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281화 (23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281화

53. 불한당(1)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얼굴을 훑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말도 안 돼.’

마은찬은 손에 쥔 1,000유로를 펴 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힘든 하루였다.

오후 내내 손님 한 명 받지 못하고 귀가하던 차에 야간 아르바이트에 더는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

긍정적으로 생각해 왔지만 독일 유학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가난한 유학생이 공부하기 좋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일 뿐이었다.

뮌스터 국립 미술대학으로 유학 온 지 1년.

대학 등록금은 무료였으나 학교에 다니려면 학기당 800유로를 내야만 했다.1)

공공 의료보험료가 매달 85유로.

2.5평짜리 작은 원룸은 월세가 450유로나 되었다.2)

생활비는 아끼고 아껴 한 달에 200유로를 넘기지 않았지만, 재룟값이 만만치 않았다.

어떨 때는 생활비보다 더 지출하기도 했다.

1년에 최소 1,700만 원.

손 벌릴 데 없는 가난한 유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현실이었다.

오후에는 초상화를 그리고 야간에는 펍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저금은커녕 월세조차 간신히 내고 있었다.

일하는 시간을 늘리면 숨통이 좀 트일 텐데, 그러기에는 독일까지 와서 공부하는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도 아르바이트할 장소도 잃어버린 마은찬은 막막한 현실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멋있었지.’

그는 거만하게 앉아 있던 앙리 마르소를 떠올리며 발을 옮겼다.

우직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 끝내 세계적인 화가로 우뚝 선 남자는 무척 고집스러워 보였다.

‘귀여웠고.’

그 옆에 앉아 있던 고훈도 마찬가지였다.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겪고도 사랑을 나눌 줄 알았던 소년은 캔버스 밖 세상에서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집에 도착한 마은찬은 공동 샤워실에서 이를 닦으며 피식 웃었다.

오늘 저녁에 일어난 마법 같은 일이 믿기지 않았다.

‘당분간 월세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둘이 뮌스터엔 왜 왔지? 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부럽다.’

‘……고추장 사 볼까.’

여유 자금이 생긴 덕에 당장 숨통이 트인 마은찬은 평소 먹고 싶던 제육덮밥을 떠올렸다.

한인 마트가 없는 뮌스터에서는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같은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한국 식당은 이름만 그럴듯할 뿐 현지인을 위한 식당이었다.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장사꾼이 일주일마다 기숙사를 돌며 고추장 같은 식자재를 팔 뿐이었다.

당연히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비싸서 마은찬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었다.

‘뭐 어때.’

여윳돈이 생기니 선택지가 많아졌다.

배송료는 많이 들지만 직접 구매해서 해외배송을 받을 수도 있고 조금 비싸더라도 기숙사를 도는 장사꾼을 통해 살 수도 있었다.

“흐흥흐흥.”

기쁜 마음으로 샤워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마은찬이 컴퓨터를 켰다.

해외배송을 알아보던 차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었고 마은찬은 컴퓨터로 이메일 계정에 접속했다.

“와.”

2030 베니스 비엔날레 불‧한 공동 전시관 커미셔너 방태호가 보낸 메일이었다.

제목: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 서류전형 결과 안내

내용: 안녕하십니까, 마은찬 작가님.

2030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대한민국 공동 전시관 커미셔너 방태호입니다.

프랑스‧대한민국 공동 전시관에 지원해 주심에 감사드리고 서류전형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이후 일정을 안내해 드립니다.

면접일시: 2029년 10월 15일(월) 오전 11시(면접 대상자가 많은 관계로 참석 여부를 필히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면접장소: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XX 프랑스‧대한민국 공동 전시관 면접장(건물 라운지에 안내 인원이 배치될 예정입니다).

면접내용: 포트폴리오 설명 및 인터뷰가 진행됩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에서 어떤 작품을 보여주실지에 대한 5분 내외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주십시오.

면접복장: 자유(슬랙스, 니트, 셔츠, 노타이 모두 가능합니다).

*면접 참석 여부를 12일까지 이메일로 회신 부탁드립니다.

*회신하지 않으신 경우에는 면접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습니다.

“오늘 진짜 무슨 날이야?”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지원한 전시회였다.

세계 최고 권위의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한 이력은 앞으로의 활동에 큰 활력이 될 터였다.

그것을 방증하듯 경쟁률이 2200:1이 넘었었다.

비록 서류 통과일 뿐이라고는 하나 기라성같은 선배 예술가들과 같이 경쟁할 수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뛰었다.

마은찬은 면접 내용을 확인하곤 어떤 발표를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못 가잖아.”

면접 장소가 한국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면접을 보고자 왕복 항공료를 들일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서류를 통과했다는 건 커미셔너에게 포트폴리오를 인정받았단 뜻이니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

마은찬의 시야에 아르센이 넘겨준 500유로 지폐 두 장이 들어왔다.

가장 싼 항공편을 알아보면 충분히 다녀오고도 남을 돈이었다.

한 달 월세가 넘는 돈을 들여 면접을 보러 갈지, 아니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알아볼지.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오늘 저녁의 기적이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 일어난 일 같았다.

“진짜 운 좋은 편이라니까.”

* * *

“오늘은 여러분이 되고 싶은 걸 그릴 거예요.”

시청에서 나온 강사가 아이들에게 과제를 알려주었다.

파리 시청에서 장소를 마련해 준 덕에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게 되었다.

달리다 광장과 뷰그레넬리 쇼핑몰에서의 일이 제법 호응을 얻은 덕이다.

“난 공룡 그릴래.”

“공룡이 되는 거야?”

“응. 엄청 큰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더 큰 거.”

