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09화 (26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09화

55. 화룡점정(14)

“앙리다. 사인 받을까?”

“훈이랑 놀고 있는 것 같은데?”

개막식이 다급히 마무리되고.

앙리 마르소와 고훈은 언론의 인터뷰도 거절한 채 정답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큰 걸 대체 어떻게 더 잘 보관하라는 거예요! 하나도 아니고 세 개씩이나!”

“땅 사서 어따 팔아먹었어!”

“건물 아직 올라가지도 않았어!”

고훈과 앙리가 아웅다웅하는 한편 고수열, 방태호, 아르센 르블랑은 거리를 두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방태호는 <변치 않는 가치> 앞에서 싸우는 두 사람을 말리고 싶었지만, 고수열과 아르센은 좀처럼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말려야 하지 않습니까?”

“껄껄.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법 아니겠나.”

손자 일이라면 그저 귀엽게 보는 고수열을 설득하긴 어려울 듯싶었다.

방태호가 아르센을 재촉했다.

“아르센 씨마저 그러시면 안 되죠. 마르소 씨 이미지를 생각하시면.”

“괜찮습니다. 평소에도 저런 분이시라. 보시죠.”

방태호가 비서 아르센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앙리 마르소와 고훈을 둘러싼 팬들의 얼굴에서 불쾌함이나 경멸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말해 보라고요.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앙리 마르소의 닦달에 지친 고훈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네?”

“…….”

“왜 또 말을 안 해!”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자기는 별관까지 만들어 고훈의 작품을 전시하려는데, 고훈에게도 그러라고 말하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고훈이 가슴을 쳤다.

“말해 봐요. 뭘 원하는지. 말을 해야 알 것 아니에요.”

“그만해.”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요?”

“그만하자고!”

“하던 말은 끝내야지!”

고훈은 답답했다.

설령 언성을 높이더라도 대화를 나눠야 서로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앙리 마르소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면 앙리 마르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될 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집쟁이라 서로를 설득하지도 못했다.

일단 감정을 다스리고 냉정하게 대화하고 싶은데, 고훈은 사사건건 모든 일을 당장 해결하려고 들었다.

“듣기 싫다고 했어!”

“그럼 평생 이러고 안 볼 거야? 얘기를 해야 뭐라도 될 거 아니에요!”

개막식 이후 30분째 대화에 진전이 없자 고훈이 소리를 질렀다.

서로 안 보면 이대로 영영 사이가 멀어지게 될 것 같았다.

헛된 자존심 때문에 잃은 소중한 인연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마저 멀리하고 싶진 않았다.

“좋아요. 처음부터 얘기해 봐요.”

“지금까지 말해놓고 뭘 또 처음부터 해?”

“저…….”

“뭐야!”

앙리 마르소가 짜증 내며 고개를 돌렸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근데 저 진짜 진짜 팬이거든요! 사인 한 장만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저는 마르소 갤러리 3년째 구독하고 있어요!”

몇몇 사람이 무리를 지어 다가와 있었다.

“눈 없어? 바쁜 거 안 보여!”

앙리 마르소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팬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한테도 화내줬어!”

잔뜩 성질이 나 인상을 쓰고 있던 앙리 마르소가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이 화를 내고 있는데 좋아하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웃어?”

그가 목소리를 깔자 그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팬들이 위축되었다.

“저, 저희는 그냥. 너무 좋아서.”

“가자. 죄송합니다.”

팬들이 고개를 숙이자 앙리 마르소가 한 번 더 소리쳤다.

“어디 가!”

“네?”

“사인 해달라며!”

앙리 마르소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종이와 펜을 빼앗았다.

“빌어먹을. 이름!”

“크리스토퍼 앨런이요!”

“앨런?”

“Allen.”

“다음!”

크리스토퍼 앨런이 화색이 되어 종이를 받아들었다.

빌어먹을 크리스토퍼 앨런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닐스 프람이요! 저는 귀여운 닐스 프람이라고 적어주시면 안 돼요?”

“닥쳐.”

앙리 마르소가 눈치 없는 닐스 프람이라고 적어서 주자 닐스 프람이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한두 사람씩 사인을 받는 데 성공하자 지켜보던 이들도 우르르 달려들었고.

그중엔 고훈의 팬도 있었다.

“뉴튜브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근데 지금은.”

“사진! 사진 같이 찍어줄 수 있어요?”

“그럼요. 근데 잠시만.”

“얘들아, 사진 찍어주신대!”

“진짜?”

갑작스레 몰려든 인파 때문에 고훈도 어쩔 수 없이 말다툼을 중단해야 했다.

* * *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개막일.

오후 내내 사인을 해 주느라 지친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을 상대하느라 진이 빠져 소리칠 기운도 없었다.

“구경도 못 하고 이게 뭐야.”

“너 때문이잖아.”

“내가 뭐요.”

“거리에서 그 난리를 피우니까 몰려든 거 아니야.”

“앙리가 사인 해줘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너 때문이야.”

“당신 때문이야.”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티격태격 싸우는 두 사람을 두고 방태호와 고수열이 대화를 나누었다.

“보이지 않는 조각?”

“네. 살바토레 오라우란 작가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출품한 작품인데. 하핫. 재밌더군요.”1)

방태호가 스마트폰으로 살바토레 오라우의 작품 를 찾아서 고수열에게 보여주었다.

