가 있겠죠.”
“끄응.”
잔뜩 기대한 고훈과 심기 불편한 고수열의 대화 도중 한 기자가 그들을 발견했다.
“고수열 경!”
그의 외침에 수백 명의 이목이 한 번에 쏠렸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잠!”
고수열, 고훈과 함께 있던 김지우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다음 전시회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앙리 마르소 전시회에 오신 건 심경의 변화 때문인가요? 아니면 손자와 앙리 마르소의 관계 때문인가요?”
빗발치는 질문에도 고수열은 의연했다. 손자를 보호하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훈이 그림이 걸린다고 하기에 찾았습니다. 앙리 마르소와는 관계없고요.”
“오늘 공개되기로 한 마르소의 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 보지 않은 것을 가타부타 말할 수 없지요. 다른 방문객에게 피해가 되니 질문은 여기까지 받겠습니다.”
“손자분께 여쭙습니다. 순식간에 미술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는데 오늘 전시회에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고수열의 정중한 거절에도 한 기자가 고훈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모두 고수열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들 역시 고훈이 어떤 심경으로 이곳을 찾았는지 묻고 싶었다.
첫 발표작 <해바라기>의 판매가는 200만 유로.
다른 누구도 아닌 까탈스러운 수집가 앙리 마르소가 거액을 지불하면서까지 구입했다.
덕분에 고훈은 순식간에 화제를 모아, 현재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또한 그가 해송 고수열 화백의 손자이자 세계적인 아트 디렉터 고해성, 이수진의 아들이란 사실이 밝혀지니 수집가들 사이에 고훈의 그림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그러던 중.
이번 앙리 마르소 전시회에 게시될 고훈의 그림이 어떻든 최소 100만 유로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사람도 나온 상황.
언론은 앙리 마르소가 1년간 준비한 <마르소의 보석>만큼이나 고훈의 새로운 그림이 어떠한지, 판매 성사가 될지, 그렇다면 얼마에 팔릴지 집중하고 있었다.
고훈은 질문을 던진 기자를 빤히 보다가 웃었다.
“앙리 마르소 작품이요.”
소란스럽던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다.
고훈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본 적 없거든요. 기대하고 있어요.”
작품을 보러 전시회를 찾았다는 너무나 상식적인 대답에, 그림이 얼마에 팔릴지 기대하냐는 뜻으로 질문한 기자는 말문이 막혔다.
때마침 개관 시각이 되었고.
방문객들이 한 명씩 갤러리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우선 입장하기 위해 흩어지자 고수열이 손자를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잘했다.”
“뭘요?”
“전시회는 작품을 보러 가는 거지. 그걸 잊으면 안 되는 거야. 요즘엔 전시회가 그저 그림 팔고 이슈 만드는 곳으로 되었어. 차분히 소통하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할아버지도 앙리 마르소 작품 안 본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그놈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고. 너도 취향이란 게 있을 거 아니냐.”
“그건 그래요.”
“누가 좋고 누가 싫어?”
대화를 주고받던 고수열과 고훈은 힘겹게 다가온 김지우의 행색에 놀랐다.
기자들에게 밀려 넘어졌는지 바지 무릎이 까지고 머리카락도 엉망이었다.
그러고도 질문을 하니 고훈은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렘브란트, 밀레, 로트렉, 피카소, 할아버지, 미래 이모 그림이 좋아요.”
김지우가 눈을 깜빡였다.
“이모? 장미래 교수?”
“네.”
“그렇게 친해?”
고수열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기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럼 나중에 인터뷰 좀 하게 해주면 안 될까?”
“직접 말하세요.”
고훈의 단호한 거절에 김지우가 풀이 죽었다.
“아무튼. 학장님이랑 장미래 교수는 비슷한데, 피카소는 화풍이 완전 다르잖아.”
“어떻게 하나만 좋아해요.”
“……그것도 그러네. 그럼 싫어하는 사람은?”
“폴 고갱.”
“고갱? 왜?”
“싫어요.”
고훈의 단호한 대답에 김지우가 어깨를 으쓱이곤 수첩을 꺼냈다.
줄이 조금씩 줄어들어 입구 근처에 이르렀는데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벌써 사람이 꽉 찼나?”
김지우가 폴짝폴짝 뛰어 보기도 하며 갤러리 안쪽 상황을 살피려고 했다.
“많이 안 들어간 것 같은데 안 움직이네.”
“뭔 문제가 있겠지. 훈아, 돌아가서 할아버지랑 피자 먹을까?”
“점심때 먹어요.”
“네가 좋아하는 콜라도 마시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만 포기하세요.”
“끄응.”
좀 더 시간이 지체되자 갤러리 직원들이 나서서 입장을 유도했다.
“아.”
겨우 마르소 갤러리 안으로 들어선 고훈 일행은 그제야 입장이 정체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관객들이 앙리 마르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자각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문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네 명의 보안요원이 사방을 지켰고, 차단 테이프도 두르고 있었다.
앙리 마르소 곁에는 작업대와 도구가 그대로 있었다.
작업대 위 유리 상자에는 눈부신 보석이 반짝였다.
‘원래 저랬나?’
앙리 마르소는 평소 고상한 모습과 전혀 달랐다.
눈 주변은 어둡고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은 푸석했으며 백옥 같던 피부는 생기를 잃었다.
그러나 <마르소의 보석>을 노려보는 눈만큼은 빛나고 있었다.
[작업 중]
[정숙할 것]
그 곁에 세워진 푯말로 그가 아직 <마르소의 보석>을 완성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그것을 본 고훈이 작게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