아이들이 함께 노는 모습을 지켜보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편, 코앞으로 다가온 출품 일자에 조급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있어도 돼?”

취재차 따라나선 김지우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물었다.

“잠깐이니까요. 이따가 마르소하고 만나서 회의하기로 했어요.”

김지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앉았다.

“좋은 아이디어 떠올리는 게 쉽진 않은 것 같아. 너도 이렇게 고민하는 거 보면.”

맞는 말이다.

“매번 어떻게 그래?”

“글쎄요.”

뛰어다니기도 재잘대기도 하며 그림 그리는 아이들을 보며 답했다.

“매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아요. 특히 이번 같은 경우엔 더 그렇고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는 있지만 베니스 비엔날레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출품할 작품은 아직 구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 어떡해?”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그려요. 그래도 안 되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어요.”

“역시 천잰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정말 천재라면 무슨 일이든 답을 쉽게 내놓지 않을까요?”

“음.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

그것도 맞는 말이다.

“왜.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는 말도 있잖아.”3)

“그런 말이 있어요?”

“에디슨이란 사람이 한 말이야.”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전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

“노력 없이 탄생한 예술품은 없으니까요.”

천재라고 불렸던 모든 사람이 알고 보면 어마어마한 노력가였다.

마네와 모네.

클림트와 마티스, 피카소도 그러했다.

“난 소방관 할 거야.”

“멋있다. 난 집 짓는 사람 되고 싶은데.”

“어떤 집?”

“도둑 들어오면 혼내주는 집.”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며 자기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아마 저 아이가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영감을 계속해서 지니고 그에 따른 노력을 거듭한다면 20년 뒤에는 분명 훌륭한 소방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응?”

“저 가볼게요.”

건물 밖으로 나와 마르소에게 연락하니 금방 자동차를 보내주었다.

마르소 저택으로 가던 중에 생각을 다듬었다.

뮌스터라는 도시에 가장 잘 어울리고 뮌스터 시민들과 어우러질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곳에서 살지 않았던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르네 마그리트에 푹 빠져 ‘낯설게 하기’를 적용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으니,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와 개인적 취향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소!”

문을 열자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다.

유독 깔끔 떠는 그가 면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면 며칠 밤을 작업하느라 고민했다는 증거다.

아마 베니스 비엔날레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어떤 작품을 낼지 정하지 못한 듯하다.

“오자마자 웬 소란이야.”

“봐요.”

오면서 태블릿에 그린 스케치 한 장을 마르소에게 보여주었다.

뮌스터 시청 건물 사진에 덧그린 아이들을 본 마르소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아이들이에요.”

“보면 알아.”

마르소가 다시금 스케치를 살폈다.

시청 건물로 들어서는 양복 입은 아이들을 무슨 의미로 그렸는지 모르는 눈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를 두고 또 다른 사진을 찾았다.

이번에는 뮌스터 소방서다.

방화복을 입은 아이들이 소방차에 오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니 마르소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 정도라면 마르소도 눈치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차에 그가 입을 열었다.

“실제 뮌스터에 사는 아이를 모델로 할 거야?”

“네.”

“……그래.”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대강.”

마르소라면 내 의도를 알아주리라 믿었다.

시청과 소방서는 어른들의 장소다.

정무를 보고 화재 같은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조하는 장소니 아이들과는 거리가 있다.

“데페이즈망.”

마르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뮌스터다운 일이겠어.”

“맞아요.”

낯설게 하기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즐겁지만, 뮌스터와 어울리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새롭게 생각해 볼 여지를 두면서 뮌스터와 관련된 뭔가가 없을까 고민하던 도중에 꿈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뮌스터 사람들도 좋아할 거예요.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되겠죠.”

“…….”

“본인들 아이가 일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좀 더 상냥하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친근감도 생기고요.”

요새는 어딜 가든 다들 화가 나 있다.

마치 바늘에 닿은 풍선처럼 터지고 만다.

그만큼 삶에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라 화를 내는 사람도 안쓰럽고 당하는 사람도 불쌍하지만.

본인의 권리와 도덕적 우위만을 내세워 남을 무시하고 짓밟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갑질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은데 유럽이라고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런 사람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 주길 바란다.

지금 당신이 괴롭히는 사람의 자리에 당신의 아이가 앉게 될 수도 있다고.

“또 우리 자식들이 크면 여기서 일하게 될 텐데 하고 조심하지 않을까요?”

또 비양심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경종이 되었으면 한다.

자기가 한 잘못을 언젠가 자식들이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부모랑 아이들한테도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또 본인들의 한때가 뮌스터 한쪽에 전시되어 있으면 분명 멋진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뮌스터와 가장 잘 어울리는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니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의 의의에도.

내 개인적 바람과도 결이 맞다.

“어때요?”

마르소가 눈을 마주했다.

“……나쁘지 않네.”

“그럼 같이하는 거예요?”

어느 한쪽이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협심해서 완성하기로 말했었다.

마르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1)독일 대학의 등록금은 없지만 한 학기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교통비, 학생을 위한 법률지원 서비스, 학생회, 학교 건축비, 자전거 대여 서비스, 행정기관 운영비 등은 지불해야 한다.

*본문에 소개된 금액은 2015~2020년 사이의 금액을 기준으로 물가상승률을 예측하여 적용한 값입니다.

2)프랑스, 영국과 비교하면 독일 월세는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3)*에디슨이 말한 Inspiration(영감)은 문맥상 동기로 해석할 수 있으며, 따라서 “What it boils down to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이라는 문장은 동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영감이 없으면 노력이 부질없다든가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해석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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