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화
8. 화룡점정(2)
식당에 자리 잡고 나서야 김지우가 웃었다.
“히. 죄송해요. 너무 알고 싶어서.”
할아버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긴 해도 저 밝고 기운찬 모습이 밉진 않으신 듯하다.
“주문부터 하지요.”
김지우가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제가 살게요! 뭐든 시켜주세요.”
“허허. 고마워요. 훈이 뭐 먹을 테냐?”
차림표를 보다가 이거다 싶은 것을 발견했다.
“홀란저 니우어요.”
“잉? 뭔지는 알고?”
“청어 절인 거잖아요.”
할아버지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곤 직원에게 말했다.
“휫스폿 두 개랑 홀란저 니우어 하나, 미트볼 하나 부탁해요. 물도 두 잔 주시고.”
“저도 휫스폿 하나 주시고 치킨 샐러드랑 라임 탄산수 주세요.”
직원이 주문을 받다가 나를 빤히 보곤 물었다.
“빵 같이 드릴까요?”
“아니요. 아, 자르지 말고 통째로 주세요.”
직원이 어깨를 으쓱이곤 주방으로 향했다.
“맛없으면 미트볼이랑 휫스폿 먹어.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네.”
청어 절임이 맛이 없을 수도 있나 싶은데, 김지우가 대화를 텄다.
“잘 지내셨죠?”
“시간 가는 줄 모르지요. 훈이랑 같이하는 여행이니까요.”
김지우가 눈을 크게 동그랗게 뜨고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할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훈이는 어때? 재밌어?”
“네.”
“어디 어디 구경했어?”
“반 고흐 미술관이랑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이요.”
“또?”
“또?”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으니 의아해한다.
“일주일이나 지났잖아. 다른 데는 안 갔어?”
“허허. 반 고흐 미술관에서만 6일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대신 답하니 눈썹을 들어 올리며 놀란다.
표정이 참 풍부하다.
“헤엑. 정말요? 그림도 그렇더니 반 고흐 진짜 좋아하는구나, 너?”
나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곳을 찾은 사람들을 관찰하며 조금은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한편, 그 당시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음식 나왔습니다.”
“와.”
직원이 주문한 요리를 차례로 놓아주었다.
소시지를 곁들인 휫스폿(Hutspot: 감자, 양파, 당근, 양배추, 고기 등을 섞어 찐 네덜란드 전통 요리)과 샐러드, 미트볼 그리고 홀란저 니우어가 나왔다.
“아, 하링이었구나.”
“하링?”
“이거.”
요즘은 이 음식을 그냥 ‘하링(청어)’으로 부르나 보다.
청어라고 하면 보통 절여서 먹으니 그럴 만도 하다.
위생을 위해 소독 티슈로 손을 닦고 홀란저 니우어를 들었다.
살짝 붉은빛을 띠는 것이 신선한 청어를 쓴 것 같다. 비린내도 심하지 않고 다진 양파 절임과 함께 주니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식사다.
“그거 맛있어?”
김지우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징그러워하는 것 같다.
“그럼요.”
한입 크게 먹으니 잊고 있던 짭조름함과 고소함이 입안에 퍼지며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
“어때?”
비리다.
“우욱.”
서둘러 티슈를 꺼내 뱉었다.
“어머.”
분명 좋은 청어 조림이고 맛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맛없다.
포테이토 피자나 짜장면이 훨씬 맛있다.
“흐흫.”
김지우가 웃는다.
“거봐라. 자, 손 닦고 이거 먹어.”
할아버지가 물과 소독용 물티슈를 챙겨주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쉬워하며 휫스폿을 떠먹으니 이것은 기억보다 훨씬 맛있다.
감자도 부드럽고 갈아서 넣은 고기도 풍미 있다. 간도 잘 되어 있는 데다 묘한 감칠맛까지.
과거와 똑같은 음식이고 같은 재료를 썼는데 왜 이렇게까지 맛 차이가 나는지 모를 일이다.
식사 후.
김지우가 질문을 시작했다.
“우선 먼저 확인하고 싶은 거. 앙리 마르소가 공동 전시회를 제안하면서 화제가 되었는데, 처음엔 거절했지?”
“네.”
김지우가 마셔보라고 준 라임 탄산수가 참 맛있다.
“선약이 있어서 거절했고. 그러다 앙리 마르소가 직접 찾아왔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뭐래?”
“자기가 한 제안을 왜 거절했냐고 따졌어요.”
“그럴 만하지. 앙리 마르소가 전시회를 제안할 정도면 적어도 자신과 급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단 거니까.”
급을 나누는 게 이상하지만 일단 넘어갔다.
“그래서? 뭐라고 넌 했는데?”
“이유가 고작 선약 때문이냐고 되물어서 화가 났어요. 약속은 누구와 하든 중요하고. 따지는 태도도 재수 없고.”
“예쁜 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김지우가 할아버지의 지적에 웃었다.
“응. 그래서?”
“……그래서 물었죠. 그렇게 내 그림이 좋으냐고.”
“크흡.”
김지우가 또 웃었다. 입은 꽉 다물고 있지만 입술 사이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안. 계속해 줘.”
“그렇게까지 집착할 이유가 없잖아요. 언제 봤다고.”
“그러게. 생각해 보니 달리 이유가 있나 싶네.”
“그래서 그날 그린 그림을 줬어요. 해바라기도 사 줬고 이유는 몰라도 어쨌든 좋아해 주는 건 고마우니까 달래주려고요.”
“흐흫흫흐.”
김지우가 또 웃었다.
“앙리 마르소가 이런 취급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너 진짜 멋지다.”
“그 사람이 그렇게 대단해요?”
돈 많고 그림 볼 줄 알고 영향력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것이 없다.