고수열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것도 없지 않나.”

“네. 뮌스터시의 공기와 빛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뜻인가. 실제로는 없다는 말인가?”

“덕분에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고수열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역시 오랜 세월 예술계에 몸담았고 사물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를 많이 봐 왔지만.

형태와 실체가 없는 조각상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줄곧 말씨름하던 고훈과 앙리 마르소도 관심을 보였다.

방태호가 두 사람을 향해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Noi Siamo?”

“우리는.”

고훈이 이탈리아어로 된 제목을 읽자 앙리가 뜻을 전해주었다.

“…….”

사진을 확인한 앙리 마르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살바토레 오라우는 뮌스터시의 공기와 햇살, 달빛으로 조각한 야 말로 뮌스터와 가장 어울리는 조각상이라고 자평하며, 10만 유로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고훈도 납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어떻게든 살바토레 오라우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발상은 공감되네요.”

“껄껄. 그래?”

고수열은 손자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조각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보는지 할애비한테도 말해주렴.”

“뮌스터와 시민들을 잇기 위한 일이니까요. 그들에게 뮌스터라는 공간 자체가 소중함을 알려주려는 것 같아요.”

“흐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까요.”

“생각하기 싫은 놈의 헛짓거리야.”

앙리 마르소가 끼어들었다.

“구상이 없는 예술은 있을 수 없어. 매개 없이 발상만 남으니 구질구질하게 설명이나 늘어놓는 거지.”

“그래도 재밌는 시도잖아요.”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것도 없는 걸 종이 한 장으로 증명하고 그것도 모자라 팔려는 놈이야. 예술적 시도? 넌 사람을 너무 좋게 보는 게 탈이야.”

“그 덕분에 당신이랑 친구하고 있잖아요.”

“…….”

고훈이 싱글싱글 웃으니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근데 이걸 판대요?”

“응. 사실 그 때문에 더 말이 나오는 것 같아.”

방태호가 답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작품은 시에서 구매해서 영구 전시하거든. 이것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10만 유로는 내 생각에도 과해 보이네.”

방태호도 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라우의 주장처럼 색다른 시도로 볼 수도 있지만, 앙리 마르소가 지적한 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단지 증명서와 말뿐으로 판매하려는 의도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예술은 사기다.”

고수열이 슬며시 나서자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백동준 선배가 하신 말씀이지.”

“예술은 사기. 예술은 사기 중의 사기이고 그것도 아주 고등 사기라고 말씀하셨죠.”2)

방태호가 거들었다.

“음. 또 스탠리 카벨이란 사람도 재밌는 말을 했더랬지. 현대 미술은 사기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이야.”

고훈이 고민에 빠졌다.

수십 년 전 허무주의에 빠진 예술가들이 양식을 파괴하다가 변기에 제목을 붙인 사람도 나타났었다.

논란이 이어졌지만 미술계는 대체로 그것을 예술로 인정하고 있었다.

다시금 시간이 흘러 자기 파괴적인 성향이 옅어지고 다시금 구상과 발상이 조화를 이루게 된 지금에 와서 ‘아무것도 없는 조각상’이 났다.

그것이 사기인지 예술인지는 판단하기 힘들었다.

“독창적이고 새로운 주장만 꺼내면 예술이란 것들은 전부 사기야.”

앙리 마르소가 단정 지었다.

“뒤샹이 변기에 이름을 붙인 걸 똑같이 따라 하는 것밖에 안 돼. 사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들은 사기꾼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이득을 취하는 놈이거나, 세뇌된 놈뿐이야.”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고수열이 일부 동조했다.

“그러나 예술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건 언제나 사람이지 않았나. 부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인정하는 사람도 있겠지.”

일행의 대화를 들으며 고훈은 조금씩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전시되지 않은 장소에 들른 관람객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작가의 설명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를 얻지 못하는 그것을 과연 미술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 뮌스터란 공간의 소중함을 표현하고, 시민들에게 환기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만.

본인이 인정하지 않을 뿐, 누군가 를 예술로 받아들인다면 그 또한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렵네요.”

고훈이 피식 웃었다.

“제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술이 아닌 건 아닌데. 그렇다고 이걸 사는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 그래서 동시대 예술이 다원화된 거란다.”

고훈은 오늘 개막식에서 미술감독이 한 말을 떠올렸다.

개성적인 작품이 사랑받으니, 뮌스터에서는 어떤 아이가 태어나도 사랑받을 거라는 말이 여운을 남겼었다.

“미워할 필요는 없잖아요. 다른 것뿐이죠.”

“아니.”

앙리 마르소는 고훈과 달랐다.

모든 미술가가 진심으로 미술을 대하지는 않았다.

개중에는 정말로 남을 속이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그들은 예술계에서 퇴출해야 하는 암세포였다.

그러나 세상 물정 모르는 고훈의 말이 싫지는 않았다.

사람을 너무 좋게만 본다는 말에, 그러니까 당신하고도 친구 하는 거라고 대꾸한 소년을 미워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 * *

1)살바토레 가라우.

이탈리아 예술가로 2021년 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해당 작품은 15,000유로(한화 약 2,000만 원)에 낙찰되었는데, 이 조각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살바토레 가라우는 “볼 수 없지만 대기와 영혼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2)백남준 어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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