“그럼. 지금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화가면서 대중에게 인기도 제일 많아. 평단과는 사이가 좀 안 좋지만, 자본주의 시장에서 평론가들의 평이 어디 인기에 비할 수 있니?”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평론가보다 대중의 시선이 중요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감하는 바다.
“게다가 돈 많지, 정말 마음에 드는 거면 아무리 비싸도 사 주지, 물려받았다곤 해도 기업도 훌륭히 운영하고. 별나긴 해도 정말 대단한 사람은 맞아.”
할아버지와 장미래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확실히 호감 가는 유형의 인물은 아니다.
“난 또. 유럽 매체에선 네가 미리 준비한 걸 직접 받으러 간 것처럼 보도했더라.”
“그건 아니에요.”
“오케이. 그럼, 앙리 마르소 전시회에 네 그림이 함께 걸리겠네?”
“그건 모르겠어요.”
고개를 틀어 올려다보니 할아버지가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고 계시다.
“그러지 않아도 그쪽 큐레이터가 연락했단다. 서면 계약하자고.”
“해주세요.”
“난 자꾸 그놈과 엮이는 게 걱정되는구나.”
“왜요?”
김지우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훈이에게도 도움이 되는 게 없진 않잖아요. 실제로 지금 유럽에선 완전 난리고. 훈이 해바라기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명성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덜 된 인간과 교류해서 좋을 것 없죠. 특히나 훈이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김지우가 입술을 만지작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훈이가 앙리 마르소의 명성에 기댈 작가는 아니죠. 고해, 아니. 학장님 손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니까.”
김지우가 아버지, 어머니를 언급하려다가 말을 돌렸다.
“궁금하긴 해요.”
“뭘?”
“앙리 마르소요. 어떤 그림 그리는지.”
개떡 같은 성격에도 인기가 많다는 건 뭔가 있다는 뜻이다.
지금 가장 사랑받는 화가라는 그는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회화도 그리지만 조각도 하고. 아, 직접 보러 가면 되겠네. 어차피 네 그림도 걸릴 거 아냐.”
옳은 말이다.
“할아버지.”
“훈아, 그런 놈하고 어울릴 필요 없어.”
“그냥 어떤 거 만드는지 궁금할 뿐이에요. 되도록 많은 그림 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제 그림 어떻게 보는지도 궁금하고.”
할아버지가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딱 한 시간만 있다 오는 거다. 그놈이랑 말 섞지 말고.”
“네.”
굳이 새끼손가락을 걸자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약속했다.
“그럼 질문 계속해도 될까?”
“네.”
“암스테르담에서 일주일째 있는데, 반 고흐라든지 국립 박물관에만 있었잖아. 고전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대 미술에는 관심 없어?”
“있어요.”
누구보다도 간절하다.
“차근히 볼 생각이에요. 그림은 어느 한 지점만 봐선 이해하기 힘드니까.”
“한 지점만 봐선 이해하기 힘들다? 무슨 뜻이야?”
“예를 들어 렘브란트는 카라바조에게서 영향을 받아 물감의 농도를 조절하고 빛과 그림자를 다루게 됐죠.”
“응.”
“그런 렘브란트를 존경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따라 할 수 없었고요.”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나는 천재 렘브란트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도 색을 활용하는 방법이나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생략하는 법을 배운 덕에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어요.”
“그치. 그런 반 고흐는 야수파에 영향을 주었고.”
야수파가 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화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미술의 역사를 이어갔어요. 전 시대로부터 얻은 것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발전시킨 거죠. 그러니 어느 한 지점만 봐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들어요.”
“질 들뢰즈 이야기구나.”1)
“질 들뢰즈?”
“모든 화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회화의 역사를 요약한다. 프랑스의 철학자가 한 말이란다.”
할아버지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이 행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내게 조금 당황스럽다.
“확실히. 그렇기 때문에 고전이 가치 있는 거기도 하니까. 멋진데?”
멋지다는 말을 처음 들어서 기분이 묘하다.
“그래서 천천히 알아가려고 해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감성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죠.”
김지우가 슬며시 웃더니 볼을 살짝 잡았다.
“너 정말 애 맞아? 왜 이렇게 어른스러워?”
머리를 쓰다듬는 건 용납할 수 있지만 볼을 꼬집는 것까지 허용할 수 없다.
얼굴을 빼고 노려보는데도 너무 밝게 웃어서 뭐라 하지 못했다.
“너 진짜 천잰가 봐. 그쵸, 학장님?”
“하하하.”
할아버지가 부정하지 않으신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은 공경하는 분이 나와 관련한 일만큼은 마음껏 자랑하신다.
* * *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을 구경하다 보니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김지우의 말대로 정말 유명해졌는지 가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인사하는 할아버지에 비하면 멀었지만 유명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하.’
그나저나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다.
반 고흐 미술관에서의 6일이 나를 돌아보고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시간이었다면 레이크스 박물관(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은 경이로움의 반복이었다.
할아버지와 그림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 가는 줄 몰라서, 한 작품을 두고 하루를 꼬박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힘들진 않아?”
“하나도 안 힘들어요.”
힘들기는커녕 이렇게까지 행복했던 적이 있을까 싶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 시립 박물관에 가도 되고 현대 미술관도 괜찮고.”
“앙리 마르소 전시회에 가볼래요.”
“끄응.”
아직 마음에 안 드시는 듯.
하지만 약속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일정을 알아보셨다.
“파리에서 하는구나.”
“마르소 전시회 본 뒤에 오르세도 갈 수 있어요?”
“그럼. 루브르도 가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이라는 오르세와 루브르에 갈 수 있다니.
작은 가슴이 또 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1)질 들뢰즈(1925~1995): 프랑스의 철학자. “모든 화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회화의 역사를 요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